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장성을 쌓던 자가 왕을 베었다

642년 고구려 천리장성 성벽 위에서 평양성 연회장을 바라보며 칼을 잡고 있는 연개소문 장군의 모습
642년 천리장성 축조 현장과 정변 직전의 평양성을 배경으로 한 연개소문 장군

천리장성을 쌓던 자가 왕을 베었다

영류왕·연개소문 정변, 그리고 국가가 진로를 두고 갈라서는 방식

2026. 10. 16. · 역사 · 한국사 · 5부 재편기 · 고구려 ⑤ · Watchman


성벽을 감독하던 자가 열병식을 열었다

642년, 평양성 남쪽에 술과 음식이 차려졌다. 연개소문이 군사를 사열한다는 명분으로 대신들을 불러 모은 자리였다.¹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 자리에 모인 대신 백여 명이 목숨을 잃었고, 연개소문은 곧장 궁으로 달려가 영류왕을 시해했다. 왕은 몸이 여러 토막으로 잘리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고 전한다.²

이 장면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겹침이 있다. 연개소문은 당시 천리장성 공사를 감독하던 사람이었다. 부여성에서 발해만 쪽 비사성까지 이어지는 이 방어선은 당의 압박에 맞서 631년에 쌓기 시작한 것이다.³ 밖을 향해 쌓던 벽의 책임자가 그 벽의 주인을 베었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612년 살수에서 수의 대군이 무너지는 장면을 살펴보았다. 고구려 원정의 실패가 큰 부담으로 남은 채 수는 618년에 무너졌고, 같은 해 당이 들어섰으며, 고구려에서는 영류왕이 즉위했다. 이번 글은 그 뒤 스물네 해, 거대한 제국의 침공을 막아낸 나라가 이번에는 안쪽에서 갈라지는 대목을 다룬다.

이 사건은 흔히 충신의 결단 아니면 역신의 반역으로 닫힌다. 어느 쪽으로 닫아도 구조는 가려진다. 이 글은 두 사람의 선악을 가리는 대신, 나라가 진로를 두고 갈라설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읽는다.

같은 십 년, 동아시아의 궁정은 모두 칼 앞에 서 있었다

영류왕의 노선부터 보자. 그는 618년 즉위했고, 624년 당의 책봉을 받았으며, 640년에는 태자 환권을 당에 보내 입조시키고 고구려 사람들이 당의 국학에서 배울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했다.⁴ 그러면서 631년 당의 사신이 수와의 전쟁 승전 기념물인 경관을 허물자 곧 장성을 쌓기 시작했다. 머리를 숙이면서 문을 잠그는 이중의 길이었다.

연개소문에 대해서는 사서가 전하는 바가 단편적이다. 아버지가 죽은 뒤 그의 지위 승계를 두고 귀족들이 반발했고, 왕과 대신들이 그를 제거하려 했다는 서술이 있다. 영류왕이 그에게 장성 공사를 맡긴 것도 중앙에서 떼어 놓으려는 조치로 읽는 해석이 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알력이 무엇이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는 것이 연구의 현재 위치다.⁵

대당 노선의 충돌로 보는 시각이 있고, 왕권을 되세우려는 왕과 국내계 귀족, 그리고 누대의 특권을 쥔 연개소문과 평양계 귀족의 대립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⁶ 게다가 고구려 자신의 기록은 거의 남지 않아, 우리가 아는 연개소문은 상당 부분 당과 신라, 그리고 후대의 시선을 통과한 모습이다.

같은 시기의 다른 궁정들을 나란히 놓으면 이 사건이 고구려만의 일이 아님이 보인다. 장안에서는 이미 십수 년 전에 칼이 뽑혔다. 626년 6월(음력), 궁성 북문 현무문에서 이세민이 형인 태자 이건성과 아우 이원길을 제거했고, 아버지 고조를 물러나게 하고 즉위해 태종이 되었다.⁷ 그 태종이 고구려의 정변을 개입의 명분으로 삼았다고 사서는 전한다. 신하가 임금을 죽였다는 것이 이유였다.⁸ 형제를 베고 올라선 황제가 시해를 이유로 군대를 일으킨 셈이다.

