알고리즘이 짝을 고르는 시대

나무 탁자 위에 놓인 바랜 이력서, 최신 혼전계약서, 스마트폰 화면을 통해 본 시대별 혼인과 신뢰의 변화
이력서에서 스마트폰 알고리즘, 그리고 혼전계약서까지 — 시대에 따라 형태를 바꿔온 인연과 신뢰의 기록.

알고리즘이 짝을 고르는 시대 — 데이팅앱과 계약, 다시 쓰이는 혼인

짝을 찾는 방식이 바뀌면 혼인의 의미도 바뀐다

2026.09.03 · 역사·한국현대사 · 한국현대-결혼 시리즈 ⑪


왼쪽으로 넘기면, 인연이 사라진다

화면 속 얼굴을 오른쪽으로 넘기면 인연이 되고, 왼쪽으로 넘기면 없던 일이 된다.
2020년대 한국의 20~30대에게 첫 만남은 더 이상 소개팅 자리나 동아리 뒤풀이가 아니다. 앱이 먼저 계산하고, 사람은 그 결과를 확인한다.

같은 시기, 또 다른 화면에서는 정반대의 풍경이 펼쳐진다. 결혼을 하기로 한 두 사람이 예식장보다 먼저 찾는 곳은 변호사 사무실이다.
혼전계약서, 재산 분리 조항, 이혼 시 정산 방식 — 사랑을 시작하는 자리에 계약서가 먼저 놓이는 시대가 되었다.

이 두 장면은 서로 무관해 보이지만, 실은 같은 질문에서 출발한다.
공동체가 더는 짝을 골라주지 않고 보증도 서주지 않는 시대에, 개인은 무엇으로 상대를 믿을 것인가.

매칭이 된 순간, 계약서가 먼저 나온다

10편 전, 2020년 무렵의 한국 사회는 “결혼을 안 하는 것”과 “못 하는 것”의 경계에 서 있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흐른 지금, 질문은 한 단계 더 나아갔다. 결혼을 하더라도 그것을 어떤 형태로 맺을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데이팅앱은 이제 낯선 도구가 아니다. 구체적인 비율보다 중요한 것은 그 변화가 보여주는 태도다.
초면의 낯섦을 감당하는 방식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눈짐작에서, 앱이 걸러낸 1차 필터링으로 옮겨갔다는 사실이다.

동시에 국회에서는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를 다시 정의하려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2023년 21대 국회에서 발의되었다가 임기 만료로 폐기된 생활동반자법(혼인·혈연 없이도 서로를 돌보는 관계에 법적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는 법안)은, 22대 국회에서 다시 발의되며 논의의 불씨를 이어가고 있다.1
혼인신고 없이 계약서로 관계를 규정하는 등록동거혼 같은 대안도 한 번씩 언급되는 상황이다.

결혼정보회사의 매칭 대신 앱의 알고리즘이, 집안 어른의 중매 대신 변호사의 계약서가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제도가 바뀌었을 뿐인데, 그것이 사랑이 시작되고 유지되는 방식 자체를 바꾸어 놓았다.

160년 전 런던의 신문에도 “짝을 구합니다”가 있었다

이 풍경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19세기 중반 영국, 산업화로 인구가 도시로 몰려들면서 전통적인 공동체 관계망이 급속히 느슨해졌다.
이웃도, 교회도, 친척도 더는 짝을 소개해줄 만큼 서로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이 신문의 결혼 중개 광고란이었다. 나이·직업·재산 상태·원하는 배우자상을 짧게 적어 신문사에 보내면, 답장은 신문사 사무실이나 지정된 서점을 거쳐 전달되었다.
이 관행이 널리 퍼지면서 “Matrimonial News”처럼 아예 결혼 중개만을 전문으로 하는 정기간행물까지 등장했다.2

흥미로운 것은 이 광고들이 초기에는 철저히 실용적이었다는 점이다. 나이·수입·건강 상태가 먼저 나열되고, 감정은 뒤에 붙었다.
시간이 흐르며 낭만적 표현이 조금씩 늘었지만, 그 골격 — 낯선 두 사람이 문서화된 조건을 먼저 확인한 뒤에야 감정을 허락하는 구조 — 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철학은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동일한 조건 속에서 유사한 양상을 반복할 때, 그 형식이 아닌 태도의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을 뿐이다.

