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지막 스위치
착륙장이 아니라 활주로
세계사-핵 시리즈, 여섯 번째 이야기 · 세계사 · 2026.09.18
2026년 11월, 워싱턴과 평양 사이에 다시 회담 일정이 오르내린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중간선거를 앞두고 외교적 성과에 조급함을 드러냈고, 존 볼턴 전 국가안보보좌관은 이번만큼은 싱가포르나 판문점이 아닌 평양 방문이 마지막 형식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보았다.
그런데 이번 회담을 둘러싼 보도에서 반복되는 단어는 따로 있다. ‘비핵화’가 아니라 ‘동결’과 ‘군비통제’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묵인의 문턱에서, 트럼프가 “북핵 57개”를 공개 언급하고도 비핵화라는 단어 자체를 협상 밖으로 치워버린 침묵을 살펴보았다. 그 침묵이 석 달 뒤, 실제 회담 의제로 굳어지려 하고 있다.
협상의 목표가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에서 ‘핵·미사일 생산 동결과 점진적 감축’으로 이동하는 모양새다. 이러한 전환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것은 아니다. 핵의 역사 자체가 이미 한 번 이 길을 걸었던 적이 있다.
없앨 수 없다면, 다스린다
1946년 6월, 미국은 유엔에 ‘바루크 안(Baruch Plan)’을 제출한다. 원자력을 국제기구가 관리하고 모든 핵무기를 단계적으로 폐기하자는 제안이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시점에서, 세계는 진지하게 핵 없는 세상을 협상 테이블에 올렸다.
그러나 소련은 미국이 이미 보유한 핵 우위를 그대로 고착시키려는 시도라며 거부했고, 1948년 협상은 완전히 결렬됐다. 핵이 태어난 지 3년 만에, 인류는 핵을 없애는 데 실패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인한 셈이다.
그 뒤 인류가 선택한 것은 제거가 아니라 관리였다. 1968년 7월 1일 체결된 핵확산금지조약(NPT)은 미국·소련·영국·프랑스·중국 다섯 나라의 핵무기 보유를 사실상 인정하면서, 그 밖의 나라로 확산되는 것만 막는 절충안이었다.
1972년 5월 26일, 미국과 소련은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I)과 탄도탄요격미사일제한조약(ABM Treaty)에 서명했다. 핵무기 폐기 대신 보유 수량과 배치를 상호 검증하며 관리하는 체제를 공식화한 셈이다.1 이상은 폐기였으나, 도달한 지점은 관리였다.
물론 예외는 있다. 리비아는 2003년 협상을 통해 핵 프로그램을 자발적으로 해체했고, 우크라이나·카자흐스탄·벨라루스는 1994년 부다페스트 양해각서로 소련 붕괴 과정에서 물려받은 핵무기를 반납했으며, 남아프리카공화국은 1989년 스스로 핵무기를 폐기했다.3 그러나 이 예외들은 모두 국가 해체기의 특수한 압박이나 비대칭적 안전보장 거래 속에서 일어난 일이다. 완성된 핵 능력을 가진 주권국이 대등한 협상을 통해 자발적으로 완전한 폐기에 이른 사례는, 적어도 이 시리즈가 다뤄온 강대국 간 핵 협상사에서는 아직 없다.
이 시리즈에서 이미 다룬 두 갈래도 같은 구조를 따른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1998년 핵실험 이후 NPT 체제 바깥에서 사실상의 핵보유국 지위를 묵인받았고, 이란은 2015년 JCPOA로 검증과 동결을 맞바꿨다가 2018년 미국의 일방적 탈퇴로 그 틀 자체를 잃었다.2 완전한 제거에서 시작해 관리로 귀결되거나, 관리조차 무너져 원점으로 돌아가거나 — 경로는 갈렸지만 출발점의 이상은 모두 같았다. 없앨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강물과 사자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인간사를 지배하는 힘을 강물의 범람에 비유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운명은 우리 행동의 절반을 지배할 뿐이며, 나머지 절반은 우리 스스로의 지배 아래 있다.” — 「군주론」 25장
마키아벨리가 바라본 지혜란 강물을 아예 없애는 능력이 아니라, 둑을 쌓아 폭주하는 흐름을 다스리는 역량에 가까웠다. 그가 말한 포르투나(Fortuna)는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조건이지만, 비르투(Virtù)는 그 조건 앞에서도 발휘할 수 있는 역량이다. 이미 불어난 강물 앞에서 “원래대로 되돌리겠다”고 선언하는 군주는 포르투나를 부정하는 무능한 군주다. 반대로 제방과 수로를 놓아 흐름을 관리하는 군주는 비르투를 발휘하는 군주다.
완전한 비핵화라는 이상이 20년째 제자리인 지점에서, 동결과 검증이라는 수로를 놓자는 주장이 힘을 얻는 배경도 다르지 않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형체 없는 부드러움이 가장 굳은 것마저 뚫고 들어간다고 말했다.