같은 시기 고구려의 이웃 나라들도 비슷한 시험을 치르고 있었다. 먼저 백제와 신라다. 641년 백제에서 무왕이 죽고 아들 의자왕이 즉위했다. 이듬해인 642년 8월, 백제 장수 윤충이 신라의 대야성을 함락시켰다. 신라로서는 큰 타격이었다.

다급해진 신라는 같은 해 겨울 김춘추를 고구려로 보내 원병을 청했다. 훗날 태종 무열왕이 되는 인물이다. 삼국사기와 김유신 열전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도와주는 대가로 죽령 서쪽 땅을 돌려 달라고 요구하며 김춘추를 붙들어 두었다. 김유신이 결사대를 이끌고 국경까지 다가오자 그제야 풀어 주었다고 한다.⁹ 정변으로 막 권력을 쥔 연개소문이 처음 마주한 외교 사안이 신라의 구원 요청이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다음 해인 643년에는 고구려와 백제가 화친을 맺고 당항성을 압박했다. 당항성은 오늘날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일대의 당성으로 비정되는 곳으로, 신라가 서해를 건너 당으로 가는 길목이었다.⁹ 신라를 사이에 두고 고구려와 백제가 손을 잡아 당과의 통로를 죄려 한 것이다.

바다 건너 일본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645년 6월(음력), 황극 천황 앞에서 권력자 소가노 이루카가 나카노오에 황자 일행의 칼에 쓰러졌다. 일본서기는 이 일이 삼한의 사신이 조공을 바치는 의식의 자리에서 일어났다고 전한다.¹⁰ 신라에서도 647년 정월, 비담과 염종이 여왕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켰다가 진압되었다.¹¹

장안, 평양, 사비, 서라벌, 아스카. 다섯 도읍에서 거의 같은 무렵 궁정이 흔들렸다. 이 연쇄를 하나의 원인으로 묶을 수는 없다. 각 나라의 사정은 저마다 달랐다. 다만 이 동시성은 한 가지를 보여 준다. 바깥의 압력이 커지는 시기에는 성벽보다 먼저 안쪽의 권력 질서가 시험대에 오른다.

신하가 임금을 베는 일, 누가 판정하는가

제나라 선왕이 맹자에게 물었다. 신하가 임금을 시해해도 되는가. 맹자는 이렇게 답했다.

賊仁者謂之賊,賊義者謂之殘,殘賊之人謂之一夫。聞誅一夫紂矣,未聞弒君也。
(적인자위지적,적의자위지잔,잔적지인위지일부。문주일부주의,미문시군야。)
“인을 해치는 자를 적(賊)이라 하고 의를 해치는 자를 잔(殘)이라 하며, 적과 잔의 짓을 하는 자는 한낱 사내(一夫)라 한다. 일부 주(紂)를 처단했다는 말은 들었으나, 임금을 시해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 맹자, 양혜왕 하

이 문장은 쿠데타를 정당화하는 논변의 가장 오래된 틀이다.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면 그를 베는 것은 시해가 아니다. 문제는 이 문장이 기준을 주면서 판정자를 지정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누가 한낱 사내가 되었는지를 정하는 사람이 칼을 든 사람일 때, 이 논변은 사후의 변명이 된다.

연개소문에게 왕을 베어야 할 이유가 있었는지는 그의 입으로 남은 기록이 거의 없어 알 수 없다. 반면 당은 같은 사건에 정반대의 판정을 내렸다. 엇갈린 두 판정을 뒷받침한 힘은 양쪽 모두 논변이 아니라 군대였다.

