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강했던 나라가, 가장 먼저 흔들렸다

384년 백제 궁궐에서 침류왕이 동진의 승려 마라난타를 맞아 불교를 공인하는 역사적 순간
384년 백제 침류왕이 동진의 승려 마라난타를 맞아 국가 최초로 불교를 공인하는 장면

가장 강했던 나라가, 가장 먼저 흔들렸다

375~392년, 근구수왕·침류왕·진사왕이 마주한 정통성의 공백

2026.09.18 · 역사·철학 · 한국사 시리즈

371년 겨울, 백제군은 평양성 아래에서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근초고왕의 백제는 그 순간 한반도 서남부를 아우르는 최대 판도를 확보했고, 그 아들 근구수왕(375~384년 재위)이 물려받은 나라는 역사상 가장 강력한 백제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가장 강했던 나라가, 그 직후 왕위 교체가 가장 빈번했던 나라가 된 것이다.

전성기라는 이름의 예고편

근구수왕이 9년, 그 아들 침류왕이 1년 2개월, 동생 진사왕이 7년. 375년부터 392년까지 열일곱 해 사이 세 명의 왕이 교체됐다. 영토가 가장 넓어진 순간과 왕권이 가장 자주 흔들린 순간이, 같은 세대 안에 포개져 있다.

전성기는 완성의 증거가 아니라, 다음 위기의 예고편이었다.

칼이 둔해질 때, 권력은 신앙을 찾는다

근구수왕은 아버지의 확장을 지키는 데 재위 대부분을 보냈다.1 384년 4월, 근구수왕이 세상을 떠나고 아들 침류왕이 즉위한다. 그런데 침류왕이 왕좌에서 내린 가장 결정적인 선택은 전쟁이 아니라 종교였다. 즉위한 그해 9월, 동진에서 온 승려 마라난타를 궁으로 맞아들여 불교를 공인한 것이다.2 백제 최초의 국가 공인 종교였다.

침류왕은 이듬해인 385년 11월 세상을 떠난다. 재위 1년 2개월. 아들 아신은 아직 어렸다. 왕위는 침류왕의 동생이자 아신의 숙부인 진사왕에게 넘어갔다. 조카를 제쳐두고 숙부가 먼저 왕좌에 오른 셈이다. 『삼국사기』는 이를 담담한 왕위 계승으로 적었지만, 『일본서기』의 정황을 함께 놓고 보면 실권을 쥔 쪽이 명분보다 앞섰던 권력 이동으로 읽힐 여지도 있다.3 진사왕은 7년을 통치하다 392년 사냥터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그제야 아신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7년 만에 왕좌에 오른다.

흥미롭게도 비슷한 시기 지구 반대편에서도 매우 유사한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378년, 로마 제국은 지금의 튀르키예 북서부, 아드리아노플 인근에서 고트족 연합군에게 참패한다. 황제 발렌스 본인이 전사할 정도의 궤멸이었다 — 로마가 건국 이래 겪은 몇 안 되는 최악의 패전 중 하나였다. 제국의 동쪽 국경이 사실상 뚫린 이 위기 속에서 즉위한 새 황제가 테오도시우스 1세다. 그런데 그가 꺼낸 카드는 군사 반격이 아니라 종교였다. 380년 2월, 테살로니카 칙령을 선포해 니케아 신조 기독교를 제국의 공식 종교로 못 박은 것이다.4

이 결정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당시 제국 내부 사정도 함께 봐야 한다. 로마의 기독교는 이미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 그리스도가 신 그 자체인지, 아니면 신에 가깝지만 신보다는 낮은 존재인지 — 이 질문 하나를 두고 니케아파와 아리우스파는 오랫동안 갈라서 있었다. 황제와 주교, 도시 전체가 어느 한쪽 편에 서서 서로를 이단으로 몰던 이 대립은, 겉으로는 종교 논쟁이었지만 실제로는 제국 곳곳의 충성심과 정체성을 갈라놓는 균열이었다. 즉 테오도시우스의 선언은 단순히 이민족의 위협에 맞선 대응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외부의 군사적 위기와 내부의 신앙 분열이 같은 시점에 겹치자, 그는 그 둘을 한 번에 정리할 수 있는 카드 — 하나의 신앙으로 제국을 다시 하나로 묶는 선언 — 를 꺼낸 셈이었다.

백제의 침류왕과 로마의 테오도시우스는 서로의 존재조차 몰랐다. 그러나 두 나라 모두, 왕위나 제위가 흔들릴 조짐이 보이는 바로 그 시점에 종교를 공인했다. 국가가 스스로의 정통성을 의심하기 시작할 때, 권력은 종종 칼이 아니라 신앙을 찾는다.

