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도를 그린 자가 세계를 가졌다
토르데시야스 조약 — 교황이 판을 깔고, 두 나라가 선을 옮겼다
2026.08.16 · 바다
선 하나가 나라를 갈랐다
1945년 8월, 누군가는 지도 위에 자를 대고 선을 그었다.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은 회의에 없었다. 위도 38도선. 그 선은 지금도 한반도를 가르고 있다.
그런데 이 장면은 낯설지 않다. 인간이 자신과 무관한 곳에서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는 경험을 반복해왔다는 사실은, 이 선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1494년, 스페인의 한 소도시에서 또 다른 선 하나가 지구를 갈랐다. 그 선을 최종적으로 그은 것은 종교가 아니라 외교였다.
바다를 놓고 다투던 두 나라가, 세계를 반으로 나누기로 한 순간이 있었다.
1494년 6월, 두 나라가 옮겨 그은 선
앞선 글에서 우리는 바스쿠 다 가마가 인도 항로를 개척하며 포르투갈에 향신료 무역의 문을 열어준 과정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보다 앞선 1493년,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이미 더 근본적인 문제와 마주하고 있었다. 콜럼버스가 “인도”라 믿었던 땅을 발견한 지 불과 1년, 두 나라는 서로가 발견할 모든 땅을 두고 충돌 직전이었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1493년 칙서(Inter Caetera)를 통해 카보베르데 제도 서쪽 100리그 지점에 경계선을 제안했다. 이 선은 포르투갈에 불리했다. 판을 깔아준 것은 교황이었지만, 정작 선을 다시 그은 것은 신학이 아니라 양국의 협상력이었다.
포르투갈은 강하게 반발했고, 1494년 6월 7일 스페인 토르데시야스에서 양국 외교관들은 교황을 배제한 채 직접 담판을 벌여 선을 서쪽으로 370리그 더 옮겼다. 이 선의 서쪽은 스페인, 동쪽은 포르투갈의 몫이었다.
이 재조정 덕분인지, 1500년 4월 포르투갈 항해사 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이 예정에 없던 항로 이탈 끝에 브라질 해안에 도달했을 때, 그 땅은 자동으로 포르투갈 영역에 들어와 있었다. 6년 전 협상 테이블 위에서 옮겨진 좌표 하나가 우연이었는지 의도였는지는 지금도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이어지는 대목이다. 다만 오늘날 남미 대륙에서 유일하게 포르투갈어를 쓰는 나라가 브라질이라는 사실은, 그 선이 남긴 결과만큼은 분명히 말해준다.
세계는 아직 다 발견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미 종이 위에서 두 조각으로 나뉘어 있었다.
선을 긋는 자의 권력
한비자는 권력의 본질을 이름과 정의를 독점하는 것에서 찾았다.
명실상부(名實相符) — “이름과 실제가 일치해야 한다”
이 원칙은, 뒤집어 보면 이름을 붙이는 자가 실제를 규정하는 자라는 뜻이기도 하다. 1494년, 아직 가보지도 않은 땅에 이름과 소유주가 먼저 부여되었다. 존재하지 않는 곳에 권력의 언어가 먼저 도착한 셈이다.
서양에서는 토마스 홉스가 비슷한 통찰에 도달한다. 자연 상태에서는 만인이 만인에 대해 늑대이며, 그 혼란을 끝내는 것은 정의가 아니라 힘을 가진 자의 결정이라고 그는 보았다. 토르데시야스의 선은 정의의 산물이 아니었다. 두 왕국이 각자의 함대와 협상력을 앞세워 도달한 타협의 산물이었을 뿐이다.
철학은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이 힘의 논리는 훗날 더 정교한 언어를 얻는다. 서구 열강은 원주민이 살고 있는 땅을 법적으로 ‘주인 없는 땅’으로 규정하는 논리를 점차 발전시켰고, 이는 수 세기가 지난 뒤 ‘발견의 교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1494년의 협상가들이 이 개념을 알았을 리는 없다.
그러나 이들이 남긴 전례, 즉 주민의 동의 없이 주인부터 정하던 방식은 후대 서구 열강이 반복해서 변용할 하나의 원형을 제공한 것으로 풀이된다.
교황의 권위는 신학적이었지만, 그 선을 지킨 것은 신앙이 아니라 함대였다. 힘이 없는 선언은 지도 위의 낙서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 조약은 조용히 증명하고 있었다.
둥근 세계에서 다시 부딪히다
토르데시야스의 선에는 처음부터 맹점이 있었다. 지구는 평평하지 않다. 대서양 한쪽 면에 그은 선은, 지구를 한 바퀴 돌아 반대편 태평양에서 다시 두 나라를 마주치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향신료의 원산지인 몰루카 제도를 두고 양국은 재차 충돌했고, 1529년 사라고사 조약으로 태평양에도 같은 방식의 선을 그어야 했다. 평면 지도 위에서는 완결되어 보이던 협상이 둥근 지구 앞에서는 미완성이었음이 밝혀진 셈이다. 선을 그은 전제 자체가 흔들릴 때, 아무리 정교한 경계라도 다시 지워지거나 수정될 운명에 처하기 쉽다.
이 패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세기 베를린 회의에서 유럽 열강은 아프리카 지도 위에 자를 대고 국경을 나눴다. 부족과 언어, 강과 산맥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그리고 1945년, 한반도 위에도 비슷한 방식의 선이 그어졌다.
땅을 나누는 결정에서, 정작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가장 마지막에 등장하거나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아프리카 대륙의 국경 분쟁 상당수가 식민지 시대의 인위적 경계선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이러한 결정이 남기는 대가가 즉시 드러나지 않고 세대를 건너 지불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역사는 이 지점에서 질문을 던진다. 선을 긋는 자와 그 선 안에서 살아야 하는 자가 다를 때, 그 선은 얼마나 오래 정당성을 유지할 수 있는가. 토르데시야스의 선은 결국 지켜지지 않았다. 다른 유럽 국가들이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17세기 이후에는 사실상 무효화되었다. 힘으로 그은 선은, 더 큰 힘 앞에서 다시 지워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우리가 아직 묻지 않은 질문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는 협상 테이블 위에서 선이 그어지고 있다. 해양 경계와 배타적경제수역, 관세선 — 형태는 달라졌지만 논리는 낯설지 않다. 결정하는 자와 그 결정 안에서 사는 자가 분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1494년과 오늘은 그리 멀지 않다.
고대의 한 공동체는 이웃의 경계표를 함부로 옮기는 행위를 금기로 여겼다. 삶의 터전에 대한 존중에서 비롯된 금기였다. 이와 달리 1494년의 선은, 정작 그 땅을 밟아본 적도 없는 이들이 종이 위에서 옮겨 그린 선에 가까웠다.
참고할 말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에서 조상이 정한 네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지 말지니라’ — 신명기 19:14
© Watchman, 바라보는 자의 기록 (bara.watchmaninsight.com). 무단 전재 및 2차 창작 시 사전 동의 필요.
📢 새 글 알림 받기
💬 카카오톡 채널 추가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