한비자는 질문의 방향을 바꾼다. 누가 임금다운가가 아니라, 누가 무엇을 쥐고 있는가를 묻는다.

夫虎之所以能服狗者,爪牙也。
(부호지소이능복구자,조아야。)
“호랑이가 개를 복종시킬 수 있는 까닭은 발톱과 이빨이다.” — 한비자, 이병(二柄)

이어지는 대목에서 한비자는 호랑이가 그 발톱과 이빨을 내려놓고 개에게 쓰게 한다면 도리어 개에게 복종하게 된다고 말한다. 군주의 권력은 상벌의 칼자루에 있고, 그것을 신하에게 넘기는 순간 주인이 바뀐다는 것이다.¹² 영류왕은 당의 압박 속에서 대규모 인력과 병력이 동원되는 장성 공사를 연개소문에게 맡겼다. 한비자의 눈으로 보면 이 선택은 발톱을 맡긴 일이었고, 왕이 칼자루를 되찾으려 한 시점은 이미 늦었다고 읽힐 수 있다.

맹자는 명분을 묻고, 한비자는 구조를 묻는다. 연개소문의 정변은 두 질문이 함께 있어야 읽힌다. 명분 없이 구조만 보면 칼이 왜 정당성을 얻는지 놓치고, 구조 없이 명분만 보면 왜 그 칼이 그 손에 있었는지 놓친다.

철학은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방벽을 쌓는 권력은 방벽을 닮아 간다

647년, 천리장성이 완성되었다. 삼국사기가 전하는 공사 기간은 열여섯 해, 영류왕이 죽은 지 5년 뒤였다.³ 장성을 쌓게 한 왕은 완공을 보지 못했고, 쌓던 자가 그 완공의 주인이 되었다. 한편 645년 당 태종의 대군을 막아 낸 것은 안시성이었다. 장성이 성곽들을 이어 붙인 보조 시설에 가까웠다는 견해를 따르면, 당군을 멈춘 것은 연결된 벽이 아니라 하나하나의 성과 그 성을 지킨 사람들이었다.³

정변 이후 고구려의 구조도 바뀌었다. 연개소문은 막리지 중심의 체제를 세웠고, 귀족들이 합의하던 연립 정권은 그의 정변으로 무너졌다고 평가된다.¹³ 이 대목에서 정변의 쟁점이 노선 하나만은 아니었음이 드러난다. 화친이냐 항전이냐는 가장 눈에 띄는 쟁점이었으나, 집권한 연개소문이 당에 도사를 청해 도교를 진흥한 것도 당과의 관계를 염두에 둔 조치였다는 연구가 있다.¹³ 노선이 갈린 것이라면 정변 직후 노선이 곧장 뒤집혀야 할 텐데, 사정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싸움의 쟁점이 어느 노선이냐에서 누가 노선을 정하느냐로 옮겨 가는 순간이 있다.

이것이 이 사건의 패턴이다. 외부의 위협이 클수록 나라는 빠르게 결정할 수 있는 구조를 원하게 되고, 그 속도는 합의 구조를 깎아서 얻는다. 645년의 항전은 그 구조가 낼 수 있는 가장 강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오류를 바로잡아 줄 장치가 사라진 구조는 정점에서 가장 위험하다.

연개소문이 죽은 뒤(사료마다 664~666년으로 엇갈린다) 아들들이 권력을 두고 갈라섰다. 사서가 전하는 그의 유언, 물과 고기처럼 화목하여 벼슬을 다투지 말라는 당부는 지켜지지 않았다.¹⁴ 장남 남생이 당에 투항하고 동생 정토가 신라에 투항한 끝에, 668년 9월 평양성이 함락되었다. 한 사람에게 맞춰진 구조는 그 한 사람보다 오래 버티지 못한다.

