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빈 자리를 먼저 차지한 자가 역사를 쓴다 — 비류왕과 304년
304년, 백제와 유라시아가 같은 방식으로 흔들렸다
2026.09.14 · 역사·철학
왕이 된 사람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298년, 백제의 책계왕이 죽었다. 낙랑군이 맥족과 손잡고 백제를 침공했을 때, 왕이 직접 전장에 나섰다가 목숨을 잃은 것이다.1
뒤를 이은 아들 분서왕도 아버지처럼 낙랑에 강경했다. 304년 음력 2월, 그는 낙랑군의 서쪽 현을 빼앗는 데 성공한다. 백제로서는 드문 승리였다.
그런데 그해 음력 10월, 분서왕마저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의 손에 살해당했다. 두 달 전의 승리에 대한 보복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2
6년 사이 왕이 두 번 죽었다. 한 번은 전쟁터에서, 한 번은 자객의 칼끝에서.
당시 백제 왕실은 개루왕 이후 초고왕계와 고이왕계, 두 지파가 번갈아 왕위를 차지하는 구도였다. 고이왕계인 책계왕·분서왕이 연달아 피살되며 이 지파는 큰 타격을 입었고, 분서왕의 아들들은 아직 어려 왕위를 이을 수 없었다.
그 공백을, 오랫동안 민간에 있던 초고왕계 방계 왕족 한 사람이 신하와 백성의 추대를 받아 채운다. 비류왕이었다.
그리고 같은 해, 음력 10월. 바다 건너 화북 땅에서도 새로운 나라가 태어났다.
흉노 출신 유연이 좌국성에서 한왕(漢王)을 자칭하며 나라를 세운 것이다. 서진 황실이 팔왕의 난으로 스스로를 갉아먹고 있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거의 같은 시기, 저 멀리 로마 제국에서도 비슷한 소동이 있었다. 304년 11월,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병으로 두문불출하자 니코메디아 전역에 그가 이미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공동 황제 갈레리우스가 그 소문이 가라앉기 전에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려 한다는 의혹까지 제기되었다.3 훗날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살아있는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면서 소문은 거짓으로 밝혀졌지만, 황제의 자리가 비었다는 소문 하나만으로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이 움직였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한쪽은 왕이 두 번 죽어서 생긴 빈 자리, 다른 한쪽은 제국이 안에서부터 무너지며 생긴 빈 자리, 또 다른 한쪽은 황제가 살아있었음에도 “죽었다”는 소문만으로 열린 빈 자리였다. 세 사건이 정확히 같은 달까지 일치하는지는 그해 여러 연호가 겹쳐 쓰인 사료의 사정상 조심스럽지만,4 같은 해에 유라시아 세 곳에서 동시에 권력의 공백이 열렸다는 사실 자체는 사료상 분명하다.
정통성을 빌려온 사람들
비류왕은 자신의 즉위를 어떻게 정당화했을까. 그는 혈통 자체보다, “초고왕계의 재집권”이라는 서사를 등에 업었다. 원래 이 계보가 왕위를 이었어야 했다는 명분이 그를 세운 실질적인 힘이었다.
유연도 다르지 않았다. 흉노 출신이면서도 나라 이름을 굳이 “한(漢)”이라 한 것은, 옛 한나라 황실과의 혼인 관계를 내세워 자신의 정통성을 그 이름 위에 얹으려 한 선택이었다.5 흉노의 칼로 세운 나라에, 무너진 한족 왕조의 이름을 씌운 것이다.
로마의 갈레리우스는 조금 달랐다. 그는 애초에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정당한 후계자가 아니라, 공동 황제 체제 안에서 실권을 쥔 인물이었을 뿐이다. 304년 11월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지만, 이듬해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실제로 퇴위했을 때 가장 유력한 후계자 자리를 차지한 것은 결국 그였다.
비류왕과 유연은 실제로 빈 자리를 차지한 뒤 정통성의 언어를 갖다 붙였다. 갈레리우스는 자리가 비었다는 소문만으로 먼저 움직였다. 방식은 셋이 달랐지만, 방향은 같았다. 정통성이 먼저 있어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리를 향해 움직인 뒤에야 정통성이라는 이름이 뒤따라온다는 방향이다.
40년의 침묵이 말해주는 것
비류왕의 재위는 304년 10월부터 344년 10월까지, 40년에 이른다.6 그런데 『삼국사기』가 전하는 이 40년의 기록은 놀라울 만큼 적다.
312년 음력 2월, 신하를 보내 홀아비·과부·고아·무의탁 노인을 살피고 곡식을 나누어주었다는 진휼 기록. 같은 해 병관좌평에 해구를 등용했다는 인사 기록. 321년 정월, 왕의 서제(庶弟) 우복을 내신좌평으로 삼았다는 기록. 그리고 327년, 그 우복이 북한산성을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했다는 기록. 337년 음력 2월, 신라 사신을 극진히 대접했다는 기록.7
이것이 전부다. 전쟁도, 정복도, 거대한 토목공사도 없다. 있는 것은 구휼과 인사, 그리고 자기 서제의 반란뿐이다.
