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판 위의 한성 – 최강자의 조건이 사라진 해

불타는 한성백제 궁궐 성벽 위 버려진 바둑판과 왕좌, 개로왕과 475년 한성 함락 일러스트
475년 한성 함락의 비극을 상징하는 버려진 바둑판과 붉은 화염에 휩싸인 백제의 도읍.

바둑판 위의 한성 — 개로왕과 475년, 최강자의 조건이 사라진 해

백제 소시리즈 ⑤ · 동맹을 믿고 성을 쌓던 왕의 마지막 20년

2026.09.23 · 역사·철학 (한국사 시리즈)


455년 6월, 반달족의 왕 가이세리크가 로마를 약탈했다. 약 2주 동안 영원의 도시는 속속들이 털렸다. 그해 9월, 한강 하류에서는 백제의 제21대 왕 개로왕이 즉위했다. 로마 시민은 백제를 몰랐고, 한성의 조정은 로마라는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두 나라 사이에 직접 교류한 흔적은 없다.

그러나 20년 뒤의 장면은 기묘하게 겹친다. 475년 9월, 고구려 장수왕의 군대가 한성을 무너뜨리고 개로왕의 목숨을 거두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476년 9월, 게르만 출신 용병대장 오도아케르가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를 폐위했다. 서로 알지 못하던 두 나라가 1년 간격으로 도시와 왕관을 내려놓았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433년 나제동맹의 결성을 살펴보았다(아신왕~비유왕 — 나제동맹 결성 편 보기). 고구려의 압박 속에서 백제가 신라와 손을 잡고 생존하는 법을 배운 이야기였다. 이번 글은 그 동맹의 한계가 드러나는 마지막 장이다. 근초고왕이 세운 ‘최강자의 조건’이 한 세기 만에 하나씩 사라지는 과정을, 개로왕 한 사람의 마지막 20년으로 따라가 본다.

바둑판 위의 첩자, 비어 가는 창고

고구려의 남진은 하루아침의 일이 아니었다. 396년 광개토대왕이 백제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냈다고 비문은 전한다.1 427년에는 장수왕이 도읍을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겼다. 고구려의 무게중심이 남쪽으로 내려왔다는 선언이었다.

433년의 나제동맹은 그 압박에 대한 백제의 답이었고, 20여 년 동안 실제로 작동했다. 개로왕은 그 동맹의 우산 아래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우산만 믿는 왕은 아니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469년 8월 그는 고구려의 남쪽 변경에 군대를 보냈고, 그해 10월에는 쌍현성을 수리하고 청목령에 큰 목책을 세웠으며 북한산성의 군사를 나누어 지키게 했다.2 위기를 몰랐던 왕이 아니라, 위기를 정면으로 마주한 왕이었다.

안으로도 그는 일찍 움직였다. 즉위 4년째인 458년, 개로왕은 송에 표문을 올려 신하 11명에게 장군호와 관작을 내려 달라고 청했다. 그 가운데 8명이 왕족인 부여씨였고, 앞서 왕비를 내던 유력 귀족 해씨와 진씨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3 왕족을 앞세워 귀족의 힘을 누르고 집권 체제를 다지려 했다고 읽을 수 있다. 위기의 시대에 왕권을 세우는 일은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다만 그만큼 조정 안에서 왕에게 다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리가 좁아졌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472년에는 외교로 판을 흔들려 했다. 개로왕은 북위에 국서를 보내 고구려와 백제가 같은 부여에서 갈라져 나왔음을 앞세우고, 고구려의 횡포를 호소하며 함께 고구려를 칠 것을 청했다.4 협공이 필요한 이유와 성공할 가능성까지 따진, 공을 들인 문서였다. 그러나 북위는 남쪽의 송과 대치하는 한편 요동까지 세력을 뻗는 고구려를 적으로 돌릴 처지가 아니었다. 개로왕이 외교에 어두웠던 것이 아니라, 북위에게 고구려는 백제와 맞바꿀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고 읽을 수 있다. 북위는 움직이지 않았고, 삼국사기는 왕이 이를 원망해 이후 사신 왕래를 끊었다고 전한다. 밖에서 구원을 끌어오려던 카드가 이렇게 접혔다.

이 시기의 이야기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승려 도림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은 이렇다.5 장수왕은 백제를 도모할 첩자를 구했다. 이때 도림이 자원했다. 그는 죄를 짓고 쫓겨난 사람처럼 꾸며 백제로 넘어왔다. 바둑을 좋아하던 개로왕은 그를 상객으로 맞았다. 바둑판 앞에서 신뢰가 쌓인 어느 날, 도림은 왕에게 말했다. 산과 강이 둘러싼 천혜의 땅을 가졌으면서 성곽은 정비되지 않았고 궁실은 초라하며 선왕의 유해는 임시로 묻혀 있다. 이래서는 대왕의 위엄이 서지 않는다는 요지였다.

