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위험한 10년

야간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모습
경기도 평택시에 위치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의 야경. 불이 꺼지지 않는 이곳은 한국 반도체 산업의 위상을 보여줍니다.

가장 위험한 10년 — 관세와 반도체 사이, 한국이 선 자리

투키디데스와 한비자로 읽는 반도체 시대의 협상 좌표

세계사-동아 시리즈 ⑥ · 1840~2026 동아시아 패권사 · 2012~2026


문서 한 장과 라인의 시차

평택과 이천의 반도체 라인은 밤에도 멈추지 않는다. 워싱턴이나 베이징에서 규정 하나가 고쳐질 때, 그 소식이 뉴스로 뜨기까지는 몇 시간이 걸리지만, 그 규정이 실제 현장의 공정을 바꾸기까지는 수주일의 시간이 소요되기도 한다. 이 시차 속에서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언제나 뒤늦게, 그러나 가장 직접적으로 결정을 통보받는 위치에 놓이곤 했다.

2025년, 워싱턴은 반도체와 양자, 인공지능 세 분야에 대한 자국민의 대중(對中) 투자를 신고제 혹은 금지 대상으로 못 박았다. 같은 해, 고대역폭 메모리와 관련 장비·소프트웨어까지 수출 통제 범위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2026년 여름, 베이징은 알리바바·바이트댄스 같은 자국 기업의 고성능 AI 모델이 해외로 나가는 길목마저 검토대에 올렸다.

숫자와 품목이 바뀔 때마다 서울의 라인은 미세하게 흔들렸다. 이것은 단순한 무역 마찰이 아니다. 두 강대국이 서로의 미래 기술을 끊어내려는 싸움의 한복판에, 그 기술을 실제로 만들어내는 나라가 서 있는 형국이다.

한국은 이 싸움의 관객이 아니다. 무대 중앙에서, 대사 없이, 매일 선택을 강요받는 배우다.

관세에서 시작해 칩으로, 칩에서 AI로 — 14년의 좁혀오는 원

이 대결의 출발점은 명확하다. 2018년, 워싱턴은 중국산 제품에 고율 관세를 부과하며 무역 전쟁의 문을 열었다. 처음에는 철강과 태양광 패널, 세탁기 같은 품목이 대상이었다. 그러나 싸움은 곧 상품에서 기술로, 기술에서 자본으로 번져나갔다.

2020년, 미국은 외국회사책임법을 제정해 회계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중국 기업의 자국 증시 상장을 제한할 근거를 마련했다. 2021년에는 뉴욕에 상장했던 디디추싱이 중국 당국의 사이버안보 조사 직후 상장을 폐지했다. 자본시장이 이미 국경 안보의 영역으로 편입되고 있었다.

2022년은 주요한 분수령이었다. 미국이 첨단 AI 반도체 및 제조 장비의 대중국 수출 제한을 본격화하는 한편, 양국 회계감독 당국의 합의로 자본시장 갈등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드는 듯했다. 그러나 기술 전선은 오히려 더 넓어졌다. 2024년, 고대역폭 메모리와 그 제조 장비·소프트웨어까지 통제 대상에 포함되었다.

메모리 반도체는 한국이 세계 시장을 사실상 과점하는 분야였다. 규제 하나가 그어질 때마다, 그 선은 워싱턴이나 베이징이 아니라 평택과 이천의 공장 라인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2025년, 통제는 상장 기업을 넘어 비상장 투자, 반도체·양자·AI 전 분야로 확장되었다.

2026년 들어서는 경쟁의 무게중심이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로, AI 모델 자체의 해외 제공을 통제하려는 움직임으로까지 옮겨갔다. 열네 해에 걸쳐, 대결의 전장은 관세 → 자본시장 → 첨단 장비 → 메모리 반도체 → AI 모델로 원을 좁혀왔다.

소프트웨어로까지 통제 전선이 확산된 오늘날, 이 구도는 역사적 맥락에서 결코 생소하지만은 않은 풍경이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의 국력이 스파르타를 위협할 만큼 커지자 두 도시는 그리스 세계의 크고 작은 동맹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경쟁에 돌입했다.

코린토스, 메가라 같은 중소 도시국가들은 어느 편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 두 패권의 확장 압력 속에서 선택을 강요받았다. 힘의 균형이 흔들릴 때, 진짜 전장은 강대국 사이가 아니라 그 사이에 낀 나라들 위에 그려진다.

투키디데스와 한비자, 같은 질문을 다르게 던지다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원인을 이렇게 정리했다. 아테네의 성장이 스파르타에게 두려움을 안겼고, 그 두려움이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2,400여 년 뒤, 이 관찰은 ‘투키디데스 함정’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소환된다.

