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초고왕, 최강자의 조건
백제 전성기와 4세기 세계사의 평행선
역사·철학 · 한국사 역사 시리즈 4-백제-② · 2026.09.16.
371년 가을, 평양성 아래
앞선 글에서 우리는 백제 왕실이 계승의 다툼 속에서 흔들리던 시절을 살펴보았다. (비류왕·계왕 — 왕위 계승사)
그 흔들림이 멈춘 자리에서 한 왕이 등장한다.
371년(음력 10월), 백제 근초고왕은 3만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한 나라의 왕이 전장에서 죽는 일은 흔치 않다. 그런데 이 사건은 승리의 기록이라기보다, 질문의 시작이다. 한 세대의 확장은 왜 하필 그 순간에 가능했는가.
같은 시간, 지구 반대편에서도 왕들은 비슷한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새기고 있었다.
왕이 죽은 자리에서 시작된 나라
근초고왕의 재위(346~375년)는 백제사에서 가장 급격한 팽창의 시기로 꼽힌다. 그는 남쪽으로 마한의 잔여 세력을 통합했고(정확한 시점은 학계에서도 이견이 있어 369년 전후로 추정된다), 북쪽으로는 평양성까지 진격해 고구려의 왕을 전사시켰다.
이 시기 백제와 왜(倭)의 관계를 보여주는 유물이 칠지도(七支刀)다. 369년 제작으로 추정되는 이 칼에는 백제 왕세자가 왜왕에게 하사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다만 이 명문의 해석—하사인지 헌상인지—을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이 글은 그 논쟁 중 어느 한쪽의 손을 들지 않는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 시기 백제는 자신의 힘을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했다는 것.
바로 그 무렵, 인도 갠지스강 유역에서는 굽타 왕조의 사무드라굽타(재위 c.335~375년)가 인도 아대륙 전역을 정복하고 있었다. 그는 20개가 넘는 왕국을 무너뜨리거나 조공국으로 편입시키며 인도 역사상 손꼽히는 팽창을 이끌었는데, 후대 역사가들이 그를 “인도의 나폴레옹”이라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정복의 전 과정은 알라하바드 석주 명문(Allahabad Pillar Inscription)이라는, 지금도 인도 프라야그라지에 남아 있는 거대한 돌기둥에 산스크리트어로 상세히 새겨졌다. 흥미로운 것은 이 비문을 쓴 사람이 사무드라굽타 자신의 궁정 시인 하리세나(Harishena)였다는 점이다. 정복자의 옆에는 언제나 그 정복을 문장으로 완성해줄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유라시아 서쪽 끝, 로마에서는 콘스탄티누스 1세(재위 306~337년)가 오랜 내전 끝에 로마 제국을 다시 하나로 통일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승리를 후대에 남기기 위해 콜로세움 바로 옆에 거대한 개선문(Arch of Constantine)을 세웠는데, 그 표면을 가득 채운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승전 장면을 새긴 부조였다. 칼로 승리를 얻은 자가, 돌을 깎아 그 승리를 영원한 이미지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371년 백제의 칼, 같은 세기 인도의 돌기둥, 그리고 로마의 개선문. 대륙도 언어도 다른 세 나라가 공통으로 증명하는 것은 하나다. 강한 왕은 반드시 자신의 강함을 새길 매체를 남긴다.
같은 시간, 다른 대륙의 정복자들
夫勢者,勝眾之資也。(부세자,승중지자야。)
“권세란 무리를 이기는 자산이다.”
한비자는 권력을 이렇게 정리했다. 근초고왕의 371년과 사무드라굽타·콘스탄티누스의 정복 사업은 이 말의 실증에 가깝다.
그러나 이 한비자적 권력론에는 빈틈이 하나 있다. 권세가 승리를 만든다고만 말하면, 그 승리가 ‘기록되는 방식’은 설명하지 못한다.
칠지도의 명문도, 알라하바드 석주의 문장도, 로마 개선문의 부조도 전쟁의 상대측 기록이 아니다. 모두 승자 자신이 명령해서 새긴 글이다. 패자였던 고구려의 시각도, 정복당한 인도 남부 왕국들의 시각도 지금은 남아 있지 않거나 훨씬 뒤늦게, 훨씬 적은 분량으로만 전해진다.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은 오래된 상식이다. 그런데 이 상식이 놓치는 부분이 있다. 승자가 기록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기록을 남길 여력이 있는 쪽이 승자가 된다는 것이다. 칠지도를 주조할 금속과 장인을 가진 나라, 석주를 세울 채석장과 시인을 거느린 나라, 개선문을 올릴 석공과 재정을 가진 제국—그 물질적 여유 자체가 이미 힘의 증거였다. 승자는 역사를 쓰는 자가 아니라, 역사를 써서 남길 금속과 채석장을 소유한 자다.
철학은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확장의 조건
근초고왕과 사무드라굽타, 콘스탄티누스의 시대를 나란히 놓으면 하나의 패턴이 보인다. 팽창의 절정기는 언제나 다음 세대의 위기를 예약한 채로 온다.
근초고왕 사후 백제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진에 시달리며 수십 년간 위축의 시대를 맞는다. 사무드라굽타가 세운 굽타 제국 역시 그의 아들 대에 이르러 축적된 팽창의 관성을 감당하지 못하고 서서히 재편된다. 그리고 근초고왕이 세상을 뜬 바로 그 375년, 유라시아 초원 서쪽에서는 훈족이 게르만족을 밀어붙이며 훗날 로마 자체를 뒤흔들 대이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한 시대의 정점이 완성되는 순간, 국경 밖에서는 이미 다음 시대의 파도가 일고 있었던 것이다.
힘을 얻는 것은 군사의 기술이고, 힘을 새기는 것은 문명의 기술이며, 힘을 이어가는 것은 제도의 기술이다. 4세기의 백제도, 인도의 굽타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왕조도 앞의 두 가지에는 눈부시게 성공했다. 그러나 세 번째 기술 앞에서는 하나같이 시간이 부족했다. 정복의 환희가 지나간 자리, 시스템으로 옮겨지지 못한 팽창은 곧 다음 세대의 위기를 예고한다.
오늘의 조직과 정치도 이 구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성과를 만드는 능력과 그 성과를 서사로 새기는 능력은 시대를 막론하고 넘쳐난다. 그것을 다음 세대가 이어받을 제도로 옮겨놓는 능력만이 언제나, 어느 시대든 뒤늦게 논의된다.
우리는 무엇을 정복이라 부르는가
칠지도는 지금 일본 이소노카미 신궁에 보관되어 있다. 알라하바드 석주는 지금도 인도 프라야그라지에 서 있다. 로마의 개선문은 콜로세움 옆에서 여전히 관광객을 맞는다. 세 물건 모두 만든 나라의 국경 밖에, 혹은 그 나라 자체가 사라진 자리에 남아 후대의 해석을 기다리고 있다.
근초고왕이 371년 평양성 아래 섰을 때, 그는 자신의 승리가 1,600여 년 뒤 다른 대륙의 왕들과 나란히 놓여 읽히리라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1.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26년(371년) 조
2. 칠지도 명문 및 하사·헌상 논쟁: 국내 학계 개설서 다수 (해석 이견 존재, 가설로 취급)
3. Allahabad Pillar Inscription (Samudragupta) 관련 인도사 개설서
4. 콘스탄티누스 개선문(Arch of Constantine) 및 4세기 로마사 개설서
5. 375년 훈족의 서진 및 게르만족 이동: 유럽 고대사 개설서
6. 한비자, 『한비자』 팔경편 인용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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