개로왕은 그 말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백성을 징발해 성을 쌓고 그 안에 궁실과 누각을 지었다. 욱리하, 곧 한강에서 큰 돌을 캐어 선왕의 유해를 다시 장사 지냈고, 강을 따라 제방을 쌓았다. 그 결과 창고는 비고 백성은 곤궁해졌다고 삼국사기는 적는다. 도림은 그 사이 몰래 고구려로 돌아가 보고했고, 장수왕은 출병을 결심했다.

다만 이 서사가 승자의 시선에서 극적으로 다듬어졌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도림 한 사람이 백제를 무너뜨렸다고 볼 수도 없다. 대규모 토목공사는 첩자가 심어 준 욕망이기 전에, 개로왕 자신의 내적 욕망이 반영된 결과였을 수 있다. 458년부터 왕족 중심으로 집권 체제를 다져 온 왕이, 위기 앞에서 눈에 보이는 상징으로 그 권위를 증명하려 했던 시도와 맞물렸기 때문이다. 도림은 문을 연 것이 아니라 이미 열려 있던 문으로 들어갔다. 두 나라의 국력 격차 또한 이미 벌어져 있었고, 그 격차가 도림이라는 이야기를 필요로 했다고 보는 편이 더 정직하다.

475년 9월, 장수왕은 3만 군사를 이끌고 한성을 포위했다. 북성이 7일 만에 함락되고 남성마저 위태로워지자, 궁지에 몰린 왕은 아들 문주를 불러 말했다고 한다. 어리석고 밝지 못해 간사한 자의 말을 믿다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너는 난을 피해 나라의 계통을 이으라는 것이었다. 문주는 남쪽으로 떠났고, 왕은 성을 나가 도주하다 붙잡혔다. 그를 붙잡은 것은 고구려 장수 걸루와 만년이었다. 두 사람은 본래 백제 사람으로, 죄를 짓고 고구려로 달아난 자들이었다. 걸루는 왕 앞에서 말에서 내려 절한 뒤 얼굴에 침을 세 번 뱉고 죄를 꾸짖었고, 왕은 아차성 아래에서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전성기의 백제가 길러 놓은 인재가 적의 선봉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문주의 행적은 삼국사기 안에서도 두 갈래로 전해진다. 『삼국사기』 문주왕 즉위년조는 포위된 왕이 문주를 신라로 보내 구원을 청하게 했고, 문주가 신라의 군사 1만을 얻어 돌아왔을 때는 성이 이미 파괴되고 왕이 죽은 뒤였다고 적는다. 신라본기에도 신라왕이 군사를 내어 구하려 했으나 도착하기 전에 한성이 무너졌다는 기록이 있다.6 신라는 보내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신라가 닿기 전에 성이 먼저 무너졌다. 1만 명의 군사를 모아 한성까지 움직이는 데 걸리는 시간은 동맹이 아무리 굳건해도 넘어설 수 없는 한계였다. 문주는 즉위 직후인 그해 10월 도읍을 웅진으로 옮겼다. 나제동맹은 있었다. 다만 속도가 없었다.

같은 시대, 로마의 마지막 20년

같은 시간대의 서쪽 끝에서는 한 제국이 다른 방식으로 같은 길을 걷고 있었다. 455년 반달의 약탈 이후 서로마 황제 자리는 사실상 군 지휘관들이 세우고 갈아치우는 자리가 되었다. 게르만계 장군 리키메르는 456년부터 472년까지 황제를 세우고 물리쳤다. 그가 죽은 472년, 한성의 개로왕은 북위에 국서를 올리고 있었다.

로마는 국경의 방어를 게르만 동맹군에게 의존했다. 토지와 급료를 약속하고 군단을 채웠다. 그러나 약속을 이행할 재정 기반이 줄어들수록 동맹군은 보호자가 아니라 채권자가 되었다. 476년 오도아케르의 부대는 이탈리아의 땅을 요구했다가 거부당하자 반기를 들었고, 9월에 어린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했다.7

두 사례의 결은 다르다. 로마는 제국의 군대를 바깥의 칼에 맡겼고, 백제는 나라의 생존을 바깥의 약속에 걸었다. 하나는 병력의 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외교의 문제였다. 그러나 안의 자강이 줄어든 자리를 바깥의 무언가로 채웠고, 그 바깥이 위기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했다는 점에서 두 사례는 같은 문법을 공유한다.

5세기의 유라시아는 동서 양쪽에서 동시에 흔들리고 있었다. 동쪽에서는 북위가 439년 화북을 통일했고 고구려는 평양에서 남쪽을 노렸다. 서쪽에서는 훈족의 압박으로 이동한 게르만 세력이 제국의 땅에 뿌리를 내렸다. 큰 판이 다시 짜이는 시기에 중간 규모 국가의 생존은 한 번의 큰 승리가 아니라 매일의 갱신에 달려 있었다.

철학은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최강자의 조건이 사라지는 순서

이 소시리즈가 붙잡아 온 질문은 ‘최강자의 조건’이었다. 비류왕 대에 왕위 계승의 골격이 세워졌고, 근초고왕은 마한을 통합하고 371년 평양성까지 올라가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침류왕은 불교라는 새 질서를 들여왔고, 아신왕과 비유왕은 동맹으로 생존 공간을 넓혔다. 계승의 안정, 군사력, 사상적 통합, 동맹. 백제가 한 세기에 걸쳐 쌓은 네 개의 기둥이다.

