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눕자, 귀족들이 칼을 뽑았다

안원왕 말년 고구려 궁문 앞 두 외척 세력의 군사적 대치와 북소리 장면 (6세기 고구려 역사)
6세기 고구려 안원왕 병석 무렵, 궁문 앞에서 사흘간 이어진 두 외척 세력의 권력 투쟁과 대치 현장.

왕이 눕자, 귀족들이 칼을 뽑았다

안원왕·양원왕 시대, 안에서 먼저 금이 간 고구려

2026.10.09 · 역사 · 한국사


궁문 앞에서 북소리가 사흘 울렸다

왕이 위독하다는 소식이 돌자 궁성은 더 이상 왕의 집이 아니었다. 『일본서기』가 인용한 『백제본기』에 따르면¹, 안원왕이 병석에 누운 545년 무렵 고구려의 두 외척 세력이 궁문 앞에서 맞붙었다. 북을 울리며 싸운 군사들은 사흘이 지나도록 병장기를 거두지 않았고, 패한 쪽은 자손까지 모조리 붙잡혀 죽었다. 같은 책은 이 소동으로 죽은 사람이 2천여 명이었다고 적는다.

사연은 단순했다. 안원왕에게는 정부인이 낳은 아들이 없었고, 중부인과 소부인이 각각 아들을 낳았다. 두 왕자의 외가는 추군(麤群)과 세군(細群)으로 갈렸고, 왕이 숨을 거두기도 전에 승부를 보려 했다. 이긴 쪽은 추군이었고, 중부인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그가 양원왕이다.

『삼국사기』는 이 사건을 자세히 전하지 않는다.² 고구려 자신의 사서가 말을 아낀 상처를 이웃 나라의 기록이 대신 붙들어 둔 셈이다. 이 장면이 바깥의 눈을 통해서만 남았다는 점부터 조심스럽게 읽어야 한다.

그래도 이 기록이 맞다면 눈여겨볼 대목은 숫자보다 시점이다. 칼은 왕이 죽은 뒤가 아니라 죽기 직전에 뽑혔다. 왕좌가 비기를 기다리지 않고 비어 가는 순간을 먼저 차지하려 했다는 뜻이다. 그 앞당겨진 시점이 안원왕 말년 왕권의 실상을 말해 준다.

같은 시대의 광장, 다른 결말

앞선 글에서 우리는 정점을 지난 뒤의 고구려, 문자명왕의 시대를 살펴보았다. 정점에서 내려오는 길목에서 틈은 어디서 먼저 벌어지는가. 이번 편은 왕권이 바깥이 아니라 안에서 먼저 시험받는 자리에서 시작한다.

같은 시기 지중해 건너편의 비잔티움, 곧 동로마 제국에서도 도시의 칼이 뽑혔다. 비잔티움은 로마 제국이 동서로 갈라진 뒤 오늘날 이스탄불에 해당하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도로 삼아 이어 간 나라다. 이 도시에는 히포드롬이라는 거대한 전차 경기장이 있었고, 시민들은 경주를 응원하는 청색당과 녹색당으로 갈려 있었다. 이 응원단은 단순한 팬 모임이 아니라, 도시의 불만을 대신 터뜨리는 정치 세력이기도 했다.

532년 1월, 평소 서로 으르렁대던 두 파가 손을 잡았다. 함께 겨눈 상대는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의 측근 관료들이었다. 세금과 법 집행을 맡은 이들에 대한 분노가 쌓여 있었다고 전해진다. 군중은 ‘니카’, 곧 “승리하라”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이 구호가 훗날 반란의 이름이 되었다.

불길은 순식간에 번져 대성당을 포함한 도시 상당 부분이 탔다. 처음에는 측근들을 내쫓으라는 요구였지만, 곧 황제 퇴위 요구로 커졌다. 반란 세력은 선황의 조카를 새 황제로 세우려 했다. 동시대 역사가 프로코피오스는 황제가 도피를 고민할 만큼 상황이 위태로웠다고 전한다.³

이때 황후 테오도라는 도망치느니 황제의 자줏빛 옷을 입은 채 죽겠다며 맞섰다고 전해진다. 문구는 전승마다 다르다. 다만 그 장면이 남긴 인상은 한결같다. 위기의 한복판에서 누군가는 결단을 앞세웠다는 것이다.

결말은 진압이었다. 황제의 장군 벨리사리오스 등이 경기장에 모인 군중을 포위해 쓸어냈고, 프로코피오스는 희생자를 3만 명이라 적는다. 이 수치는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 그 뒤였다. 반란이 꺼지자 황제의 권위는 한 곳으로 모였다. 이듬해 벨리사리오스는 곧바로 바다를 건너 북아프리카의 반달 왕국을 쳤고, 534년 그 왕국은 무너졌다. 이어 535년에는 이탈리아의 동고트 왕국으로까지 칼끝을 돌렸다. 안의 불을 끈 힘이 그대로 바깥으로 향한 것이다.

