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이라는 질문 — 제국의 팽창과 한반도의 운명
세계사-동아시아 시리즈 ② · 1895~1945
세계사 · 동아시아·패권 트랙
다시, 힘의 문법으로
2026년 현재, 도쿄는 방위비를 국내총생산 대비 2%대로 끌어올리며 전후 최대 수준의 군비 확장을 이어가고 있다.
반격 능력 보유를 공식화했고, 워싱턴·서울과의 삼각 안보 협력은 이제 일상적인 풍경이 되었다.
표면적으로는 중국의 부상에 대응하는 방어적 조치라는 명분을 내세운다.
그러나 이 장면은 낯설지 않다.
130년 전, 같은 열도에서 같은 문법이 시작되었다 — 처음에는 방어였고, 끝에는 제국이었다.
일본이 언제 팽창의 논리를 선택했는가라는 질문은 사실 일본만의 질문이 아니다.
그것은 힘이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방식에 대한 질문이며, 오늘의 동아시아가 다시 마주한 질문이기도 하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아편전쟁에서 청일전쟁까지, 동아시아의 문이 서구 앞에서 강제로 열리던 순간을 살펴보았다(바라보는 자의 기록, “문이 열리던 날”).
그 문이 열린 뒤, 가장 먼저 그 틈으로 들어간 것은 서구가 아니라 일본이었다.
제국이 걸어온 오십 년
1885년 3월, 후쿠자와 유키치는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와 궤를 같이한다”는 탈아론(脫亞論)을 발표했다.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이 논리는 곧 팽창을 정당화하는 언어가 되었다.
1890년 12월, 총리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제국의회 연설에서 주권선(主權線)과 이익선(利益線)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 국가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서는 인접한 이익선, 즉 한반도까지 영향권에 두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방어를 명분으로 시작된 이 구도는 이후 반세기 동안 팽창의 문법을 결정지었다.
1895년 4월,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청일전쟁이 끝났다.
청은 대만을 할양하고 조선의 독립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 “독립”은 조선이 스스로 선 것이 아니라, 청의 종주권이 사라진 자리에 일본의 영향력이 대신 들어설 공간이 마련되었다는 뜻에 가까웠다(1895년 10월, 을미사변).
1904년 2월부터 1905년 9월까지 이어진 러일전쟁에서 일본은 승리하며 서구 열강을 상대로 승리한 최초의 비서구 국가가 되었다.
같은 해 11월,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했다.
1910년 8월, 한일병합으로 국권 자체가 사라졌다.
저항은 있었다.
1919년 3월, 전국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났으나 무력으로 진압되었다.
그러나 진압은 저항이 끝났다는 뜻이 아니었다.
같은 해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이후 만주와 중원에서의 무장투쟁이 이어지며 제국의 정당성에 균열을 냈다는 사실은, 한반도가 그저 힘들이 지나가는 교차로만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1914년 8월,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에 연합국으로 참전했고, 승전국의 지위로 대륙 진출의 기반을 더욱 굳혔다.
그러나 1929년 10월 시작된 대공황은 일본 경제를 파국으로 몰았고, 정당정치는 급속히 신뢰를 잃었다.
1932년 5월, 해군 청년 장교들이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를 암살한 5·15사건이 일어났다.
이로써 정당 출신 총리가 이끄는 내각 시대는 사실상 막을 내렸다.
1936년 2월, 육군 청년 장교들이 주요 대신들을 암살하고 도쿄 중심부를 사흘간 점거한 2·26사건이 뒤따랐다.
쿠데타 자체는 진압되었으나, 그 이후 군부는 오히려 정치적 발언권을 더 강화하는 역설적 결과를 낳았다.
통제력을 잃은 것은 군부가 아니라, 군부를 통제해야 할 정치였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으로 일본은 대륙 팽창의 다음 단계로 들어섰다.
1937년 7월에는 중일전쟁이 전면화되었다.
1940년 9월, 일본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북부에 진주했고, 1941년 7월에는 남부까지 진출했다.
미국은 이에 대응해 1941년 8월 대일 석유 수출을 전면 금지했다.
당시 일본은 석유의 대부분을 미국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고, 이 금수 조치는 자원 없이는 전쟁도 제국도 지속할 수 없다는 현실을 곧바로 드러냈다.
협상이냐 개전이냐를 두고 이어진 몇 달의 교섭은 끝내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1941년 12월, 일본은 진주만을 공격하며 태평양전쟁을 열었다.
확장은 가속했지만, 그 가속 자체가 이미 붕괴의 조건을 만들고 있었다고 읽힐 수 있다.
1945년 8월, 일본은 항복했다.
반세기 만에, 방어에서 시작된 논리는 파국으로 끝났다.
패권을 정당화하는 두 개의 언어
力多則人朝,力寡則朝於人。
(역다즉인조,역과즉조어인。)
“힘이 넘치면 남이 조공을 바치러 오고, 힘이 모자라면 내가 남에게 조공을 바치러 간다”
국제관계를 도덕이 아니라 힘의 크기로 설명하는 이 냉정한 문장은, 메이지 일본이 실제로 걸었던 길과 놀랍도록 겹친다 — 부국강병이라는 구호 아래, 먼저 내부를 정비하고 그 힘을 밖으로 투사했다.
