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다 시리즈 ⑤ · 역사·철학
베니스, 지리가 감옥이 된 해
항로 하나가 옮겨 놓은 것은 부의 크기가 아니라 부의 주소였다
운하는 그대로인데, 값만 사라졌다
2023년 수에즈 운하가 거둔 통행 수입은 약 100억 달러로 역대 최고였다. 이듬해인 2024년에는 40억 달러 안팎으로 내려앉았다.1 홍해에서 상선을 겨냥한 공격이 이어지자 선사들이 배를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으로 돌렸기 때문이다. 운하가 얕아진 것도 좁아진 것도 아니었고, 이집트가 무엇을 잘못한 것도 아니었다. 바뀐 것은 선사들의 계산이었다.
2026년 9월 현재 수에즈는 회복 중이다. 8월 통행 수입은 전년 같은 달보다 56.7% 늘어난 5억 6,710만 달러였고, 머스크와 하파그로이드 같은 주요 선사가 일부 노선을 다시 수에즈로 돌리고 있다. 그러나 이 수입은 2023년 8월의 64% 수준이며, 서행 노선 일부는 여전히 희망봉을 우회하고 있다.2 2분기 회복을 밀어 올린 힘도 이집트 바깥에 있었다. 통과 선박 3,580척 가운데 유조선이 1,526척으로 열 척 중 네 척이 넘었는데, 한 분석은 이 배들이 홍해가 안전해져서라기보다 호르무즈 쪽 길이 막힌 데 따른 반사이익일 가능성을 제기한다.3 지리는 그대로다. 그 지리 위로 배가 올지는 이집트가 정하지 못한다.
이 장면에는 500여 년 전의 원본이 있고, 방향은 정반대였다. 그때는 희망봉이 수에즈 쪽 길을 비워 냈고, 그 값을 가장 비싸게 치른 것은 이집트에 기대어 살던 도시 베니스였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1571년 레판토의 대승이 재기로 이어지지 못한 과정을 살펴보았고, 저묾이 그 승리에서 시작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적었다.4 그렇다면 저묾의 출발점은 전장이 아니라 그보다 73년 앞선 어느 바닷가일 수 있다. 1498년 5월, 인도 서안이다.
후추의 주소가 바뀌던 시간
15세기 말 베니스의 부는 한 줄기 길 위에 놓여 있었다. 인도 말라바르 해안에서 실은 후추는 아랍과 구자라트 상인의 배로 홍해에 닿았고, 낙타에 실려 카이로를 지나 알렉산드리아에서 베니스 상선에 올랐다.5 길목마다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가 통행세를 거뒀고, 베니스는 그 왕조와 조약과 상관(商館)으로 묶여 있었다. 체계는 정교했다. 국가가 갤리선을 짓고, 그 배를 경매에 붙여 귀족 상인에게 빌려주고, 출항 시기와 항로를 선단 단위로 정했다.6 라네(Frederic C. Lane)의 추정으로 포르투갈이 끼어들기 전 베니스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실어 낸 후추는 해마다 115만 파운드 안팎이었다.7
베니스는 이 길이 위협받을 가능성을 몰랐던 도시가 아니다. 1459년 4월, 무라노섬의 수도사 프라 마우로가 그린 세계지도가 포르투갈 궁정으로 보내졌다. 이 지도에는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인도양으로 이어지는 바닷길이 열려 있을 가능성이 그려져 있었고, 도제의 서한이 함께 갔다고 전해진다.8 앞서 1455~56년에는 베니스인 카다모스토가 엔히크 왕자에게 고용되어 서아프리카 해안을 탐사했다.9 이 지도가 포르투갈의 항해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를 두고는 여전히 견해가 엇갈린다. 다만 그 바다의 지도를 그린 손도, 그 바다의 앞자락을 먼저 가 본 손도 베니스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남는다. 그러나 그 길로 배를 낸 것은 베니스가 아니었다.
