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린 봉인

쪼개지는 붉은 밀랍 봉인과 6개국 문장, 파괴된 이란 핵합의와 지하 시설의 청백색 빛을 표현한 시네마틱 이미지
붕괴된 2015년 이란 핵합의(JCPOA)와 신뢰의 해체를 상징하는 밀랍 봉인.

풀린 봉인

이란 핵합의, 서명과 파기 사이 10년

세계사-핵 시리즈, 네 번째 이야기
세계사 · 2026.09.11


지하 100미터, 사라진 것은 무엇인가

2025년 6월 21일(미국 현지시각, 이란 기준 22일), 미국은 ‘미드나잇 해머 작전(Operation Midnight Hammer)’을 발동해 이란 포르도(Fordow)·나탄즈(Natanz)·이스파한의 핵시설을 타격했다. 화이트맨 공군기지를 이륙한 B-2 스텔스 폭격기 7대는 37시간의 무착륙 비행 끝에, 산악 지하 80~90미터 깊이에 구축된 포르도 시설에 30,000파운드(약 13.6톤)급 벙커버스터 GBU-57을 투하했다. 이날 포르도에 12발, 나탄즈에 2발 — 총 14발이 떨어졌고, 이스파한은 잠수함발사 토마호크 미사일 30발로 별도 타격했다.1 이스라엘의 ‘일어서는 사자 작전(Operation Rising Lion)’으로 6월 13일 시작된 이란-이스라엘 무력충돌 — 훗날 ’12일 전쟁’으로 불리는 — 이 진행 중이던 아홉째 날, 미국은 이 공습으로 개입했다. 교전은 이틀 뒤인 6월 24일 휴전에 이르렀다. 이란 핵 프로그램을 둘러싼 갈등이 더는 외교의 언어만으로 다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 장면을 2025년만의 사건으로 읽으면 정작 물어야 할 질문을 놓친다. 폭격기가 겨눈 것은 원심분리기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2015년 7월 빈에서 서명되고, 2018년 5월 워싱턴에서 파기된 어느 합의의 잔해이기도 했다.

10년, 봉인이 풀리기까지

2015년 7월 14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이란과 P5+1(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중국·독일)은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CPOA)’에 서명했다.2 이란은 우라늄 농축 농도를 3.67% 이하로, 저농축우라늄 재고를 300kg 이하로 묶고, 아라크 중수로를 무기급 플루토늄 생산이 불가능한 구조로 재설계하며, IAEA에 추가의정서 수준의 사찰 접근권을 부여하기로 했다. 그 대가로 P5+1은 대이란 제재를 단계적으로 해제하기로 했다.3 2016년 1월 16일 ‘이행일(Implementation Day)’이 선포된 뒤 2년 넘게, IAEA는 정기 보고서를 통해 이란의 상한선 준수를 반복적으로 확인했다.4

그러나 2018년 5월 8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미국의 JCPOA 탈퇴를 공식 선언했다. 이란의 위반이 근거가 아니라, 합의 자체의 일몰조항과 범위(탄도미사일·역내 개입 미포함)가 불충분하다는 것이 명시된 이유였다.5 탈퇴 직후 ‘최대 압박(Maximum Pressure)’ 제재가 재부과됐고, 이란은 유럽 서명국들의 잔류 요청에도 2019년 5월부터 60일 간격으로 상한선을 단계적으로 이탈했다. 2021년 농축 농도는 60%까지 치솟았다 — 무기급(90%)에 근접한, 합의가 애초에 막으려 했던 바로 그 수치였다.6 2025년의 공습은 외교로 봉인했던 문이 외교 밖에서 다시 열린 뒤, 폭격으로 강제로 다시 닫힌 결과에 가까웠다.

믿음 없이 선 나라는 없다

공자는 정치의 우선순위를 묻는 제자 자공에게 군대와 식량과 백성의 믿음 중 마지막까지 남겨야 할 것을 답했다.

民無信不立 (민무신불립) — “백성은 믿음이 없으면 [나라가] 설 수 없다.” (『논어』 안연편)

식량도 군대도 내줄 수 있으나 믿음만은 내줄 수 없다는 이 말은, 본래 통치자와 백성 사이의 관계를 겨냥한 것이다. 그런데 이 원리는 국가와 국가 사이의 관계로 확장해 해석해 볼 수 있다. 중앙의 강제력이 없는 국제정치의 무정부 상태에서, 신뢰는 협력을 지탱하는 유일한 접착제가 되는 순간이 있다 — 그 신뢰가 무너지면, 협력을 가능케 했던 제도적 기반 자체가 함께 무너진다. 공자의 말은 2,500년의 시차를 두고 이 통찰과 맞닿아 있다. JCPOA가 무너뜨린 것은 원심분리기의 숫자가 아니라, 다자 합의에 서명한다고 해서 그 서명이 상대국의 다음 정부에서도 유효하리라는 믿음, 바로 그것이었다.