고구려의 사정은 달랐다. 내분은 승부가 났지만, 이후 기록에서 왕권이 곧바로 단단해졌다고 읽을 만한 대목은 드물다. 오히려 안에서 칼이 오간 뒤 몇 해 사이에 바깥의 압력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547년 고구려는 백암성을 고쳐 쌓고 신성을 수리하며 북쪽 방비를 챙겼다. 그러나 551년의 압력은 두 방향에서 동시에 왔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북쪽에서는 돌궐이 신성과 백암성을 공격했고, 남쪽에서는 신라가 죽령 이북 고현 이내의 10군을 차지했다. 고구려는 장군 고흘이 1만 군사로 돌궐을 막아냈으나, 같은 해 『일본서기』는 백제가 한강 하류의 옛 땅을 되찾았다고 전한다. 북에서는 돌궐이, 남에서는 신라와 백제가 한꺼번에 밀려든 해였다. 기록마다 세부는 다르지만, 한 해 사이에 남북 두 전선이 동시에 열렸다는 큰 틀은 같다.⁴

동아시아의 중심부도 안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534년 북위는 동위와 서위로 갈라졌고, 548년에는 동위에서 양나라로 넘어온 장수 후경이 반란을 일으켜 이듬해 수도 건강을 함락했다. 양 무제는 그 와중인 549년에 세상을 떠났다.⁵ 중원이 갈라진 시기는 고구려에게 바깥을 돌아볼 여유를 주는 때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여유를 쓰려면 안쪽의 문이 닫혀 있어야 했다.

좀이 슨 나무, 틈이 난 담장

한비자는 「망징(亡徵)」 편에서 나라가 망하는 조짐을 하나하나 따져 묻는다. 그 서두의 비유가 이 장면과 겹친다.

“나무가 부러지는 것은 반드시 좀이 먹어 들어간 곳에서이고, 담이 무너지는 것은 반드시 틈이 벌어진 곳에서이다. 그러나 나무에 좀이 슬어도 거센 바람이 없으면 부러지지 않고, 담에 틈이 있어도 큰비가 없으면 무너지지 않는다.” —『한비자』「망징」⁶

이 비유는 양쪽으로 읽어야 한다. 좀과 틈만으로 나무가 부러지지는 않지만, 바람과 비만으로 부러지는 것도 아니다. 551년의 돌궐과 나제 양국의 움직임이 거센 바람과 큰비였다면, 545년 궁문 앞의 사흘은 좀이 먹어 들어간 자리였다. 둘 중 어느 쪽이 결정적이었는지는 쉽게 말할 수 없다. 다만 바람이 불 때 어디가 먼저 꺾이는지는 안에서 이미 정해져 있었다고 읽을 수 있다.

맹자는 같은 이치를 도덕의 언어로 말했다.

國必自伐(국필자벌), 而後人伐之(이후인벌지)。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를 친 뒤에야 남이 와서 친다.” —『맹자』이루 상⁷

이 문장을 법칙처럼 읽을 필요는 없다. 다만 하나는 짚어 둘 수 있다. 고구려 궁문 앞의 사흘이 백제의 기록에 이렇게 구체적으로 남았다는 사실은, 이웃이 그 안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다. 그리고 몇 해 뒤 같은 이웃이 군사를 움직였다.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3권에서 코르키라의 내전을 서술하며 비슷한 현상을 기록했다.⁸ 내분이 길어지자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말의 통용되던 뜻을 바꾸었다. 무모함은 동지를 위한 용기로, 신중함은 비겁의 다른 이름으로 불렸고, 충성은 나라에서 당파로 옮겨 갔다. 말이 이렇게 오염되면 ‘나라를 위해서’라는 말은 누구의 이익에도 붙을 수 있는 이름표가 된다. 추군과 세군이 궁문 앞에서 맞섰을 때 그들이 충성한 대상이 나라였는지 외가였는지는 사료가 말해 주지 않는다. 다만 그 물음이 성립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하나의 징후다.

철학은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이긴 쪽이 치른 대가

내분의 승자는 승리를 왕권으로 바꾸지 못하면 부채를 진다. 추군은 이겼지만 그 승리는 외척 세력이 만든 것이었고, 왕은 그 위에 얹힌 존재가 되기 쉽다. 이런 구조에서 외부 위기는 왕 한 사람의 판단이 아니라 이긴 세력들의 합의를 거쳐야 대응할 수 있다. 내부의 승부를 끝내는 데 쓴 힘만큼, 바깥의 위기를 막을 힘은 줄어든다.