신앙이 채운 것, 채우지 못한 것

한비자는 권력의 본질을 이렇게 짚었다.

夫民之性,惡勞而樂佚。(부민지성,오로이락일。)
“백성의 본성은 수고로움을 싫어하고 편안함을 즐긴다.”

한비자는 이러한 인간관을 바탕으로 엄격한 법과 형벌에 의한 통치를 결론으로 도출했다. 침류왕이 택한 불교는 이와는 다른 길이었다. 형벌로 복종시키는 대신, 백성이 자발적으로 우러러볼 대상을 세우는 길. 통치의 명분을 세우는 방식은 달라도, 정복한 땅에 아직 없던 정당성을 만들어야 한다는 문제의식만큼은 같았다.

서양에서는 토크빌이 다른 각도에서 같은 문제를 봤다. 그는 옛 질서가 무너질 때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억압이 아니라 불확실성이라고 진단했다. 확실한 권위가 사라진 자리에는 정체성의 공백, 이른바 아노미가 찾아오고, 그 공백은 반드시 무언가로 메워진다 — 새로운 신앙이든, 새로운 이념이든.

철학은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제도라는 이름의 영원성

여기서 패턴은 분명해진다. 정복은 국경을 넓히지만, 정통성을 만들지는 못한다. 근초고왕이 넓힌 땅은 근구수왕과 침류왕에게 힘을 주었지만, 그 힘을 다음 세대까지 정당하게 물려줄 장치까지 함께 주지는 못했다. 그래서 침류왕은 칼 대신 부처를 선택했다. 신앙은 정복지 위에 아직 존재하지 않던 것, 즉 왕이 왕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대신 채워주는 장치였다.

그런데 그 장치는 침류왕 개인의 죽음까지는 막지 못했다. 진사왕이 어린 조카를 제치고 즉위한 385년의 선택은, 국가가 종교적 정당성을 세운 지 겨우 1년 만에 다시 가장 오래된 방식 — 나이와 경험, 실질적 권력 — 으로 후계를 결정했다는 뜻이다. 새로운 정통성의 언어를 만든 나라조차, 정작 급할 때는 그 언어를 쓰지 않았다.

로마도 다르지 않았다. 테오도시우스가 기독교를 국교로 세운 뒤에도 제국의 황위 계승은 여전히 군사력과 파벌 다툼으로 결정됐다. 종교는 정통성의 언어를 제공했지만, 권력이 실제로 넘어가는 방식까지 바꾸지는 못한 것이다. 왕좌와 제위로 대표되는 해 아래의 권력은 빠르게 오갔지만, 그 자리에 세운 제도와 언어는 다음 세대의 시험을 다시 견뎌야 했다.

우리가 세우는 것은 다음 세대까지 갈 수 있는가

375년의 백제와 380년의 로마는 둘 다 “우리는 이제 이런 나라다”라고 선언할 신앙과 제도를 마련했다. 하지만 그 선언이 다음 왕, 다음 황제에게 매끄럽게 이어지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선언과 계승 사이에는 늘 간격이 있었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도 비슷한 질문이 반복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원칙과 새로운 언어가 선포되지만, 그 원칙이 다음 정부, 다음 세대까지 그대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제도는 선포되는 순간이 아니라,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다음 교체의 순간에 진짜 시험대에 오른다. 지도자나 정권의 교체가 빈번한 시대일수록, 우리는 “다음 지도자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앞서 “다음 세대에게도 변함없이 이어질 가치와 제도는 무엇인가”를 먼저 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375년 근구수왕이 물려받은 것은 역사상 가장 넓은 백제였다. 392년 아신왕이 물려받은 것은 열일곱 해 동안 세 번 흔들린 왕좌였다. 그 사이에서 백제는 무엇을 잃고, 무엇을 남겼는가. 앞선 글에서 우리는 그 전성기를 열었던 근초고왕의 조건을 살펴본 바 있다.


앞선 글: 근초고왕 편 — 최강자의 조건


* 참고할 말씀: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 전도서 1:4


1.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구수왕조.

2. 『삼국사기』 백제본기, 침류왕 원년 9월조.

3. 『일본서기』 관련 기록에 나타난 정황. 『삼국사기』와 서술이 갈리는 지점으로, 단정하지 않고 해석의 여지로만 소개함.

4. 테살로니카 칙령(380년 2월 27일), Codex Theodosianus XVI.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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