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은 지켰으나, 승리가 나라를 먹었다
보장왕, 안시성, 그리고 이긴 전쟁이 남긴 청구서
2026. 10. 19. · 역사 · 한국사 · 5부 재편기 · 고구려 ⑥ · Watchman
비단 백 필을 받은 성주
645년 가을, 안시성 앞에서 군사를 물리던 당 태종 이세민은 끝까지 성을 지킨 성주에게 비단 100필을 내렸다. 중국 측 기록은 그가 성을 굳게 지킨 것을 가상히 여겨, 자기 임금을 섬기는 태도를 격려했다고 전한다.1
침략군의 황제가 패배의 문턱에서 적의 성주에게 상을 내리는 장면은 흔치 않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더 낯선 것은 예의가 아니라 수혜자의 엇갈림이다. 비단은 성주에게 건네졌지만, 이 승리의 가장 큰 몫을 가져간 사람은 성 안이 아니라 평양에 있었던 것으로 읽힌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642년 연개소문의 정변이 고구려의 권력 구조를 어떻게 바꾸었는지 살펴보았다. 영류왕을 제거하고 보장왕을 세운 그는 막리지라는 최고 관직에 올라 군사와 행정을 한 손에 쥐었다.2 왕은 남았으나 권력은 옮겨 갔다.
정변으로 잡은 권력에는 늘 같은 숙제가 따른다. 정당성이다. 법과 계승의 절차를 건너뛰어 쥔 힘은 언젠가 “그래서 당신이 옳았다는 증거가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 선다. 645년의 전쟁은 연개소문에게 그 질문에 답할 가장 값비싼 기회였다.
이 글은 안시성의 승리를 깎아내리려는 글이 아니다. 성을 지킨 사람들의 힘은 사료가 증언한다. 다만 그 승리가 어디로 흘러가 무엇으로 바뀌었는지, 이긴 전쟁의 청구서가 누구에게 어떻게 도착했는지를 따라가 본다.
이긴 것은 성이었다, 체제가 아니라
644년, 신라를 압박하던 고구려에 당은 사신을 보내 공격을 멈추라고 요구했다. 『삼국사기』는 연개소문이 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전한다.3 당 태종은 반대 여론을 무릅쓰고 원정을 결심했고, 645년 4월 이세적이 이끄는 선봉이 요하를 건너며 전쟁이 시작되었다.4
당군은 개모성, 비사성, 요동성, 백암성을 차례로 함락하고 6월 20일 안시성 앞에 이르렀다.4 여기에 흔히 지나치는 대목이 있다. 안시성 앞에서 벌어진 첫 대규모 전투는 성벽 위가 아니라 성 밖 산자락에서 치러졌고, 그 전투에서 이긴 쪽은 당군이었다. 성을 구하러 온 고구려 구원군 약 15만 명이 격파된 것이다.5 일부 연구자는 이 15만 명이 수도 평양의 방어까지 고려하지 않은 이례적인 규모의 투입이었다고 본다.
그 뒤 안시성은 홀로 남았다. 당군은 7월부터 약 60일 동안 연인원 50만 명이 동원된 토산 공사로 성벽을 넘으려 했으나 성을 함락하지 못했고, 태종은 9월 18일 군을 거두었다.5 같은 연구는 시선을 한 번 돌려 보자고 제안한다. 연개소문이 북방의 유목 세력 설연타에 구원을 청했고, 그 움직임이 당의 수도권을 위협할 수 있는 변수였다면 어땠을까. 태종의 철군에는 안시성 바깥의 사정도 겹쳐 있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5
이 전쟁의 결과를 단계로 놓으면 이렇게 읽힐 수 있다. 중앙이 보낸 야전군은 패했고, 요동의 여러 성은 떨어졌으며, 성 하나가 버텼고, 바깥의 변수가 시간을 벌어 주었다. 그것은 분명한 승리였다. 그러나 그것이 한 체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옳았다는 증명서는 아니었다. 성 하나가 버틴 일과 체제가 옳았다는 일은 서로 다른 명제였다.
그러나 정치는 명제를 구별해 주지 않는다. 연개소문이 이 승리를 어떻게 활용했는지를 사료가 직접 말해 주지는 않는다. 다만 이후의 행적은 선명하다. 연개소문은 666년 죽을 때까지 24년 동안 막리지의 자리를 지켰다. 그 기간에 그의 권력을 제도로 견제한 장치는 사료에서 확인하기 어렵다.6
당의 압박은 태종이 죽은 뒤에도 이어졌다. 647년과 648년에 소규모 원정이 있었고, 고종 때인 655년 이후 침공이 재개되었다. 660년 백제가 무너진 뒤인 661년에는 평양 방면으로 대군이 향했고, 연개소문은 662년 사수 전투 등에서 이를 막아냈다.7 승리는 반복되었고, 그만큼 한 사람에 의존하는 방어 체제는 굳어졌다.
