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된 세계의 축소판

비무장지대(DMZ)의 철조망과 남북한 감시초소(GP)가 대치하고 있는 한반도 군사분계선 풍경
1953년 정전협정 이후 70여 년간 지워지지 않은 채 남아 있는 한반도 비무장지대(DMZ)의 철조망과 경계선.

분단된 세계의 축소판 — 한반도와 냉전의 교차

세계사-동아시아 ③ | 1945~1953

세계사 · 2026.08.09


정전선이라는 이름의 국경

2026년 여름, 우크라이나 전쟁의 정전 협상 소식이 다시 국제면 상단을 채우고 있다. 협상 테이블 위에 오르내리는 단어는 매번 같다. “현재의 전선을 기준으로 한다.” 언뜻 임시방편처럼 들리는 이 문장이 실제로는 얼마나 오래, 얼마나 단단하게 굳어질 수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1953년 7월, 판문점에서 서명된 정전협정도 처음에는 그렇게 소개되었다. 전쟁을 잠시 멈추기 위한 군사분계선, 협상이 재개될 때까지의 임시선.

그 선은 73년이 지난 지금까지 지구상에서 가장 중무장된 경계로 남아 있다. 임시로 그어진 선이 영구적인 것으로 굳어지는 이 패턴은 우연이 아니다. 강대국의 힘이 정면으로 충돌한 자리에는 언제나 비슷한 방식으로 선이 그어졌고, 그 선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한반도의 분단은 한국인의 실패가 만든 결과로 흔히 읽힌다. 그러나 조금 멀리서 보면 다른 그림이 보인다. 이것은 1945년부터 1953년 사이, 세계 질서 자체가 재편되던 짧고 격렬한 시간의 한 단면이었다.

얄타에서 판문점까지

앞선 글에서 우리는 1895년 청일전쟁 이후 일본이 제국으로 팽창하며 한반도를 식민지로 편입시킨 과정을 살펴보았다(일본이라는 질문 — 제국의 팽창과 한반도의 운명). 그 제국이 1945년 8월 무너지면서, 한반도는 또 한 번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 채 새로운 질서 속으로 편입되었다.

한반도의 독립이 국제사회에서 처음 언급된 것은 그보다 앞선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에서였다. 미·영·중 3국 정상은 “적절한 절차를 거쳐(in due course)” 한국을 독립시킨다고 선언했다. 문제는 이 “적절한 절차”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누구도 명시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 모호함은 2년 뒤 신탁통치안으로, 다시 3년 뒤 분단으로 구체화되었다.1

1945년 2월 얄타에서 루스벨트·처칠·스탈린은 전후 세계의 밑그림을 그렸다. 같은 해 7~8월 포츠담 회담은 독일을 4개 점령지구로 나누는 결정을 내렸고, 이는 이후 유럽 분단의 골격이 되었다.2 한반도의 38선은 이보다 훨씬 급조된 것이었다.

소련은 8월 9일 대일 선전포고 직후 만주와 한반도 북부로 신속히 진격했다. 8월 15일 일본이 항복 선언을 하기 전 이미 웅기·나진 일대까지 도달한 상태였다. 반면 미군은 가장 가까운 부대조차 오키나와에 머물러 있어 한반도 진입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소련군이 한반도 전역을 점령할 가능성이 커지자, 미 국무부·전쟁부·해군부 조정위원회는 8월 10~11일 밤 서둘러 분할선을 설정했다. 실무를 맡은 두 대령, 딘 러스크와 찰스 본스틸은 내셔널지오그래픽 지도를 펼쳐 놓고 30분 만에 38도선을 그었다.3 미국의 목적은 분명했다. 소련의 전역 점령을 막고, 최소한의 점령 지분을 확보하는 것. 강대국의 계산이 얼마나 즉흥적이면서도 냉혹할 수 있는지를 이보다 잘 보여주는 장면은 드물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는 한반도에 최대 5년간의 신탁통치를 거쳐 통일 정부를 수립한다는 방안에 합의했다. 이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자 신탁통치 찬반을 둘러싼 격렬한 정치적 갈등, 이른바 ‘탁치·반탁’ 대립이 폭발했다. 원래 미국이 장기 신탁통치에 더 적극적이었고 소련은 상대적으로 조기 정부 수립을 주장했다는 사실이, 국내에는 정반대로 전해졌다는 해석도 있다. 진위 여부는 여전히 역사학계에서 논쟁적이지만, 외세의 결정이 국내 정치를 어떻게 뒤흔들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는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4