160년 전 런던의 신문 광고란과 오늘의 스와이프 화면 사이에는 기술의 격차만 있을 뿐, 신뢰를 외주화하려는 인간의 구조적 욕망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공동체가 사라진 자리, 시스템이 들어온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형태를 바꿀 때, 그것을 밀어붙이는 힘은 언제나 사랑의 진화가 아니라 신뢰 구조의 붕괴였다.
19세기 런던에서 신문이 낯선 이의 신원을 대신 보증해주었듯, 지금의 데이팅앱은 사진과 프로필로, 혼전계약서는 법률 조항으로 그 신뢰의 공백을 메운다.

1950~60년대 한국의 집안이 혼인을 결정했던 것도, 2020년대 청년이 변호사와 함께 혼인을 설계하는 것도, 결국은 하나의 질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무엇이 두 사람의 결합을 사회 안에서 유효하게 만드는가. 그 답을 쥔 주체가 가문에서 국가로, 국가에서 다시 개인의 계약으로 옮겨가고 있을 뿐이다.

역사는 이 지점에서 질문을 던진다. 신뢰를 문서화하는 기술이 정교해질수록, 우리는 더 안전하게 사랑하게 되었는가, 아니면 사랑조차 증명 가능한 형태로만 허락하게 되었는가.

우리는 무엇을 묶어 결혼이라 부르는가

11편에 걸쳐 이 시리즈가 추적해 온 것은 결국 하나의 풍경이었다. 이력서가 인연을 맺어주던 시절부터, 예단이 혼수 전쟁이 되고, IMF가 배우자의 조건을 바꾸고, 아파트가 결혼의 자격이 되고, 국경을 넘는 인연이 늘고, 이혼이 낙인에서 선택이 되며, 재혼이 다시 가족을 짜고, 국가가 침실까지 들어오고, 마침내 결혼 자체를 하지 못하는 사회에 이르기까지, 결혼은 한 번도 고정된 적이 없었다. 매 시대, 그 시대가 감당할 수 있는 신뢰의 형태로 다시 쓰였을 뿐이다.

지금 국회 안팎에서 이어지는 생활동반자법 논의와 저출산 대책을 둘러싼 사회적 공방은 이 흐름의 가장 최신 장이다.
그 이면에는 국가가 오래도록 독점해 온 혼인의 신뢰 보증 기능을 개인 간의 다양한 법적 계약으로 분산할 것인가 하는 헌정사적 질문이 흐르고 있다.
기존의 혼인 제도가 미처 포섭하지 못한 삶의 형태들을 법적 테두리 안에 둘 것인가의 문제이며, 이 자리에서 그 정답을 단정할 수는 없다.

다음 세대의 결혼이 살아남으려면, 제도는 형태를 바꾸는 속도만큼 신뢰를 회복하는 방법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
계약서가 정교해질수록 관계가 더 안전해진다는 착각과, 앱의 매칭 정확도가 곧 인연의 깊이라는 착각 — 이 두 착각을 넘어서는 것이 앞으로 한국 사회가 가야 할 방향일 것이다.

바라보는 자는 사건을 판정하지 않는다. 다만 되풀이되는 질문을 다시 던질 뿐이다. 신문이든 앱이든, 중매든 계약이든 — 그 형식 뒤에서 우리는 여전히 같은 것을 확인하려 애쓰고 있다. 이 사람을, 믿어도 되는가.

다음 시리즈 예고

한국현대-줄 — 줄을 서다: 무엇을 기다렸는가로 읽는 한국 현대사

결혼 시리즈와 같은 방식으로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 시대순으로 진행된다.
배급을 받으려 서던 줄에서 시작해, 산업화 시기의 취업·입시 줄, 민주화 운동의 시위 대열, 외환위기의 실업급여 줄, 재난 앞의 줄을 거쳐 지금 이 시대의 줄에 이르기까지 — 총 11편으로 이어진다.


이 시리즈의 전편들

이력서로 맺어진 인연 · ② 연애결혼의 등장 · ③ 혼수 전쟁 · ④ IMF와 결혼 · ⑤ 아파트가 낀 결혼 · ⑥ 국제결혼의 물결 · ⑦ 이혼이 흔해진 이유 · ⑧ 다시, 가족이 된다는 것 · ⑨ 저출산과 국가의 결혼 · ⑩ 결혼, 안 하나 못 하나


* 참고할 말씀: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노력한 대가를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한 사람이 그 동무를 붙일 것이나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일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 전도서 4:9-10


1. 생활동반자법 발의 및 폐기 경과 — 국회 의안정보시스템 및 관련 보도
2. 19세기 영국 결혼중개 신문(Matrimonial News 등) 발행 기록 — 영국 신문 아카이브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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