지금 미국과 중국 사이의 반도체·AI 경쟁을 이 렌즈로 보면, 관세와 수출 통제 역시 패권국이 두려움을 관리하려는 시도로 읽힐 수 있다. 그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함정의 무서움은 두 강대국의 정면충돌에만 있지 않다. 한비자는 권력의 작동 방식을 이렇게 짚었다.

事在四方,要在中央。
(사재사방,요재중앙。)
“일은 사방에서 벌어지지만, 요체는 중앙에 있다.”

본래 이 말은 지방의 실무는 신하들이 나누어 맡되, 그 실무를 움직이는 핵심 권한만은 군주가 놓지 말아야 한다는 통치술이었다. 이 구도를 오늘의 반도체 공급망에 겹쳐 보면, 관세·상장 규제·수출 통제·AI 모델 제한이라는 ‘사방’의 개별 사건들은 각기 다른 뉴스로 보도되지만, 그 요체는 언제나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된다.

누가 다음 기술 주기의 표준을 쥐는가. 그리고 그 질문 앞에서 한국처럼 실제 생산 능력을 가진 나라는, 자신이 원치 않아도 ‘요체’의 자리에 놓이게 된다.

철학은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낀 나라가 아니라, 걸린 나라

여기서 패턴 하나가 선명해진다. 냉전기의 한국은 이념의 경계선 위에 ‘낀 나라’였다. 그러나 2012년 이후의 한국은 성격이 다르다. 실물 생산력을 실제로 쥐고 있기 때문에, 어느 진영도 이 나라를 완전히 밀어낼 수 없다는 것이 다르다. 낀 것이 아니라 걸린 것이다.

밀어내는 것도, 완전히 끌어안는 것도 양쪽 모두에게 손해가 되는 위치. 이 위치는 위험이면서 동시에 협상력이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의 소도시들은 대개 힘이 없어 선택을 강요당했지만, 지금의 한국은 반도체라는 실물 생산력을 쥐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른 협상 카드를 가진다. 문제는 이 카드를 한 번의 선언이 아니라 매 규제 발표마다 새로 계산해야 한다는 데 있다.

2018년의 관세 협상 논리와 2026년의 AI 모델 통제 논리는 다르다. 원리는 반복되지만, 매번 다른 얼굴로 온다.

지금 한국이 겪는 것은 새로운 냉전이 아니라, 냉전의 논리가 산업 공급망이라는 전혀 다른 몸에 옮겨 붙은 현상으로 읽힐 수 있다. 역사는 동일하게 반복되지 않을지 모른다. 다만 구조가 새로운 무대 위에서 되풀이되는 양상을 보일 뿐이다.

우리가 쥔 것이 무엇인지 묻는 일

투키디데스가 목격한 전쟁은 결국 일어났다. 그러나 그의 기록이 남긴 진짜 가치는 전쟁의 결과가 아니라, 전쟁에 이르는 구조를 후대가 알아볼 수 있게 했다는 데 있다. 관세에서 시작해 AI 모델 통제로 번진 이 원의 다음 단계가 무엇일지, 우리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하나는 분명하다. 한국은 이 구조 속에서 완전한 약자도, 완전한 방관자도 아니다. 걸린 나라에게는 걸린 나라만의 질문이 있다. 우리는 이 위치를 위기로만 읽을 것인가, 협상의 자산으로 읽어낼 것인가. 역사는 이 지점에서 질문을 던진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1992년부터 2012년까지, 중국이 G2로 귀환하며 세계 질서의 축이 다시 짜이던 과정을 살펴보았다. (세계사-동아-⑤ 중국의 귀환 — G2 시대의 시작)


참고할 말씀: “지혜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는 나가다가 해를 받느니라” — 잠언 22:3


【세계사-동아시아】 가장 가까운 전쟁터 — 동아시아 패권의 150년

전 6편 미니 시리즈

세계사-동아-① · 1840~1895
문이 열리던 날 — 아편전쟁에서 청일전쟁까지

세계사-동아-② · 1895~1945
일본이라는 질문 — 제국의 팽창과 한반도의 운명

세계사-동아-③ · 1945~1953
분단된 세계의 축소판 — 한반도와 냉전의 교차

세계사-동아-④ · 1953~1992
기적인가 설계인가 — 동아시아 경제 패권의 이동

세계사-동아-⑤ · 1992~2012
중국의 귀환 — G2 시대의 시작

세계사-동아-⑥ · 2012~2026
가장 위험한 10년 — 관세와 반도체 사이, 한국이 선 자리 (이번 편)


¹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미중 반도체 패권 경쟁과 글로벌 공급망 재편」
² 국가전략포털, 「미·중 갈등 하의 한국 반도체 산업의 선택」
³ 뉴스웨이, “‘미중 AI 패권전쟁’ 불붙었다···고래 싸움에 낀 한국의 선택은” (202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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