서쪽에도 선례가 있다. 193년 3월, 로마의 근위대는 황제 페르티낙스를 살해하고 제위를 경매에 부쳤다고 로마의 사가들은 전한다.¹⁵ 황제를 지키라고 맡긴 병력이 황제를 세우고 베는 권한을 쥔 것이다. 칼을 맡긴 쪽과 칼을 든 쪽 사이의 이 긴장은 언어와 시대가 달라도 같은 모양으로 나타난다.

오늘의 한국 정치도 진로를 둘러싼 말의 충돌 속에 있다. 2026년 10월 6일 시작된 국정감사에서 법제사법위원회는 대법원장의 증인 채택을 두고 부딪쳤다. 한쪽은 사법부의 판단에 쿠데타라는 말을 붙였고, 다른 쪽은 대법원장을 자리에 붙들어 두는 일을 체포·감금에 빗댔다.¹⁶ 같은 시기 국회에 넘어온 2027년도 예산안은 총지출이 820조 9천억 원, 국가채무는 1,519조 8천억 원으로 106조 원 늘어난다. 정부·여당은 국내총생산 대비 채무 비율이 51.6%에서 48.3%로 낮아진다며, 여유 재원은 세수가 줄어드는 때를 대비해 쌓아 두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반면 야당은 국회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곳에 여유 자금 104조 4천억 원이 쌓이고 있다며 문제 삼는다.¹⁷ 어느 쪽 설명이 옳은지는 이 글이 가릴 일이 아니다. 진로를 묻는 다툼이 결정권을 묻는 다툼으로 바뀌는 순간은, 어느 진영에서 보든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벽이 완성된 뒤에 남은 질문

천리장성은 끝내 완성되었다. 그러나 그 벽이 막아 낸 것과 막지 못한 것은 달랐다. 당의 대군은 막았고, 안쪽에서 벌어진 일은 막지 못했다. 벽은 바깥을 향해 세울 수 있어도, 칼이 어느 쪽을 향할지는 벽이 정하지 않는다.

오늘 우리 앞에도 같은 질문이 놓여 있다. 2026년 9월 21일 오전, 서부전선 비무장지대 군사분계선 남쪽에서 수색로를 여는 작전 중이던 육군 장병들 사이에서 폭발이 연이어 일어나 세 명이 다쳤고, 수색대대장은 발목을 잃었다.¹⁸ 합참은 사고 9일 만인 9월 30일, 폭발이 북한군의 지뢰에 의한 것이라고 밝히고 사과와 책임 있는 조치를 촉구했다.¹⁸

10월 6일 외교통일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야당은 정부의 대응이 더디다고 물었고, 조현 외교부 장관은 단호한 요구와 긴장 관리를 동전의 앞뒷면에 빗댔다. 유엔 안보리 서한 발송은 검토 중이라는 답에 머물렀다.¹⁹ 엿새 뒤인 10월 12일(현지시간) 워싱턴의 주미대사관 국정감사에서 강경화 주미대사는 한미 정보협력 문제가 미국 측 기대만큼 해소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했고, 백악관과의 소통에 한계가 있음을 시인했다.²⁰ 대사관은 이튿날 발언의 취지를 설명하는 자료를 냈다.²⁰

겉으로는 서로 다른 사건이다. 한쪽은 철책 앞에서 터진 지뢰이고, 다른 쪽은 동맹과 나누는 정보와 소통의 문제다. 그러나 두 장면이 던지는 과제는 같다. 바깥의 위협을 무엇이라 부르고, 누가 어떤 순서로 대응을 정하며, 그 판단을 동맹과 어떻게 맞출 것인가. 위협이 분명해질수록 시험받는 것은 성벽이 아니라 안쪽의 조율이다.

영류왕은 화친과 방벽을 함께 쥐려 했고, 연개소문은 그 방벽의 감독에서 출발해 나라 전체의 칼자루를 쥐었다.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노선을 걸었다고만 말하면, 칼자루가 누구의 손에 있어야 하는가라는 오래된 질문은 사라진다. 우리가 쌓는 벽은 누구를 향하고 있으며, 그 벽을 쌓는 손에 우리는 무엇을 맡겼는가.