1497년 7월 8일 바스쿠 다 가마가 리스본을 떠났고, 1498년 5월 20일 캘리컷에 닿았다. 그 항해는 대항해시대 시리즈의 앞선 편에서 다루었다. 3년 뒤인 1501년 7월, 베니스의 향신료 상인 지롤라모 프리울리는 일기에 다음과 같은 취지의 기록을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향신료 무역을 잃는 것은 젖먹이에게서 젖을 빼앗기는 것과 다름없다.10
베니스의 대응은 카이로로 향했다. 1504년 사절 프란체스코 텔디는 보석 상인으로 위장해 카이로에 들어가 맘루크 술탄에게 포르투갈의 항행을 막으라고 권했다.11 베니스가 이집트 쪽에 갤리 건조용 목재와 포수·조선 기술자를 대 주었다는 기록도 전한다.12 1505년 수에즈를 떠난 원정대는 1508년 차울에서 포르투갈 함대를 꺾었으나, 이듬해 1509년 2월 3일 디우 앞바다에서 크게 졌다. 이후 포르투갈은 고아와 말라카와 호르무즈를 차례로 손에 넣었다.13 베니스는 자기 배를 내는 대신, 옛 길목을 지키는 동업자에게 힘을 실어 주는 길을 택했다.
디우의 패전으로부터 석 달 뒤인 1509년 5월, 베니스는 이번에는 이탈리아 본토의 아냐델로에서 캉브레 동맹군에 무너졌다. 캉브레 동맹은 베니스가 본토로 영토를 넓히자 교황청과 프랑스, 신성로마제국이 이를 견제하려 뭉친 것으로, 인도양의 향신료 전쟁과는 다른 전선이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 12장에 베니스가 한 번의 싸움으로 800년에 걸쳐 얻은 것을 잃었다고 적었다.14 인도양의 패전과 본토의 패전을 하나의 원인으로 묶을 사료는 없다. 그러나 두 사건은 석 달 사이에 벌어졌다. 그럼에도 베니스는 죽지 않았다. 몇 주 만에 파도바를 되찾았고, 1515년 무렵에는 영토 대부분을 지킨 채 강화했다.15 1517년 1월에는 오스만이 맘루크 왕조를 무너뜨렸다. 20년 가까이 매달린 동업자가 사라졌고, 베니스는 새 주인 아래에서도 알렉산드리아의 상관을 유지했다. 앞선 글에서 본 오스만과의 이중 관계는 여기서 시작된다.
가장 뜻밖의 장면은 그 뒤에 온다. 포르투갈의 독점은 생각만큼 단단하지 않았다. 세기 초 수십 년 동안 포르투갈이 홍해 항로를 조이면서 알렉산드리아의 후추값은 15세기 수준보다 올랐다. 그러나 애초에 포르투갈에게는 인도양 전체를 봉쇄할 배도 사람도 충분하지 않았다. 말라카와 순다 해협 너머로는 손이 닿지 않았고, 그 틈으로 향신료가 흘렀다. 여기에 인도에 주둔한 포르투갈 관리들이 점차 부패하고 비효율해지면서 홍해로 향하는 향신료마저 눈감아 주기 시작했다.16 1560~64년 베니스의 알렉산드리아 후추 반출은 연평균 131만 파운드로, 포르투갈 이전 수준을 웃돌았다.7 1561년 4월 알렉산드리아로 떠난 젊은 귀족 알레산드로 마뇨의 여행기에는 540톤급 둥근 배 한 척이 향신료 50만 파운드 남짓을 싣고 돌아온 기록이 나온다. 국가 갤리 선단은 그 무렵 이미 민간 둥근 배에 자리를 내주고 있었다.17
그렇다면 1498년에 베니스는 아무것도 잃지 않았는가. 라네 자신의 추정이 답을 준다. 서유럽의 후추 수입 총량은 1500년경 연 150만~200만 파운드에서 1560년경 300만 파운드를 넘어선 것으로 짐작된다.18 베니스의 물량은 늘었지만 시장은 더 빨리 커졌다. 1625년과 1628년에 작성된 베니스 영사 보고서 역시 알렉산드리아 무역 쇠퇴의 첫째 원인으로 바스쿠 다 가마의 포르투갈이 아니라 ‘플랑드르인’, 곧 네덜란드인의 항해를 지목했다.19 포르투갈이 열어젖힌 희망봉 항로를 규격화하고 대형 상선 체제로 완성한 주인공은 1600년과 1602년에 각각 세워진 영국과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였다. 베니스를 끝내 무너뜨린 두 번째 충격은 길을 처음 연 개척자가 아니라, 그 길을 산업으로 바꾼 후발 주자였다. 이 회복과 몰락의 무게를 어떻게 볼지는 지금도 논쟁이다. 오루크와 윌리엄슨 같은 경제사학자들은 포르투갈 항로가 유럽 향신료 시장에 미친 충격이 라네의 평가보다 훨씬 컸다고 본다.20 어느 쪽을 따르든 1498년은 일격이 아니었다. 첫 충격과 반세기의 회복, 그리고 두 번째 충격이었다.