한편 마키아벨리는 『군주론』 18장에서 정반대의 논리를 편다. 신의를 지키는 군주가 칭송받는다는 것은 그도 인정하지만, 그가 실제로 관찰한 역사 속 성공한 군주들은 신의보다 필요를 우선했다고 지적한다. 약속을 맺게 했던 조건이 사라지면, 그 약속을 지킬 이유도 함께 사라진다는 것이다. 신의를 지키는 일이 국익에 불리해지는 순간, 지혜로운 통치자라면 그 약속에 매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시각이다. 2018년 미국이 내세운 탈퇴 논리 — 합의 당시엔 최선이었으나 이제는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 — 는 이 마키아벨리적 셈법과 궤를 같이한다.

철학은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종이 위의 약속, 힘 위의 셈법

공자와 마키아벨리는 정반대의 자리에서 같은 지점을 가리킨다. 다자 합의의 수명은 문서의 문구가 아니라, 그 문서에 서명한 강대국의 국내 정치 지형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이란은 4년 동안 IAEA의 검증을 통과했지만, 그 검증은 합의를 떠받치는 절반의 조건일 뿐이었다. 나머지 절반 — 서명국이 정권 교체 이후에도 서명을 지킬 것이라는 보장 — 은 애초에 어떤 조약문으로도 담보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약자에게는 검증 의무가, 강자에게는 탈퇴의 자유가 주어지는 구조는 공평하지 않다. 그러나 이 비대칭이 도덕적 결함인지, 아니면 국제정치라는 무정부 상태에서 애초에 피할 수 없는 조건인지는 여전히 열려 있는 질문으로 남아 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다 — 한 번 파기된 다자 합의는, 다음 합의의 신뢰 비용을 반드시 끌어올린다.

한반도가 먼저 걸었던 길

앞선 글에서 우리는 사막의 신호탄을 통해 인도와 파키스탄이 서로의 핵을 확인함으로써 얻은 것이 평화가 아니라 유예였음을 살펴보았다. 이란의 이야기는 사실 한반도가 먼저 겪었던 이야기이기도 하다. 1994년 제네바 합의(Agreed Framework)는 미국과 북한 양자 간의 틀이었기에, 애초에 다자적 보장이 없었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취약했다. 그러나 2005년 9·19 공동성명은 6자회담이라는 다자 틀 안에서 “한반도의 검증 가능한 비핵화”에 합의했음에도, 서명 후 채 몇 년을 넘기지 못하고 흔들렸다. 다자적 보장 체제조차 강대국의 정권 교체와 전략적 판단 변화 앞에서는 무력했다는 뜻이다. JCPOA 역시 P5+1이라는, 9·19 공동성명과 형식적으로 가장 가까운 다자 틀이었다. 그런데도 미국 국내 정치 지형이 바뀌자 그 틀은 하루아침에 종잇장이 됐다.

서명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합의가 흔들리는 패턴은, 빈에서도 판문점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된 셈이다. 2025년 이란이 다다른 지점 — 합의는 깨졌고, 시설은 폭격당했으며, 신뢰는 남지 않은 지점 — 은 한반도가 지나온 궤적의 연장선상에 놓인 이정표일지 모른다. 이란의 현재는 한반도가 직면할 수 있는 가혹한 미래의 단면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하 100미터 깊이에 묻힌 것은 원심분리기가 아니었다. 국가와 국가 사이에 서명 하나로 쌓아 올릴 수 있다고 믿었던 신뢰, 그 자체였다. 우리가 아직 답하지 못한 질문은 이것이다. 그 신뢰가 다시 무너지는 자리에, 한반도는 없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는가.

* 참고할 말씀: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 마태복음 5:37


각주
1. 2025년 6월 13~24일 이스라엘-이란 ’12일 전쟁’ 중, 6월 21일(미국시각)/22일(이란시각) 미국의 ‘미드나잇 해머 작전(Operation Midnight Hammer)’ — 포르도·나탄즈·이스파한 공습. B-2 폭격기 7대, GBU-57 14발(포르도 12·나탄즈 2), 잠수함발사 토마호크 30발(이스파한) 사용. 휴전은 이틀 뒤인 6월 24일 성립 (위키백과·국회도서관 국가전략정보포털·외신 보도 종합)
2. 2015년 7월 14일 빈, 이란-P5+1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CPOA)’ 서명 (국제기구·외신 자료 종합)
3. JCPOA 핵심 조항 — 우라늄 농축 농도 3.67%, LEU 재고 300kg, 아라크 중수로 재설계, IAEA 추가의정서 접근권 (국제기구 자료 종합)
4. 2016년 1월 16일 이행일(Implementation Day) 선포 및 IAEA 정기 검증 보고 (IAEA 자료 종합)
5. 2018년 5월 8일 트럼프 대통령의 백악관 JCPOA 탈퇴 선언 및 사유 (백악관 발표·외신 보도 종합)
6. 2019~2021년 이란의 단계적 합의 이탈 및 농축 농도 60% 도달 (국제기구·외신 자료 종합)

© Watchman, 바라보는 자의 기록 (bara.watchmaninsight.com). 무단 전재 및 2차 창작 시 사전 동의 필요.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위로 스크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