그러나 666년 연개소문이 죽자 맏아들 남생이 자리를 이었고, 동생 남건·남산과의 다툼 끝에 남생은 당에 투항했다. 이 내분을 파고든 당·신라 연합군은 668년 평양성을 함락했다.8 안시성에서 평양성까지는 23년이었다.
정변은 닮았고, 뒤처리는 달랐다
7세기 전반, 유라시아의 동쪽과 서쪽 끝에서 비슷한 궁정 정변이 잇따랐다. 칼끝이 향한 곳은 서로 달랐고, 정변 뒤에 사람들이 한 일은 더 달랐다.
첫째는 626년 당이다. 훗날 태종이 되는 이세민이 장안 궁성의 북문 현무문에서 형인 태자와 아우를 제거하고 곧 제위에 올랐다.9 정당성만 따지면 연개소문보다 나을 것이 없는 출발이었다. 그러나 태종은 직언하는 신하를 곁에 두는 일을 통치의 방식으로 삼았다고 평가받는다. 위징이 그 대표다.
둘째는 645년 일본이다. 그해 6월 궁중에서 나카노오에 황자와 나카토미노카마타리가 당시 조정을 쥐고 있던 유력 가문 소가씨의 소가노 이루카를 살해했다.10 『일본서기』에 따르면 이듬해 개신의 조가 선포되어 토지와 백성을 공적 지배 아래 두는 방향의 국가 재설계가 시도되었다. 그 개혁이 기록처럼 빠르고 전면적이었는지는 학계에서 논쟁이 있다. 다만 정변 직후 “무엇을 새로 지을 것인가”를 선포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당이 고구려를 치던 바로 그 해의 일이어서, 대륙의 팽창이 열도의 정변과 무관하지 않았다고 보는 해석도 있다.
셋째는 642년 고구려다. 연개소문은 왕을 제거하고 새 왕을 세웠으나, 정변을 정당화할 제도를 새로 짓기보다 한 사람의 위력으로 권력을 유지한 것으로 읽힌다. 열전은 그가 몸에 칼 다섯 자루를 차고 다녔고, 말을 타고 내릴 때 귀인과 무장을 땅에 엎드리게 해 발판으로 삼았다고 전한다.11
넷째는 같은 642년, 대륙의 서쪽 끝 서고트 왕국이다. 그해 4월 여든에 가까운 귀족 칸다스빈토가 왕 톨가를 몰아내고 즉위했다.12 그 역시 칼로 시작했다. 반란이 일어나기도 전에 명문 귀족 200여 명과 하급 귀족 500여 명을 재판 없이 처형하고 재산을 몰수했다고 전해진다. 대신 100여 명을 벤 연개소문의 정변과 같은 문법이다.
그러나 그는 숙청에서 멈추지 않았다. 646년 톨레도 공의회가 이 조치를 추인해 교회의 보증을 얻었고, 주교 브라울리오와 함께 고트인과 로마계 주민 모두에게 적용되는 법전의 편찬에 착수했다. 649년에는 아들 레케스빈토를 공동왕으로 세웠고, 법전은 아들 대인 654년에 완성되었다. 정변을 칼의 사건으로 남겨 두지 않고 절차의 사건으로 바꾸려 한 시도로 읽힐 수 있다.
네 정변을 나란히 놓으면 갈림길이 보인다. 당은 율령과 직언의 통로를 정비하는 쪽으로, 일본은 토지와 백성을 공적으로 묶는 재설계를 시도하는 쪽으로, 서고트는 교회의 추인과 법전과 공동왕 책봉으로 정변을 절차에 묶는 쪽으로 나아갔다. 고구려는 제도가 앉을 자리에 한 사람의 위력을 앉혔다고 읽힌다.
물론 절차를 지으려 했다고 정변의 문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서고트 왕국도 이후 왕위를 둘러싼 갈등이 되풀이되다 711년에 무너졌다.13 물어야 할 것은 제도가 있었느냐가 아니라, 그 제도가 사람이 바뀐 뒤에도 작동했느냐다.