일부 연구자는 이 시기를 왕 중심의 집권 구조가 귀족 연합의 정치로 기울어 가는 길목으로 본다. 훗날 중국 쪽 사서는 고구려의 최고 관직인 대대로를 왕이 임명하지 않고 유력자들이 힘으로 다투어 차지하는 자리로 전한다.⁹ 왕권이 약해진 자리에 관직을 두고 겨루는 귀족들이 들어선다는 점에서, 궁문 앞의 사흘이 한 번의 사고가 아니라 구조의 첫 징후였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557년 환도성의 간주리가 모반했다가 처형되었다고 『삼국사기』는 짧게 적는다.¹⁰ 환도성은 옛 도읍 국내성 일대의 거점이다. 한편 양원왕은 552년 평양에 장안성을 쌓기 시작했고, 도읍이 실제로 옮겨 가는 것은 평원왕 대인 586년이다. 장안성은 궁성과 시가지를 하나의 성벽 안에 묶은 도성이라는 평가가 있다. 옛 도읍에 뿌리 내린 세력과 거리를 두려는 흐름으로 읽힐 수 있고, 한 번 틈이 벌어진 나라가 몸의 구조부터 다시 짜려 한 시도로도 읽힌다. 위기 이후의 고구려는 무너진 것이 아니라 중심을 옮기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그 방식에 수십 년이 걸렸다는 점이 이 시기가 치른 비용이다.

비잔티움과 고구려의 차이는 위기의 크기가 아니라 위기 뒤의 방향이었다. 한쪽은 안의 불을 끈 힘을 바깥으로 돌렸고, 다른 쪽은 안의 불씨를 다스리는 데 오랜 세월을 썼다. 같은 내분도 한 번에 끝나는 사건이 있고, 시간을 두고 번지는 구조가 있다.

틈은 바람이 불기 전에 보인다

바람은 늘 밖에서 오지만 틈은 언제나 안에서 먼저 생긴다. 안원왕의 궁문 앞에서 북소리가 울리던 순간, 이웃은 이미 그 소리를 적고 있었다.

궁문 앞의 북소리는 6세기의 유물이 아니다. 안쪽의 승부에 온 신경을 빼앗긴 사회는 밖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을 감지하는 피부 감각마저 무뎌지기 마련이다.

국정 최고 책임자의 지지율이 휘청이고, 수사와 치안을 책임져야 할 사정 기관의 수장 자리가 대행으로 채워진 채 국무회의 테이블에 앉는 전례 없는 국정 풍경이 펼쳐진다. 삼권분립의 한 축이어야 할 대법원장마저 국회 청문회장의 벼랑 끝으로 불러내 망신을 주는 정치적 다툼이 일상화되는 사이, 국가를 떠받치는 제도의 기둥에는 미세한 금이 가고 있다.

내부의 주도권 다툼이라는 열병에 몰두하는 동안, 외부의 경고음은 가려진다. 휴전선 부근에서 연이어 음습한 지뢰 소식이 들려오며 안보의 틈새가 흔들리고, 우방국과의 동맹 전선에서는 국정원 요원의 입국마저 거부당하는 전대미문의 신호가 켜졌다. 그럼에도 사회적 논의는 여전히 안쪽의 승패와 당파적 이익을 셈하는 소음 속에 갇혀 있는 듯 보인다. 서로를 향해 칼을 뽑아 드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인구 수축과 안보 지형의 재편, 글로벌 통상 환경의 거센 풍랑을 막아서야 할 국정의 방패는 얇아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어느 한쪽만의 실책이라기보다, 내분에 눈이 가려 외풍을 잊은 사회가 공통으로 치르는 구조적 대가일지 모른다.

우리는 지금 어떤 틈을 서로의 잘못으로만 부르고 있는가. 바람이 불기 전에 틈을 보는 일, 멀리서 보아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는 말은 그런 뜻이다. 바라보는 자의 기록이 이 장면을 남기는 이유도 같다.


* 참고할 말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고’ — 마태복음 12:25

¹ 『日本書紀』 欽明天皇 6~7년(545~546)조가 인용한 『百濟本記』. 사료 간 연도 표기에 차이가 있어 ‘545년 무렵’으로 적었다.

²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안원왕·양원왕조.

³ 프로코피오스, 『전쟁사』 1권 24장(니카 반란, 희생자 수 포함). 희생자 수는 과장 가능성이 있다.

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양원왕 3년·7년조, 신라본기 진흥왕 12년조(거칠부), 『일본서기』 흠명천황 12년조. 기록마다 세부가 다르다.

⁵ 북위의 분열(534년)과 후경의 난(548~549년)은 『위서』·『양서』·『자치통감』 등에 전한다.

⁶ 『韓非子』 「亡徵」.

⁷ 『孟子』 「離婁上」.

⁸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3권 82~84장.

⁹ 『구당서』·『신당서』 고구려전의 대대로 관련 기록.

¹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양원왕 8년·13년조, 평원왕 28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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