이후 두 차례의 미소공동위원회가 협상 방식을 둘러싼 이견으로 모두 결렬되자, 한반도 문제는 1947년 UN 총회로 이관되었다. UN은 남북한 총선거 감시를 위해 UN 한국임시위원단(UNTCOK)을 파견하려 했지만, 소련은 위원단의 북한 지역 입경을 거부했다. 결국 UN 총회는 “위원단이 접근 가능한 지역”, 즉 남한에서만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결정을 내렸고, 이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남한 단독 총선거가 치러졌다. 같은 해 8월 대한민국 정부가,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각각 수립되면서 임시 분할선은 두 개의 국가를 가르는 경계로 굳어졌다.5

같은 시기 유럽에서도 같은 문법이 작동하고 있었다. 1948년 6월부터 1949년 5월까지 이어진 베를린 봉쇄는 서방과 소련의 직접 충돌 직전까지 갔던 사건이었고, 1949년 4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창설은 서방 진영의 군사적 결속을 공식화했다.6 한반도와 독일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둘 다 전후 강대국 질서가 자신들의 세력권을 확정하는 과정에서 두 조각으로 갈라진 접점이라는 점에서 같은 구조를 공유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남침하면서 냉전은 처음으로 ‘뜨거운 전쟁’이 되었다. 당시 소련이 중국 대표권 문제에 항의해 UN 안전보장이사회를 보이콧하고 있던 사이, 이사회는 거부권 행사 없이 무력 침공 격퇴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미국을 비롯한 16개국이 사상 최초로 UN 깃발을 내걸고 다국적군을 결성해 참전했다. 같은 해 10월 중국인민지원군이 참전하며 전선은 한반도 전체를 오르내렸고,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7 이때 실제 군사분계선은 원래의 38도선(위도를 따라 그어진 직선)과 달리, 3년간의 실제 전선을 그대로 반영해 서쪽은 38선보다 남쪽으로, 동쪽은 38선보다 북쪽으로 휘어진 곡선이 되었다. 선을 그은 방식 자체가, 이번에는 지도 위의 계산이 아니라 전쟁의 결과였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정전협정에는 결정적인 공백이 하나 있다. 서명자는 UN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 세 사람이었다. 정작 3년간 가장 많은 피를 흘린 당사자인 대한민국의 이승만 정부는 정전에 반대하며 이 협정에 서명하지 않았다. 한반도를 둘로 가른 이 선은, 한반도 당사자의 서명 없이 확정되었다.

리바이어던과 손자, 같은 질문을 던지다

토머스 홉스는 『리바이어던』에서 공통 권력이 부재한 상태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 불렀다.

홉스가 말한 자연상태는 개인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사고실험이었지만, 국가 간 관계, 특히 강대국이 서로를 견제하는 국제 체제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 이후 국제정치학의 오랜 전제가 되었다. 1945년 이후의 세계질서 재편은 정확히 이 자연상태에서 두 개의 리바이어던, 즉 미국과 소련이 서로의 세력권을 확정하려는 과정으로 읽힐 수 있다. 한반도는 두 리바이어던이 처음으로 정면 충돌한 접점이었다.

知彼知己,百戰不殆 (지피지기, 백전불태) —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손자병법의 이 구절은 흔히 전략의 격언으로 인용되지만, 그 이면에는 더 근본적인 통찰이 있다. 전쟁의 승패보다 앞서는 것은 상대와 나의 힘의 경계를 정확히 파악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1945~1953년의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 모두가 서로의 한계선을 시험하는 무대였다. 38선은 그 시험이 만든 최초의 잠정적 답이었고, 6·25전쟁은 그 답을 무력으로 재확인하는 과정이었다고 읽힐 수 있다.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리바이어던이 구축한 힘의 균형점이 곧 38선과 군사분계선이었으며, 그 선 위에서 한반도의 주체적 의지는 리바이어던의 그림자에 가려졌다고도 말할 수 있다.