이렇게 기록이 적은 것은 무능의 증거로 읽힐 수도 있지만, 다르게 읽힐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정통성이 취약한 방계 출신 왕이 4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큰 사고 없이 왕위를 지켰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그가 얼마나 신중하게 권력을 운용했는지를 보여주는 방증일 수 있다. 서제의 반란조차 왕위 자체를 흔들지 못하고 국지적 사건으로 끝났다는 것은, 비류왕이 최소한의 지지 기반을 끝까지 놓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비류왕이 죽은 344년 10월, 왕위는 그의 아들이 아니라 원래 정통이었던 고이왕계, 분서왕의 장남 계왕에게 돌아간다. 계왕은 재위 2년 만인 346년 9월에 세상을 떠났고, 즉위 기사와 사망 기사, 그리고 345년 2월 동명묘 제사 기록 외에는 남은 것이 거의 없다.8 그를 끝으로 고이왕계는 다시 왕위에 오르지 못했고, 비류왕의 아들 근초고왕이 즉위하면서 초고왕계의 시대가 열린다.
같은 304년, 화북에서는 전혀 다른 규모의 사건이 계속되고 있었다. 서진은 265년 삼국을 통일했지만 불과 한 세대 만에 팔왕의 난(290~306년)으로 스스로를 무너뜨리고 있었다.9 그 혼란의 틈에서 흉노 좌현왕의 손자이자 한족 문화에 정통했던 유연이 대선우로 추대되었고, 그의 나라는 이후 오호십육국시대라 불리는 135년에 걸친 대혼란의 첫 페이지가 되었다.
우리는 지금 누구의 빈 자리를 채우고 있는가
이 세 사건을 나란히 놓고 보면 하나의 질문이 남는다. 정통성이란 원래 거기 있던 것인가, 아니면 빈 자리를 먼저 차지한 자가 사후에 만들어 붙이는 이름인가.
역사는 이 지점에서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정통성이라 부르는 것은 어쩌면 원인이 아니라 결과일지도 모른다는 질문이다. 자리를 먼저 차지한 자가 이긴 뒤에, 그 승리를 설명하기 위해 정통성이라는 이름이 나중에 붙는 것은 아닌가.
앞선 글에서 우리는 장수왕의 평양 천도를 통해, 수도를 옮기는 행위 자체가 곧 정통성을 새로 쓰는 정치적 선언이었음을 살펴보았다. 이번 편은 그보다 100여 년 앞선 시점, 아직 정통성이라는 것 자체가 완성되지 않은 채 흔들리던 백제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 셈이다. 장수왕은 이미 만들어진 정통성을 다른 자리로 옮겼지만, 비류왕은 정통성 자체를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 했다.
권력이 사라진 자리는 오래 비어 있지 않는다. 누군가는 반드시 그 자리를 향해 움직이고, 움직인 다음에야 그 행동을 설명할 말을 찾는다. 304년의 백제와 화북과 로마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이 순서다. 정당성이 먼저 있고 그다음에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리를 차지한 다음에 정당성이 뒤따라온다는 순서.
지금 우리 주변에서 비어 있는 자리, 그리고 그 자리를 향해 가장 먼저 움직이고 있는 이는 누구인가. 그리고 우리는 그 움직임을 정당성이라 부르고 있는가, 아니면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채 지켜보고 있는가.
역사는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 참고할 말씀: ‘그는 때와 시기를 바꾸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 다니엘 2:21
1. 책계왕의 전사(298년 음력 9월, 한군·낙랑군·맥인 연합군과의 전투 중 사망) — 위키백과 「책계왕」 항목
2. 분서왕의 낙랑군 서쪽 현 공격(304년 음력 2월)과 그해 음력 10월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 의한 피살. 두 사건의 인과관계는 학계에서도 추정으로 다루어진다 — 나무위키 「분서왕」 항목
3.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발병설과 사망 소문, 갈레리우스의 권력 장악 시도(304년 11월) 및 이듬해 305년 5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실제 퇴위 — 나무위키 「디오클레티아누스」 항목
4. 304년 한 해에 서진 조정 내에서 영안·건무·영흥 등 여러 연호가 잇달아 사용되어, 사료마다 사건의 월을 다소 다르게 표기하는 경우가 있다 (『진서』 및 관련 사료 기반 정리, 나무위키 「오호십육국시대」 항목 참조).
5. 유연의 대선우 추대 및 한왕 즉위(304년) — 위키백과 「유연(전조)」 항목; 위키백과 「오호십육국시대」 항목
6. 비류왕의 즉위와 재위 기간 (304년 10월~344년 10월) — 『삼국사기』 백제본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비류왕」 항목 (encykorea.aks.ac.kr)
7. 비류왕 재위 중 진휼·인사·우복의 반란·신라 사신 기록 — 『삼국사기』 백제본기 원문 정리 (db.history.go.kr, 한국 고대 사료 DB); 위키백과 「비류왕」 항목
8. 계왕의 재위(344~346년) 및 기록의 소략함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계왕」 항목; 위키백과 「계왕」 항목
9. 팔왕의 난과 서진의 혼란 — 위키백과 「서진」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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