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혼, 안 하나 못 하나
제도가 바뀌었을 뿐인데, 그게 사랑의 모양을 바꿨다
역사·철학 · 한국현대-결혼 ⑩ · 2020년대 · Watchman
청첩장이 사라진 자리
우편함을 채우던 청첩장이 요즘은 드물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한국의 혼인 건수는 2000년 33만 2천 건에서 2020년 21만 3천 건까지 줄었다. 2011년부터 이어진 완만한 감소 흐름이다.1
“왜 결혼을 안 하는가”와 “왜 결혼을 못 하는가”라는 질문은 같은 현상을 가리키는 듯 보이지만 전혀 다른 세계를 전제한다.
이 글은 ‘조건’의 편에 서서 현상을 바라보고자 한다.
청년들이 서명을 미루고 있는 이유는 사랑의 온도가 식어서라기보다, 그 사랑을 담아낼 제도의 규격이 이미 시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있기 때문으로 읽힐 수 있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저출산과 국가의 결혼에서 정책이 어떻게 가장 사적인 선택까지 파고들었는지 살펴보았다. 이번 편은 그 절박함의 뿌리, 결혼 제도 자체가 왜 시대에 뒤처지게 되었는지를 다룬다.
제도가 만든 결혼, 제도가 뒤처진 사회
결혼은 오랫동안 개인이 아니라 가문이 대신 서명하는 계약에 가까웠다. 그 마지막 흔적이 호주제였다.
2005년 2월 헌법재판소는 이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고, 2008년 호주제는 완전히 폐지됐다.2
이는 단지 “가문의 계약에서 개인의 계약으로” 성격이 전환된 사건에 그치지 않는다.
국가가 승인해 온 ‘혈연·혼인 중심의 정상가족’이라는 틀 자체가 법적으로 해체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문제는 그 이후다. 후속 입법과 사회복지 설계는 여전히 ‘혼인신고를 마친 2인 이상 가구’를 기본 단위로 삼는 행정적 타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제도는 개인에게 가문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날 자유를 주었지만, 독립된 주체로서 그 계약을 체결하고 유지할 경제적·제도적 안전망까지 함께 제공하지는 못했다.
자유는 부여되었으되, 그 자유를 실현할 자원은 오롯이 개인의 사적 책임으로 남겨진 셈이다.
같은 시기 비친족가구는 2000년 15만 9천 가구에서 2020년 42만 3천 가구로 늘었다.1 제도 밖에서 이미 많은 이들이 다른 방식으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삼보(Sambo)가 먼저 답한 질문
같은 질문에 먼저 답을 내놓은 사회가 있다. 1987년, 스웨덴은 동거 가구를 규율하기 위한 법제화에 나섰다.
이 법의 핵심은 동거 커플에게 결혼과 무조건 동일한 혜택을 제공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함께 살며 발생하는 최소한의 법적 리스크 — 재산분할, 거주권 — 를 국가가 관리해, 개인의 삶을 불필요한 불안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별도의 등록이나 예식을 요구하지 않는 이 법은 2003년 성중립적인 삼보법으로 통합되었다.3 주목할 점은 이 법이 동거 문화가 이미 보편화된 이후에 제정되었다는 사실이다.4 법이 먼저 길을 연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먼저 지나간 길 위에 국가가 뒤늦게 표지판을 세운 격이다.
한국의 상황은 정반대의 순서를 보인다. 세제 혜택, 주택 청약 가점, 건강보험 피부양 자격 — 국가가 제공하는 주요 보호 장치는 여전히 혼인신고라는 좁은 관문을 통과해야만 주어진다.
관문을 통과할 자원은 점차 줄어드는데, 문턱은 그대로다.
현실이 먼저 바뀌었는데 제도가 뒤따르지 못했다. 스웨덴과 정확히 거꾸로 된 시차다.
역사는 모든 사회가 같은 속도로 제도를 고치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 사회가 현실이 법보다 먼저 움직이는 조건에 놓일 때, 그 간극을 얼마나 오래 방치하는가에 따라 다음 세대가 치르는 비용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결혼이 뒤처진 게 아니라 제도가 뒤처졌다
한국은 계약의 형식(혼인신고)을 유지한 채 그 계약을 이행할 자원만 개인에게 넘겨주는 방식을 택했다. 스웨덴은 계약이 제공하는 최소한의 보호 범위를 현실의 변화에 맞춰 넓히는 길을 택했다.
두 사회의 차이는 결혼이라는 제도를 향한 애정의 격차가 아니라, 제도가 현실을 따라잡는 속도의 차이다. 이 문장은 확신을 갖고 쓸 수 있다.
2023년 한국의 혼인 건수는 12년 만에 소폭 반등했다. 다만 이는 팬데믹 기간 미뤄졌던 결혼이 한꺼번에 이뤄진 일시적 현상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1 밀린 숙제를 몰아 낸 것과, 숙제 자체가 다시 쉬워진 것은 다른 이야기로 읽힐 여지가 있다.
다음 세대가 아직 서명하지 않은 조항
서명의 주체는 개인이 되었지만, 계약서에 담긴 조항 — 세금, 주거, 상속, 의료 — 은 여전히 과거의 서식에 머물러 있다.
주거 조항이 특히 그렇다. 신혼부부 특별공급, 청약 가점 우대, 전세자금 대출 한도 — 국가가 마련한 이 제도들은 하나같이 결혼이라는 서명이 먼저 있어야만 작동한다.
결혼을 결심할 자원이 없는 사람에게 결혼을 전제로 한 혜택만 내미는 구조는, 계약서를 손에 쥐어주지 않은 채 서명부터 요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 세대가 결혼을 미루는 것은 계약 자체를 거부해서가 아니라, 제시된 계약서 — 그리고 그 계약서를 전제로만 열리는 문들 — 가 현실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국회에는 동거 관계를 법적으로 보호하는 생활동반자법이 여러 차례 발의되었으나 장기간 계류 중이다. 이 법안의 향방은 이번 세대의 질문에 한국 사회가 어떻게 응답하려 하는지를 보여주는 지표가 될 것이다.
청년 세대는 아직 낡은 계약서의 그 조항에 서명하지 않았을 뿐이다.
* 참고할 말씀: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 전도서 4:9
1. 통계청, 인구총조사·인구동향조사·사회조사
2. 헌법재판소, 2005년 2월 호주제 헌법불합치 결정
3. Cambridge University Press, Registered Partnerships in Sweden (Sambolagen 2003:376)
4. 주스웨덴 일본대사관, 가족법 조사보고서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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