철학은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선은 왜 그어진 자리에서 굳어지는가

강대국의 힘이 팽팽하게 맞서는 지점에서 그어진 선은, 어느 한쪽이 압도적으로 승리하지 않는 한 지워지지 않는다. 이것이 1945~1953년의 한반도가 세계사에 남긴 가장 냉정한 패턴이다. 독일의 분단선은 1990년 소련의 붕괴와 함께 지워졌다. 베트남의 분단선은 1975년 한쪽의 군사적 승리로 지워졌다. 그러나 한반도의 정전선은 어느 쪽도 결정적으로 승리하지 못한 채 힘의 균형점에서 그어졌기 때문에, 그 균형이 근본적으로 흔들리지 않는 한 사라지지 않는다.

이 패턴은 도덕적 평가의 문제가 아니다. 홉스의 자연상태에서 힘의 균형이 곧 질서의 조건이듯, 정전선의 지속 역시 도덕적 정당성이 아니라 힘의 균형이 유지되고 있다는 신호로 읽힐 수 있다. 사상 최초로 이뤄진 16개국 UN군의 다국적 개입 역시, 결국 이 세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세계사적 기제였던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지금 협상 테이블에 오르는 우크라이나의 정전선도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그 선이 임시로 남을지, 73년 뒤에도 지도 위에 그대로 남을지는 결국 그 선을 만든 힘의 균형이 얼마나 오래 유지되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아직 지워지지 않은 선 앞에서

한반도의 분단은 1945년 8월 10일 밤, 지도 한 장을 펼쳐 놓고 30분 만에 그어진 즉흥적인 결정에서 시작되었지만, 그것을 지금까지 지탱해 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것은 냉전이라는 세계사적 힘의 구조였고, 그 구조가 여전히 형태를 바꾸어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판문점의 철조망이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는 것으로 증명된다.

다음 편에서 다룰 1953년 이후의 한반도는 폐허 위에서 전혀 다른 두 개의 체제가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남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이 있다. 딘 러스크와 찰스 본스틸이 지도 위에 그은 그 선, 그리고 8년 뒤 마크 클라크와 김일성과 펑더화이가 서명한 그 선은 과연 누구의 선이었는가. 그 선을 가장 오래, 가장 고통스럽게 견뎌내야 했던 당사자의 이름은 정작 서명란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선은 과연 한국인의 선이었을까, 아니면 세계사가 한반도 위에 잠시 내려놓은 힘의 흔적이었을까. 바라보는 자의 기록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서두르지 않는다. 다만 그 선이 아직 지워지지 않았다는 사실만은, 멀리서 보아야 비로소 선명해진다.


* 참고할 말씀: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 시편 137:1


1. 카이로 선언(1943.11)의 한국 독립 조항 및 “in due course” 표현은 선언 원문 및 미 국무부 역사국 공개 문서를 참고했다.

2. 얄타·포츠담 회담 관련 결정 내용은 미 국무부 역사국(Office of the Historian) 공개 문서 및 회담 의사록을 참고했다.

3. 38선 획정 경위(소련군의 웅기·나진 진입 시점, 딘 러스크·찰스 본스틸의 획정 과정)는 러스크 회고록 및 냉전 초기사 연구 문헌에서 반복적으로 인용되는 사실이다.

4.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1945.12) 신탁통치 합의 및 탁치·반탁 갈등,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경위는 국내 근현대사 연구서 및 국사편찬위원회 자료를 참고했다. 국내 보도의 왜곡 여부에 대해서는 학계 내 이견이 있어 단정적으로 서술하지 않았다.

5. UN 한국임시위원단(UNTCOK) 파견 및 1948년 5·10 총선거 경위는 UN 총회 결의 및 국내 근현대사 연구 자료를 참고했다.

6. 베를린 봉쇄(1948.6~1949.5), NATO 창설(1949.4) 등 유럽 냉전사 사실관계는 일반 세계사 서술 및 관련 국제기구 공식 연혁을 참고했다.

7. 6·25전쟁 발발(1950.6.25)·UN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및 16개국 UN군 참전·중공군 참전(1950.10)·정전협정 체결(1953.7.27) 및 서명 주체(마크 클라크·김일성·펑더화이, 대한민국 정부 미서명)는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공식 연표 및 정전협정 원문을 기준으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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