여기에 흥미로운 대칭이 하나 있다. 태종은 안시성에서 물러나며 “위징이 살아 있었다면 이번 원정을 막았을 것”이라고 탄식했다고 전한다.14 위징은 643년에 죽었다. 정변 뒤 직언의 통로를 열어 두었던 황제조차 그 통로가 사람과 함께 사라지자 무리한 원정에 나섰다는 이야기다. 견제가 제도가 아니라 사람에게 얹혀 있으면, 사람이 사라지는 날 견제도 사라진다. 정변의 수명은 칼을 잡은 날이 아니라, 칼을 내려놓는 방식이 정한다.
이 지점에서 맹자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天時不如地利,地利不如人和。(천시불여지리,지리불여인화。) “하늘의 때는 땅의 이로움만 못하고, 땅의 이로움은 사람의 화합만 못하다.”15
맹자는 성이 높고 해자가 깊고 무기가 날카롭고 곡식이 넉넉해도, 사람이 떠나면 그 성은 지켜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안시성은 험한 지형이라는 지리(地利)와 성민이 하나로 버틴 인화(人和)가 겹친 곳이었다. 그런데 연개소문의 체제는 이 승리를 인화를 쌓는 제도가 아니라 한 사람의 위력을 증명하는 근거로 환산한 것으로 읽힐 수 있다. 지리는 한 번의 전쟁을 이기게 하지만, 인화는 한 세대를 건너는 힘이다.
『주역』은 같은 문제를 반대편에서 짚는다.
君子安而不忘危,存而不忘亡,治而不忘亂。(군자안이불망위,존이불망망,치이불망란。) “군자는 편안할 때 위태로움을 잊지 않고, 존립할 때 망함을 잊지 않으며, 다스려질 때 어지러움을 잊지 않는다.”16
포위가 풀린 날은 편안함과 존립과 안정이 한꺼번에 찾아오는 날이다. 이 문장은 바로 그날이 가장 위태로운 날임을 일러 준다.
철학은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승리가 정당성을 대출해 줄 때
안시성 이후 고구려가 걸은 길은 한 장의 대출 장부와 닮았다. 외부의 승리는 내부의 결함을 고치지 않고 덮는다. 덮인 결함에는 이자가 붙고, 이자는 어느 날 청구서가 되어 도착한다.
그 장부는 세 줄로 읽을 수 있다. 첫째, 승리가 정당성을 빌려준다. 정변의 절차적 결함을 묻는 목소리는 “그래서 나라를 지키지 않았는가”라는 한 문장 앞에서 힘을 잃는다. 둘째, 이자가 붙는다. 잘 되고 있는 일의 규칙을 왜 바꾸느냐는 말이 힘을 얻고, 승계와 견제처럼 어렵고 정치적 비용이 큰 일이 뒤로 밀린다. 밀린 일은 사라지지 않고 불어난다. 셋째, 청구서가 도착한다. 대개 가장 취약한 순간에, 한꺼번에 온다.
『삼국사기』 열전은 연개소문이 죽기 전 아들들에게 형제가 물과 물고기처럼 화합하고 벼슬을 다투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전한다.17 규칙이 아니라 당부에 기댄 승계였다. 666년 한 사람의 죽음이 곧바로 형제의 내분과 투항으로 번진 것은, 그 한 사람이 규칙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읽힐 수 있다. 승리는 결함을 고치지 않고 덮으며, 덮인 결함에는 이자가 붙는다.
1,380여 년 전 요동의 성벽 아래에서 일어난 일은 유물이 아니라 문법이다. 이긴 뒤에 무엇을 고치지 않는가 하는 문법은 지금의 제도와 정치 속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이 글이 현재를 평가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같은 문법이 읽히는 장면 몇 가지를 놓아 본다.
지금 국회에서는 10월 6일 시작된 국정감사가 한창이다. 첫 주 대법원 국감부터 대법원장의 증인 채택 방식을 두고 여야가 정면으로 맞섰고, 발언권 정지와 피켓 시위, 퇴장이 이어졌다.18 국감을 나흘 앞둔 10월 2일 검찰청이 공식 폐지된 뒤여서, 여당은 개혁의 완성을, 야당은 수사 공백과 부실 수사의 우려를 말한다.19 2027년 예산안도 같은 구도다. 정부는 역대 최대인 820조 9천억 원 규모로 편성하면서, 국가채무가 늘어도 경제 규모 대비 비율은 낮아진다고 설명한다. 야당은 국회 통제 밖의 미래대응기금 여유 자금까지 합쳐 보아야 실제 규모가 드러난다고 반박한다.20
어느 설명이 옳은지는 이 글이 가릴 일이 아니다. 다만 두 진영이 서로 다른 숫자를 들고 같은 질문에 답하고 있다는 사실은 남는다. 이겼다는 사실과 규칙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은 다른 일이며, 둘을 같은 것으로 착각하는 순간부터 청구서가 쌓인다.