헤겔은 역사를 이성이 자기 자신을 실현해가는 과정으로 보았다.
그는 특정 시대에 등장하는 “세계사적 개인”이, 나아가 때로는 하나의 “세계사적 민족” 전체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역사의 이성을 실현하는 도구로 작용한다고 보았다.
그는 이 과정을 “이성의 간교”라 불렀다 — 이성은 스스로 나서지 않고, 인간의 정념과 야심을 통해 자신의 목적을 관철시킨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메이지의 지도자들과 국가 자체가 스스로를 동아시아 문명화의 사명을 짊어진 주체로 여겼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정복자는 좀처럼 자신을 정복자로 인식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질서를 가져오는 자로 인식한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한비자의 냉정한 통치술과 헤겔의 거대한 역사철학은 방향이 다르지만, 결국 같은 질문 앞에 선다.
힘은 스스로를 정당화할 언어를 반드시 필요로 하는가.
반복되는 질문, 달라지는 답
메이지 일본의 팽창은 방어 논리로 시작해 제국의 논리로 끝났다는 점에서, 힘의 확장이 스스로 멈추는 지점을 갖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주권선을 지키기 위해 이익선이 필요했고, 그 이익선을 수호한다는 명목으로 다시 대륙이 필요했다.
내부 정비 — 한비자가 말한 “다스려야 할 자신” — 가 완성되는 순간, 그 힘은 반드시 밖으로 향할 출구를 찾았다.
그리고 그 출구를 찾을 때마다, 그 국가는 자신을 침략자가 아니라 질서의 수호자로 서사화했다(헤겔적 세계사적 민족의 자기 인식).
이 패턴은 투키디데스가 2,400년 전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설명하며 남긴 통찰과도 이어진다 — 새로 부상하는 힘에 대한 기존 질서의 공포가 충돌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1895년에서 1945년 사이의 동아시아가 보여주는 것은 조금 다른 층위의 패턴이다.
부상하는 힘이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서사를 만드는 순간, 그 힘은 이미 멈추기 어려운 궤도에 올라섰다고 읽힐 수 있다.
오늘날 동아시아에서 방위비 증액과 반격 능력이 “방어”라는 이름으로 논의될 때, 우리는 그 이름이 백 년 전에도 같은 자리에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아직 답하지 못한 질문
청의 종주권이 사라지고, 러시아와 일본이 다투었으며, 끝내 일본 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했던 자리.
한반도는 언제나 거대한 힘들이 충돌하는 교차로 위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그 교차로 위에서도 임시정부와 무장투쟁, 근대적 주체로서의 자각은 끊임없이 제국의 정당성에 균열을 냈다.
1945년 8월의 해방이 곧 그 교차로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뜻은 아니었다.
다음 편에서 우리는 그 해방이 어떻게 분단으로, 그리고 냉전의 최전선으로 이어지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세계적 수준의 방위산업 전력을 갖추었고, 거대 강대국들과 안보 협의체 테이블에 앉아 이른바 ‘핵심 플레이어’를 자임한다.
이것은 분명 외형적으로는 경이로운 진전이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정직해져야 한다.
힘의 문법 자체가 바뀐 것인가, 아니면 한국이 그 위태로운 문법 안에서 체급을 키워 다른 의자에 앉았을 뿐인가.
오늘날 우리의 외교·안보·국방은 스스로 판을 짜는 주도적 전략을 쥐고 있는가, 아니면 미·중·일의 전략적 셈법에 맞춰 자국 전력을 바치는 ‘우수한 하위 동맹국’의 역할에 만족하고 있는가.
방위산업의 수주 잔고와 군사력 순위에 도취되어, 우리가 서 있는 땅이 여전히 강대국들의 충돌이 예약된 ‘교차로’라는 본질을 잊어버린 것은 아닌지, 그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바라보는 자의 기록이 묻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 우리는 사건을 사건으로만 읽지 않는다. 패턴으로 읽는다.
그리고 패턴을 깨닫지 못한 채 체급만 키운 자에게 남는 것은, 자만이 불러올 또 다른 파국일 수 있다.
더불어 되물어야 한다 — 일본의 패권 성장을 밑에서 떠받쳤던 한반도의 국방·외교·안보·경제는, 지금 정말로 견고한가.
* 참고할 말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 잠언 16:18
각주
1. 후쿠자와 유키치 탈아론(1885년 3월, 지지신보 사설) 및 야마가타 아리토모 주권선·이익선론(1890년 12월, 제국의회 시정방침연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 시모노세키 조약·을미사변·러일전쟁·을사조약·한일병합의 경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립중앙도서관 근현대사 아카이브
3. 5·15사건(1932년 5월)·2·26사건(1936년 2월)의 경과: 국립중앙도서관 근현대사 아카이브
4.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1940년 9월, 1941년 7월)·미국의 대일 석유 금수 조치(1941년 8월)·진주만 공격(1941년 12월)의 경과: 국립중앙도서관 근현대사 아카이브
5. 헤겔의 세계사적 개인·세계사적 민족·이성의 간교 개념: 『역사철학강의』 논의 요약
6. 한비자 인용문: 『한비자』 오두(五蠹)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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