개로왕의 마지막 20년은 이 기둥이 하나씩 빠져나가는 과정으로 읽힌다. 외교는 북위에서 막혔다. 인재는 걸루와 만년처럼 적의 선봉이 되어 돌아왔다. 정보는 바둑판 앞에서 무방비로 열렸다. 재정은 성곽과 능묘와 제방을 쌓는 데 소진되었고, 동맹은 늦게 도착했다. 나라는 적이 성문에 닿기 전에 이미 비어 있었다.

눈여겨볼 점은 개로왕이 나태한 왕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선제공격을 하고, 국경에 목책을 세우고, 대륙의 강대국에 국서를 썼다. 오히려 가장 바쁘게 움직인 왕이었다. 문제는 바쁨의 방향이었다. 압박이 커질수록 지도자는 눈에 보이는 상징으로 위엄을 증명하고 싶어진다. 높은 성벽과 웅장한 궁궐과 선왕의 능이 그 상징이다. 위기의 순간에 상징에 투자하는 정치는 대개 실체를 갉아먹는다.

도림 이야기가 사실이든 후대의 각색이든 패턴의 무게는 달라지지 않는다. 적은 약점을 직접 공격하지 않는다. 취향을 공격하고, 듣고 싶은 말을 공격한다. 칭찬은 첩자의 가장 오래된 무기다. 그 말을 걸러 낼 사람이 곁에 없었다면, 그것은 도림의 문제가 아니라 조정 안의 문제다.

최강자의 조건은 한 번 얻으면 끝나는 자산이 아니라 매일 갱신해야 하는 부채에 가깝다. 근초고왕의 백제가 강했던 것은 그가 특별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조건을 매일 갱신하는 체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개로왕 대에 그 갱신이 멈췄다. 역사는 이 지점에서 묻는다. 위기의 한가운데서 왕에게 불편한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조정에 남아 있었는가.

무너진 성터가 되묻는 것

한성을 잃은 백제는 웅진에서 다시 일어섰다. 538년에는 사비로 도읍을 옮기며 부흥을 도모했다. 551년 성왕이 신라와 손잡고 한강 하류를 일시 회복했으나, 553년 신라가 그 땅을 차지하면서 나제동맹은 파국을 맞았고 이듬해 관산성에서 성왕이 전사한다.8 660년 백제는 멸망한다. 한성 함락에서 멸망까지 185년, 그 시간 내내 한강은 백제가 끝내 완전히 되찾지 못한 심장이었다.

동맹에는 조건이 하나 더 숨어 있었다. 나제동맹은 고구려라는 공동의 위협이 있을 때만 단단했다. 공동의 적이 약해지자 신라는 백제를 대신해 한강을 차지했다. 개로왕이 기다렸던 구원병은 그 동맹의 구조를 미리 보여 준 장면이었다.

외부의 압박 앞에서 안의 갈등을 키우고 곳간을 비우는 사회는, 밖의 위협보다 먼저 안에서 무너진다.

국방예산이 처음으로 70조 원을 넘어선 지금, 정작 우리가 셈해야 할 것은 예산의 액수보다 동맹이 도착하는 속도와 내부의 곳간이 버텨낼 수 있는 시간이다.

우리는 지금 어느 바둑판 앞에 앉아 있고, 맞은편에서 누가 무슨 말을 건네고 있는가. 성벽의 높이가 아니라 창고의 깊이를 보는 일. 바라보는 자의 기록이 오늘도 멀리서 보아야 보이는 것들을 붙드는 이유다.


* 참고할 말씀: ‘지혜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는 나가다가 해를 받느니라’ — 잠언 27:12

백제 소시리즈 — 4부 전성기·충돌기

① 비류왕·계왕 — 백제 왕위 계승사 바로가기
② 근초고왕 — 전성기의 조건, 고구려 격파·마한 통합 바로가기
③ 근구수왕·침류왕·진사왕 — 불교 수용과 왕권 변동 바로가기
④ 아신왕~비유왕 — 왜와의 동맹, 나제동맹 결성 바로가기
⑤ 개로왕 — 장수왕의 남하, 한성 함락과 백제의 위기 (이 글)

1. 광개토대왕릉비문, 영락 6년(396년) 기사.

2.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3 개로왕 15년(469)조.

3. 『송서』 이만열전, 대명 2년(458년)조;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 4년조.

4.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 18년(472)조; 『위서』 백제전.

5.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3 개로왕 21년(475)조.

6. 『삼국사기』 권26 백제본기4 문주왕 즉위년조; 권3 신라본기3 자비마립간 17년(474)조(기년의 차이가 있으나 백제본기 서술을 기준하여 파악한다).

7. Peter Heather, The Fall of the Roman Empire (2005).

8.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 32년(554)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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