성벽 안쪽에서 아직 정하지 못한 것
안시성의 성벽은 바깥에서 오는 힘을 막기 위해 쌓은 것이었고, 제 몫을 다했다. 그러나 나라를 오래 서 있게 하는 것은 성벽이 아니라 성 안의 규칙이다. 누가 권력을 이어받는가, 누가 권력을 견제하는가, 이긴 자는 이긴 뒤에 무엇을 내려놓는가. 이 질문들은 포위가 풀린 날부터 시작된다.
안시성주의 이름은 1차 사료에 남아 있지 않다. 후대의 이야기가 그에게 양만춘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나 그것은 사료가 아니라 전승의 몫이다.21 이름 없는 성민들이 지켜 낸 승리가 이름 있는 한 사람의 체제를 굳히는 데 쓰였다고 읽힐 수 있다. 나라가 무너지면 그 값은 이름 없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치른다. 역사는 이 일을 거의 예외 없이 보여 준다.
우리는 오늘 어떤 승리를 기념하고 있는가. 그 승리 속에서 아직 고치지 않은 규칙은 무엇인가. 바라보는 자의 기록은 이긴 날의 환호 대신, 이긴 날 이후에 무엇이 쌓이는지를 멀리서 바라본다.
오늘의 성벽, 날짜가 먼저인가 조건이 먼저인가
한미연합사령관을 겸하는 주한미군사령관 제이비어 브런슨은 10월 14일(현지시간) 워싱턴 연설에서 “나는 전작권 전환 찬성론자”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여건이 변했고 우리가 우리의 계획을 바꿨기 때문에 우리가 지켜야 할 ‘새로운 기준’이 생겼다”고 덧붙였다.22 보도에 따르면 그는 북한의 잇단 미사일 발사를 변화의 근거로 들었고, 시간 그 자체도 하나의 조건이라는 취지로 말했다.22 북한의 러시아 파병과 병참선 구축 등 한반도 주변 안보 환경의 변화도 그 배경으로 전해진다.22
서울의 시각은 다르다. 한국 측은 합의된 조건이 충분히 충족되었다는 입장으로 알려져 있고, 정부는 2015년에 합의한 ‘조건에 기초한 전환’ 원칙을 유지하면서 임기 내 전환을 목표로 하고 있다.23 어느 쪽 평가가 옳은지는 이 글이 가릴 일이 아니다. 다만 같은 합의문을 두고 한쪽은 “충족되었다”, 다른 쪽은 “기준이 달라졌다”고 말하는 장면에서, 앞서 읽은 장부의 문법이 다시 보인다.
안시성에서 당군이 물러난 뒤에도 위협은 사라지지 않았다. 당은 647년부터 침공을 되풀이했다.7 위협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형태를 바꾸어 돌아온다. 조건이 충족되었는가는 날짜가 아니라 능력이 답한다. 날짜를 먼저 정하고 조건을 맞추어 가는 순서가 되면 일정이 목적을 대신하기 시작하고, 반대로 문턱이 계속 옮겨지면 어떤 날짜에도 닿지 못한다. 두 위험은 뿌리가 같다. 합의가 문서에는 있으나 검증의 규칙으로 완성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방어 체제의 결함은 평시에는 보이지 않다가 가장 취약한 순간에 청구서로 도착한다. 그 값은 회담장에서 날짜를 다투던 사람들이 아니라, 전선 가까이에서 일상을 사는 이름 없는 사람들이 먼저 치른다. 성벽은 날짜로 쌓이지 않는다. 합의된 조건과 검증된 능력으로 쌓인다.