성은 높고 못은 깊었으나, 짐이 떠났다
맹자는 「공손추 하」 첫 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城非不高也,池非不深也,兵革非不堅利也,米粟非不多也;委而去之,是地利不如人和也。(성비불고야, 지비불심야, 병혁비불견리야, 미속비불다야; 위이거지, 시지리불여인화야.)
“성이 높지 않은 것이 아니요 못이 깊지 않은 것이 아니며, 무기가 날카롭지 않은 것도 곡식이 적은 것도 아니나, 그것을 버리고 떠나니 땅의 이로움이 사람의 화합만 못한 것이다.”21
맹자가 말한 인화(人和)는 본래 성을 지키는 사람들의 마음, 곧 민심이었다. 그러나 이 문장의 뼈대는 다른 자리에도 그대로 얹힌다. 여기서 떠나는 ‘사람’을 길을 고르는 상인과 짐으로 바꾸어 읽으면, 성벽이 아무리 높아도 그 자리를 버리고 떠나는 것이 있으면 지리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는 문장이 된다. 맹자는 같은 대목에서 나라를 굳게 하는 데 산과 골짜기의 험함을 쓰지 않는다고까지 말한다(固國不以山谿之險). 1498년 이후의 알렉산드리아도 그랬다. 항구도, 낙타 길도, 홍해도, 카이로의 상관도 그대로 있었다. 성벽은 서 있었고, 떠난 것은 짐이었다.
지리가 축복이던 시간이 길수록, 그 위에 지은 모든 것이 합리적이 된다. 국가가 짓는 갤리와 경매, 선단의 일정, 카이로와의 조약, 알렉산드리아의 상관. 하나하나는 정확하고 서로를 떠받친다. 그래서 하나를 고치려면 전부를 고쳐야 한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 25장에서 통찰한 것이 바로 이 구조다.
“시대와 형편이 바뀌었는데도 행동을 바꾸지 않으면 사람은 무너진다. 그러나 그 변화에 맞출 만큼 살피는 이는 드물다. 본성이 이끄는 곳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고, 한 가지 방식으로 늘 번영해 온 사람은 그 방식을 떠나도록 설득되지 않기 때문이다.”22
마키아벨리가 말한 사람은 군주 한 명이다. 그러나 도시도 같은 병을 앓는다. 오늘의 사회과학은 이 병에 경로 의존성(path dependency)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번 깔린 길 위에서 모든 선택이 정교하게 최적화될수록, 길 자체를 갈아엎는 선택만은 점점 비합리가 된다. 그리고 이 병은 무능에서 오지 않는다. 늘 번영해 온 쪽이 앓는 병이다.
되살아난 옛 길이 가장 위험했다
지리는 소유물이 아니라, 남들이 계속 그 길을 택해 줄 때만 성립하는 조건부 권리다. 알렉산드리아가 후추를 만진 것은 그 길이 좋아서가 아니라 다른 어떤 길보다 쌌기 때문이다. 다른 길이 나타나는 순간 통행료는 가격이 아니라 선택 사항이 된다. 2024년의 수에즈가 그랬고, 1498년 이후의 알렉산드리아가 그랬다.
