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선 한 척이 제국을 흔들다

1695년 아라비아해에서 헨리 에브리의 해적선이 돛대가 부러진 무굴제국의 간지 이 사와이호에 접근하는 장면을 재현한 이미지
1695년 헨리 에브리 일당의 간지 이 사와이호 약탈을 묘사한 이미지. 이 사건의 여파는 무굴제국과 영국 동인도회사의 통상 관계로 번졌다.

한 번의 약탈은 어떻게 국제무역의 위기가 되는가?

바다 연재 12편 중 2편 · 해적의 황금시대 · 2026. 11. 03.
1695년 / 인도양·무굴제국 항로 / 헨리 에브리


장부에 없던 비용

약탈은 보통 피해자와 가해자의 이야기로 읽힌다. 그러나 1695년 9월 인도양의 사건은 이 구도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황제 소유의 배가 약탈당했고, 승객과 선원들이 피해를 입었다. 그 여파는 에브리의 범행에 직접 가담하지 않은 영국 동인도회사에까지 미쳤다.

제목의 ‘제국’은 한 나라의 몰락을 뜻하지 않는다. 이 사건이 흔든 것은 무굴 제국과 영국 상업 세력이 오랫동안 유지해 온 교역의 조건이었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헨리 모건의 사략 면허를 살펴보았다. 국가가 서류 한 장으로 약탈을 허가하던 시대였다. (지난 편 보기) 이번 편의 에브리는 사략 사업에 참여했다가 반란을 거쳐 해적이 된 인물이다. 그가 한 번의 습격으로 드러낸 것은 무엇을 훔쳤느냐보다, 약탈의 여파가 어디까지 번지느냐였다.

반란으로 시작된 항해

에브리가 타고 있던 배는 스페인 측 사략 사업에 참여하기 위해 라코루냐에 머물고 있었다. 출항이 지연되고 임금 지급 문제가 이어지는 가운데 1694년 반란이 일어났고, 에브리가 지휘권을 잡았다. 배 이름은 팬시(Fancy)로 바뀌었다.

이 반란에서는 임금과 보상 문제가 합법적인 사략 사업과 해적 행위 사이의 경계를 흔드는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한 사건으로 해적화의 일반 원인을 말할 수는 없다. 분명한 것은 허가의 선이 법으로 그어져 있어도, 그 선 가까이에 선 사람들에게는 보상의 현실이 훨씬 가깝게 느껴졌다는 점이다.

팬시는 대서양을 내려가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인도양으로 들어갔다. 훗날 ‘해적 항로(Pirate Round)’라 불리게 될 길이다. 목표는 해마다 홍해 입구를 지나 인도 서해안으로 돌아오는 무굴의 순례·무역 선단이었다.

1695년 9월 7일, 가장 큰 배가 뒤처졌다

에브리는 여러 해적 선장과 함께 홍해 입구 일대에서 무굴 선단을 노렸다. 25척에 이르는 선단 대부분은 밤사이 빠져나갔지만, 해적들은 뒤처진 배 두 척을 발견했다. 호위선 파테 무하메드(Fateh Muhammed)와 황제 아우랑제브 소유로 알려진 간지 이 사와이(Ganj-i-Sawai)였다.

해적들은 먼저 파테 무하메드를 약탈한 뒤 간지 이 사와이를 추격했다. 간지 이 사와이는 다수의 함포와 무장 인원을 갖춘 대형선이었다. 그러나 장비와 인원의 규모가 승패를 보장하지는 못했다. 교전 초반 돛대가 꺾이고 포가 폭발하는 사고가 겹치며 방어가 흔들렸다고 전해진다. 해적들은 배에 올랐고, 그 배에는 메카에서 돌아오던 순례객들이 타고 있었다.

전리품의 규모는 자료마다 크게 다르다. 수십만 파운드에서 최대 60만 파운드 안팎까지 언급되며, 약탈 현장의 기록이 본래 불완전하다는 점도 이 차이에 영향을 준다. 다만 두 가지는 반복해서 확인된다. 당대 해적 약탈 가운데 손꼽히는 규모였다는 점, 그리고 승객에 대한 폭력과 성폭력의 증언이 남아 있다는 점이다. 무굴 공주 이야기는 훗날 덧붙은 전설의 색채가 짙어 사실로 다루기 어렵다.