* 참고할 말씀: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헛되도다’ — 시편 127:1
고구려 시리즈 · 5부 재편기 “살아남는 자의 전략”
① 문자명왕 · 491년
정점 다음 날의 정치 — 문자명왕의 고구려
② 안원왕·양원왕, 계승전쟁 · 545년
왕이 눕자, 귀족들이 칼을 뽑았다
③ 평원왕, 장안성 천도 · 559~590년
제국이 문을 두드릴 때, 고구려는 도읍을 옮겼다
④ 영양왕, 살수대첩 · 612년
백만 대군은 어떻게 이천칠백 명이 되었나
⑤ 영류왕·연개소문 정변 · 642년
천리장성을 쌓던 자가 왕을 베었다
⑥ 보장왕, 안시성 · 645년
성은 지켰으나, 승리가 나라를 먹었다 ▶ 지금 읽고 계신 글
1. 안시성 철군 시 비단 100필 하사: 『신당서』 권220 고려전, 『삼국사기』 권21 고구려본기 보장왕 4년(645) 조, 『자치통감』 정관 19년 조.
2. 642년 정변과 막리지 집권: 『삼국사기』 권21 보장왕 즉위년 조, 권49 열전 개소문.
3. 644년 당 사신의 신라 공격 중지 요구와 연개소문의 거부: 『삼국사기』 권21 보장왕 3년(644) 조.
4. 645년 전쟁 경과(요하 도하, 개모·비사·요동·백암성 함락, 6월 20일 안시성 도착): 『삼국사기』 권21 보장왕 4년 조, 『자치통감』 정관 19년 조.
5. 주필산 전투, 토산 공사(약 60일, 연인원 50만), 9월 18일 철군, 설연타 변수: 「駐蹕山 전투와 安市城」(학술논문).
6. 연개소문의 집권 기간과 사망(666년): 『삼국사기』 권49 열전 개소문, 권22 보장왕 하.
7. 647~662년 당의 침공과 662년 사수 전투: 『삼국사기』 권22 보장왕 하, 권49 열전 개소문.
8. 666년 연개소문 사망, 남생의 투항, 668년 평양성 함락: 『삼국사기』 권22 보장왕 하, 권49 열전 개소문.
9. 626년 현무문의 변: 『구당서』 태종본기, 『자치통감』 당기(唐紀).
10. 645년 을사의 변과 이듬해 개신의 조: 『일본서기』 고교쿠 4년, 다이카 2년 조.
11. 연개소문의 위세 묘사: 『삼국사기』 권49 열전 개소문, 『신당서』 고려전.
12. 642년 칸다스빈토의 즉위(4월)와 숙청, 646년 제7차 톨레도 공의회의 추인, 법전 편찬 착수와 654년 완성, 649년 공동왕 책봉: Roger Collins, Visigothic Spain, 409–711 (Blackwell, 2004). 숙청 인원은 후대 연대기의 전승 수치이다.
13. 서고트 왕국의 멸망(711년): Roger Collins, Visigothic Spain, 409–711.
14. 태종의 위징 탄식: 『자치통감』 정관 19년 조.
15. 『맹자』 「공손추 하」 1장.
16. 『주역』 「계사하전」.
17. 연개소문의 유언: 『삼국사기』 권49 열전 개소문.
18. 이재명 정부 2년 차 국정감사 초반 법사위·재경위 충돌: 뉴시스·파이낸셜뉴스 2026.10.9. 보도, YTN 2026.10.10. 보도.
19. 검찰청 공식 폐지(2026.10.2.)와 국감 쟁점: 머니투데이 2026.9.27. 보도, SBS Biz 2026.10.12. 보도.
20. 2027년도 예산안: 총지출 820조 9천억 원(전년 대비 12.8% 증가), 국가채무 106조 원 증가, 국내총생산 대비 채무비율 51.6%에서 48.3%로 하락(정부·여당 설명). 야당(국민의힘 예결위원)은 미래대응기금 여유 자금 104조 4천억 원을 합산하면 실질 증가율이 27.1%(925조 3천억 원 규모)라고 주장. 재정경제부 2027년도 예산안 자료(KDI 경제교육·정보센터 게재, 2026.9.), 파이낸셜뉴스 2026.9.2. 보도, 데일리안 2026.9.1. 보도.
21. 안시성주 이름: 『삼국사기』에는 성주의 이름이 없으며, 양만춘이라는 이름은 후대 연의류 전승에서 유래한다는 논의가 있다. 임기환, 2020.
22. 브런슨 주한미군사령관의 골드 국제전략연구소 행사 발언(2026.10.14.): 파이낸셜뉴스 2026.10.15. 보도, 코리아헤럴드 2026.10.15. 보도, 뉴스핌 2026.10.14. 보도, 서울신문 2026.10.16. 사설(사설은 논평으로 구분).
23. 전작권 전환 조건과 정부 입장: 뉴스핌 2026.10.14. 보도, 파이낸셜뉴스 2026.10.15. 보도, 코리아헤럴드 2026.10.15.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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