베니스의 그 뒤는 둘로 나눠 읽어야 한다. 충격과 회복이다. 충격은 누구나 알아본다. 위험한 쪽은 회복이다. 1560년대 알렉산드리아의 물량은 옛 수준을 넘어섰고, 그것은 옛 길이 여전히 통한다는 증거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회복을 만든 것은 베니스의 적응이 아니라 포르투갈이 인도양을 다 틀어막지 못한 구조적 한계와 그 관리들의 부패였다. 상대의 허점이 만들어 준 회복은, 그 상대가 정비되는 순간 회수된다. 베니스는 그것을 반세기 뒤 네덜란드의 항로 앞에서 확인했다. 포르투갈도 같은 함정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앞선 편에서 살핀 통행증 체제는 길을 지킬 무력과 정보를 쥐고 있었지만, 그 체제를 굴리는 사람들이 흐트러지자 길도 새기 시작했다.
베니스가 적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갤리를 둥근 배로 바꿨고, 시리아의 상관을 다마스쿠스에서 알레포로 옮겼다.16 문제는 그 적응이 향한 방향이다. 베니스는 길을 잃을 때마다 같은 길의 다른 구간을 찾았다. 적응은 정확했고, 정확했기 때문에 위험했다. 적응이 성공할수록 길 바깥을 볼 이유는 줄어든다. 감옥은 벽으로 지어지지 않는다. 모든 출구가 같은 문을 향해 나 있을 때 완성된다.
지금 수에즈로 돌아오는 컨테이너 선사들도 같은 계산 위에 서 있다. 희망봉을 중심으로 짜인 네트워크를 되돌리는 일은 며칠이 아니라 몇 달이 걸리는 일정 결정이다.3 돌아오는 배가 이집트를 신뢰해서 오는지, 다른 길이 아직 더 비싸서 오는지는 시간이 지나야 가려진다. 역사는 이 지점에서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누가 정한 값인가
우리나라는 수출입 물동량의 99.7%를 배로 나른다.23 그 배들이 지나는 바다 위에서 우리는 어떤 항구와 노선과 공급망의 고리를 우리 자리라고 부른다. 그 자리는 말라카·대만 해협, 수에즈와 호르무즈 같은 몇몇 요충지 위에 걸쳐 있다. 그리고 그 길목이 계속 열려 있을지는 강대국의 해로 보장에 달려 있다. 1498년 이후의 베니스는 그 말을 다시 읽으라고 요구한다. 자리는 소유가 아니라 계약이고, 계약의 상대는 우리가 통제하지 못하는 남의 계산이다.
이 글은 베니스가 어리석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베니스는 가장 합리적이었고, 그래서 갇혔다. 우리가 누리는 동북아 물류 요충지라는 지리 역시, 누군가 계속 그 길을 택해 줄 때만 성립하는 조건부 권리는 아닌가. 지금 우리 곁을 지나는 배들이 이 자리를 택하는 까닭이 자리가 좋아서인지 아직 다른 길이 없어서인지는, 다른 길이 열린 뒤에야 드러난다.
멀리서 보아야 보이는 것은 항로가 바뀌는 날짜가 아니다. 그 날짜 이전에 우리 자리가 누구의 선택 위에 놓여 있었는지다. 바라보는 자의 기록이 묻는 것도 그것이다. 우리가 자리라고 부르는 것 가운데, 남이 정해 주지 않은 값은 얼마나 될까.