天下之至柔,馳騁天下之至堅。無有入無間。吾是以知無爲之有益。(천하지지유, 치빙천하지지견, 무유입무간, 오시이지무위지유익) “천하의 지극히 부드러운 것이 천하의 지극히 굳센 것을 부린다. 형체 없는 것은 틈 없는 곳까지 파고든다. 나는 이로써 무위의 유익함을 안다.”
노자에게 무위의 유익함은, 형체 없는 것이 가장 틈 없어 보이는 것 사이로도 파고들어 결국 그것을 다스리는 데 있었다. 완전한 비핵화라는 굳은 원칙도, 동결이라는 형체 불분명한 절충안이 그 틈으로 스며들며 자리를 내주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노자가 말한 파고듦은 스스로 그러한 자연의 이치이지, 강대국의 정교한 셈법으로 짜인 인위적 타협이 아니다. 노자의 물이 스스로 그러하여 틈으로 흐르는 것이라면, 국제정치에서의 동결은 그 흐름을 흉내 낸 인위, 즉 서글픈 무위에 가깝다. 핵을 가진 현실을 인정하는 것과, 그 현실이 초래한 위협과 불균형에 눈감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철학은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이상이 진 자리
1946년의 바루크 안과 2026년의 동결론 사이에는 80년의 시간이 있지만, 구조는 놀라울 만큼 같다. 완전한 제거를 먼저 선언하고, 그 선언이 현실의 벽에 부딪히면, 관리라는 이름의 절충으로 물러선다. NPT와 SALT가 그랬고, 인도·파키스탄에 대한 국제사회의 묵인이 그랬고, 이제 북한을 향한 동결론이 같은 자리에 서 있다.
여기서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는 패턴은 이것이다. 강대국 간 핵 협상사에서 완전한 폐기가 대등한 협상을 통해 이행된 사례는 없다. 있었던 것은 오직 다양한 수준의 관리뿐이다. 이 패턴 앞에서 “이번만은 다를 것”이라는 기대는 매번 배반당해왔다. 문제는 관리로의 전환 자체가 아니라, 그 전환이 누구의 협상력 아래에서 이뤄지는가이다. 1972년 SALT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대등한 두 초강대국 사이의 관리였다. 2026년의 동결론은 이미 완성된 핵 능력을 가진 쪽과, 그 능력을 되돌릴 지렛대를 대부분 상실한 쪽 사이의 관리다. 같은 단어를 쓰지만 같은 협상이 아니다.
그리고 이 비대칭은 협상 당사자 두 나라 안에서만 머물지 않는다. ‘관리’라는 이름의 현상 유지는 협상 테이블에 앉은 강대국에게는 안정이지만, 그 테이블 옆자리에 앉은 나라에게는 구조적 불안정이 된다. 미국과 북한이 동결이라는 균형점에 합의하는 순간, 그 균형이 만들어내는 위험의 대부분은 한반도라는 좁은 공간에 그대로 남는다. 관리는 협상 테이블에 앉은 당사자들의 안정을 위해 설계되지만, 그 비용은 언제나 설계에 참여하지 못한 이웃의 몫으로 남아왔다.
아직 답하지 않은 질문
이 회담이 실제로 열린다면, 그리고 의제에서 비핵화가 조용히 빠진다면, 세계는 또 한 번 이상에서 관리로 넘어가는 순간을 목격하게 된다. 여기서 짧게 짚어야 할 현재가 있다. 국내에서는 독자 핵무장론과 전술핵 재배치 요구가 여야를 가리지 않고 다시 거세지고 있으며, 이는 협상 테이블 밖에 앉은 쪽이 감당해야 할 몫이 무엇인지를 그대로 드러낸다.
참고할 말씀: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 전도서 1:9
세계사-핵 시리즈 전체 보기
- 태양이 두 번 뜬 아침 — 히로시마·나가사키와 핵의 탄생
- 쥔 자와 내려놓은 자
- 사막에서 터진 신호 — 인도·파키스탄 핵실험과 남아시아의 균형
- 풀린 봉인 — 이란 핵합의(JCPOA)의 흥망
- 묵인의 문턱 — 북한 핵무장과 인정의 딜레마
- 마지막 스위치 — 북미 재회담과 비핵화의 재정의 (이번 편)
각주
1. Baruch Plan(1946.6), NPT(1968.7.1 서명), SALT I·ABM Treaty(1972.5.26) — 미국 국무부 및 IAEA 공식 자료 종합
2. 세계사-핵-③(1974~1998), 세계사-핵-④(2015~2018) 본편 참조
3. 리비아 핵포기(2003), 부다페스트 양해각서(1994), 남아공 핵폐기(1989) — 국제원자력기구(IAEA)·미 국무부 비확산 자료 종합
4. 2026년 11월 북미정상회담 추진, 동결·군비통제론 부상, 볼턴 전 보좌관 평양 방문 전망 — 서울신문·파이낸셜뉴스 등 2026.08~09월 보도 종합
© Watchman, 바라보는 자의 기록 (bara.watchmaninsight.com). 무단 전재 및 2차 창작 시 사전 동의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