멀리서 보아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벽 안에 서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칼의 방향이, 천사백 년 가까운 시간을 건너 바라볼 때 비로소 보인다. 그 방향을 적어 두는 일이 바라보는 자의 기록이 하는 일이다.


* 참고할 말씀: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 마태복음 26:52

¹ 『삼국사기』 권20 고구려본기 영류왕 25년조, 권49 열전 개소문조.

² 같은 기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영류왕」.

³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천리장성」. 631년 경관 파괴와 착공, 부여성~비사성 1천여 리, 16년 공사. 『삼국사기』는 영류왕의 명으로 연개소문이 642년 1월부터 감독했다고, 『삼국유사』는 연개소문의 주청으로 쌓았다고 전하며, 성곽 연결 보조시설로 보는 견해도 소개함.

⁴ 『삼국사기』 영류왕 7년(624) 당의 책봉, 23년(640) 태자 환권 입조 및 국학 입학 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영류왕」.

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영류왕」(알력 원인 불명), 「연개소문」.

⁶ 김진한, 「榮留王代 高句麗의 對唐關係와 西北方情勢」, 『정신문화연구』 32권 4호; 이화여대 대학원 학위논문 「高句麗 末 淵氏政權의 性格」.

⁷ 『구당서』, 『자치통감』 무덕 9년(626) 6월조. 월은 음력.

⁸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조, 『구당서』·『신당서』.

⁹ 『삼국사기』 신라본기 선덕왕 11년, 백제본기 의자왕 2~3년, 김유신 열전.

¹⁰ 『일본서기』 황극 4년(645) 6월조. 월은 음력(양력 7월 10일).

¹¹ 『삼국사기』 신라본기, 김유신 열전. 윤경진(2024), 「비담의 난의 성격과 김유신 서사의 재검토」, 『역사와 실학』 84는 난의 성격을 달리 해석함.

¹² 『맹자』 양혜왕장구 하; 『한비자』 이병편.

¹³ 이화여대 학위논문(각주 6); 「7세기 고구려 도교의 실상과 배경」(숙명여대 학술자료 초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연개소문」.

¹⁴ 『삼국사기』 열전 개소문조·남생 관련 기록. 사망 연도는 『일본서기』 664년, 천남생 묘지명 665년, 중국 사서와 『삼국사기』 666년으로 기록이 갈린다.

¹⁵ 카시우스 디오 『로마사』 74권, 헤로디아누스 『로마사』. 페르티낙스는 193년 3월 28일 근위병들에게 피살되었다.

¹⁶ 뉴시스, 「李정부 2년차 국감 초반 여야 충돌 심화…」, 2026.10.09.

¹⁷ 뉴데일리, 「세수 풍년에 지출부터 키운 정부…」, 2026.10.08; 시대일보 「민주당, 821조 슈퍼 예산…」, 2026.09.02; 네이트뉴스 보도(2026.09.01).

¹⁸ 위키트리, 「[속보] 군 당국 “우리 장병들 북한 지뢰로 심각한 부상…북한에 사과와 책임있는 조치 촉구”」(합참 발표 2026.9.30); 시대일보 사설, 2026.9.22.

¹⁹ 시사위크, 「[2026 국감] 대북기조 추궁받은 외교부… 독자 제재도 여전히 ‘검토 중’」(외교통일위원회 국정감사 2026.10.6); 뉴스1, 「외통위 국감 달군 北지뢰·포로 송환…여야 정부 대응 놓고 공방」.

²⁰ 뉴스핌, 2026.10.13(주미대사관 국정감사 2026.10.12 현지시간); 서울신문, 2026.10.13; 한강타임즈, 「주미대사관, 강경화 국감 발언 진화…」(대사관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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