* 참고할 말씀: ‘대저 재물은 영원히 있지 못하나니 면류관이 어찌 대대에 있으랴’ — 잠언 27:24
각주
1. 수에즈운하청(SCA) 발표: 2023년 역대 최고 약 102.5억 달러, 2024년 약 40억 달러 (EgyptToday, 2026.1.18 보도). 회계연도 기준으로 2022/23년을 약 94억 달러로 집계한 자료도 있음
2. 수에즈운하청장 발표: 2026년 8월 수입 5억 6,710만 달러(전년 동월 대비 56.7% 증가), 2023년 8월 8억 8,860만 달러보다 약 36% 낮음; 주요 선사 서비스 복귀 및 일부 서행 노선의 희망봉 우회 지속 — The Middle East Observer, 2026.9.21
3. 2026년 2분기 수입 12.6억 달러, 통과 3,580척 중 유조선 1,526척, 호르무즈 봉쇄 영향이라는 해석, 컨테이너 물량은 위기 이전의 약 5분의 1, 네트워크 복귀에는 수개월 소요 — The Rio Times, 2026.8.14 (CAPMAS·SCA 통계 인용, 자동화 뉴스룸 작성 기사)
4. 「베니스, 이긴 전쟁 뒤에 저물다」(slug: venice-lepanto-1571), 바라보는 자의 기록
5. 후추의 이동 경로(말라바르→홍해→카이로→알렉산드리아→베니스)와 맘루크 왕조의 중개 역할: Frederic C. Lane, Venice: A Maritime Republic (1973); 디우 해전(1509) 배경 서술 종합
6. 국가 건조 갤리(galee da mercato)의 경매 임대 및 선단 운항: Lane, “Venetian Shipping during the Commercial Revolution”, American Historical Review 38 (1933); 알렉산드리아행 갤리 경매 기록은 Lane (1940) 각주 참조
7. Frederic C. Lane, “The Mediterranean Spice Trade: Further Evidence of its Revival in the Sixteenth Century”, American Historical Review 45(3), 1940: 포르투갈 개입 이전 베니스의 알렉산드리아 후추 반출 연평균 약 1,150,000파운드, 1560~64년 연평균 1,310,454파운드
8. 프라 마우로 세계지도(1459.4.24 리스본 발송) 및 도제 서한: 학계 서술 종합. 아프리카 남단 항행 가능성 묘사가 포르투갈 항해에 미친 영향은 논쟁 중
9. 알비제 카다모스토, 1455년·1456년 서아프리카 항해 (엔히크 왕자 고용)
10. 지롤라모 프리울리 일기(1501.7); Michael Krondl, The Taste of Conquest의 영어 인용문을 옮김. 『프리울리 일기』 원문 대조는 하지 않았음
11. 프란체스코 텔디의 카이로 파견(1504)
12. 베니스의 이집트 지원: 직접 선박(카라크·갤리) 제공설과, 갤리 건조용 목재·포수·조선 기술자를 아드리아해를 거쳐 유출·묵인했다는 설이 병존하며, 후자를 우세하게 보는 시각이 있음
13. 차울 해전(1508), 디우 해전(1509.2.3), 이후 고아·말라카·호르무즈 장악
14. 마키아벨리, 『군주론』 12장 (바일라=아냐델로, 1509.5). 캉브레 동맹(1508 결성)은 베니스의 본토 팽창에 대한 교황청·프랑스·신성로마제국의 견제로, 인도양 전선과는 별개
15. Lester J. Libby Jr., “The Reconquest of Padua in 1509 according to the Diary of Girolamo Priuli”, Renaissance Quarterly 28(3), 1975
16. Lane (1940): 포르투갈 관리들의 비효율·부패로 홍해 통과 묵인, 베니스 영사 보고서(로렌초 티에폴로, 1556) 인용; 베니스 상관의 다마스쿠스→알레포 이전. 포르투갈이 인도양 전역(특히 말라카·순다 해협 이동)을 봉쇄할 해군력·인력이 근본적으로 부족했다는 구조적 한계는 여러 연구가 지적
17. 알레산드로 마뇨 여행기(1561.4 알렉산드리아행), Lane (1940) 재인용. 둥근 배가 갤리를 대체했다는 서술 포함
18. Lane (1940): 서유럽 후추 수입 추정(1500년경 연 150만~200만 파운드, 1560년경 300만 파운드 초과). Lane 스스로 “추측”임을 명시함
19. 안토니오 카펠로(1625), 제롤라모 포스카리니(1628)의 베니스 영사 보고서, Lane (1940) 각주 41 재인용. 영국 동인도회사(EIC, 1600),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 1602) 설립 및 희망봉 항로의 대형·정례화
20. Kevin H. O’Rourke & Jeffrey G. Williamson, “Did Vasco da Gama Matter for European Markets?” (NBER Working Paper; Economic History Review, 2009)
21. 『맹자』 「공손추 하」 1장
22. 마키아벨리, 『군주론』 25장. 역문은 영역본(Marriott 등)을 바탕으로 한 필자 번역
23. 2023년 수출입 물동량 945,244천 톤 중 해상 942,551천 톤(99.7%) — 관세청 집계, 해양수산부 보도자료(2024.10.31)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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