수라트의 군중, 구금된 회사 사람들

생존자들이 수라트에 도착하면서 사건은 해적 사건에서 외교 사건으로 넘어갔다. 군중이 영국 상관 주변으로 몰려들었다고 전해지며, 회사 측 기록에 따르면 처음에는 군중의 공격을 막기 위한 경비가 배치되었다. 그러나 황제 소유 선박의 피해까지 알려지자, 경비는 회사 관계자들을 가두는 통제로 바뀌었다고 한다.

황제의 명령이 어디까지 이르렀는지는 구분해서 읽어야 한다. 수라트에서 상관이 막히고 관계자가 구금되었다는 점은 비교적 분명하다. 브로치, 아그라, 아마다바드, 봄베이로 압박이 번졌다는 서술도 자주 등장하지만, 도시마다 시점과 강도는 같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무굴 측이 책임을 물을 수 있었던 접점은 해적의 출신만이 아니었다. 당시 포고문에는 해적들이 영국의 깃발을 사용했다는 내용이 있고, 현지에서 교역하던 회사의 존재도 책임을 요구할 구체적인 접점이 되었다. 이 요구는 부당한 연좌로 읽힐 수 있다. 그러나 해적은 잡을 수 없지만 같은 깃발 아래 있는 상인은 잡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권력이 책임을 묻는 방식으로서는 이해할 만한 것이었다.

시기도 회사에 불리했다. 회사는 1686년부터 1690년까지 무굴과 전쟁을 치렀는데, 이 싸움은 회사에 쓰라린 결말을 안겼다. 수라트의 상관이 압수되고 영국인들이 구금되는 일까지 겪은 끝에, 회사는 무굴 측이 내건 조건을 받아들이고서야 통상을 다시 이어 갈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에브리의 습격은 그로부터 겨우 오 년 남짓 지난 때에 일어났다. 회사로서는 가까스로 되찾은 교역의 허락을 다시 잃을 수 있는 처지였다. 무굴 황제의 허락은 장부에 적히지 않은 회사의 가장 큰 자산이었고, 회사는 그 값을 이미 한 번 비싸게 치러 본 뒤였다.

피구가 본 사적 이익과 사회적 비용

여기서 경제학자 아서 세실 피구(Arthur Cecil Pigou)를 불러온다. 피구는 『후생경제학(The Economics of Welfare, 1920)』에서 사적 순생산과 사회적 순생산이 어긋나는 상황을 구체적으로 논의했다. 외부효과를 체계적으로 설명한 고전적 논의 가운데 하나이다.

한 활동에서 개인이 얻는 순생산(marginal private net product)과 사회 전체가 얻는 순생산(marginal social net product)은 서로 어긋날 수 있다.
— 피구, 『후생경제학』(1920)의 논지 요약

여기서 피구의 개념으로 살펴볼 대상은 약탈 자체보다, 그 여파로 사건과 무관한 상인들에게 발생한 손실이다. 에브리 일행에게 약탈의 수익은 사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 여파는 닫힌 상관과 구금의 위험, 얼어붙은 교역으로 번졌다. 불신이 커지면서 교역에 참여한 이들도 부담을 떠안은 것이다.

코스(Ronald Coase)의 관점에서 다시 묻는다면, 회사에 책임을 묻는 방식이 다른 대응보다 피해를 줄이는 데 효과적이었는지를 비교해야 한다. 코스의 논의는 책임을 떠넘길 대상을 찾는 문제가 아니라 권리의 배분과 거래비용, 제도적 대응의 비용을 비교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만으로 그 답을 확정하기는 어렵다.

무굴의 압박은 회사가 영국 당국에 대응을 요구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다만 그 압박이 실제로 약탈을 얼마나 줄였는지, 사건과 무관한 사람의 구금을 정당화할 수 있는지는 별도로 살펴야 한다.

철학은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약탈의 계산서가 자국으로 돌아오다

압박은 수배와 단속 조치로 이어졌다. 1696년 당국은 포고문을 통해 에브리와 일당의 체포를 요구하고 현상금을 제시했다. 현상금의 구조는 자료에 따라 다르게 전해진다. 정부가 500파운드를 걸었고 회사가 이를 더해 1,000파운드가 되었다는 서술이 흔하지만, 합산 방식은 더 확인이 필요하다. 어느 쪽이든 이 추적은 여러 지역에 걸친 수배였고, 회사는 무굴에 배상과 단속을 약속했다.

모건의 시대와 견주면 방향이 달라진 것이 분명하다. 사반세기 전에는 스페인을 약탈하는 일이 국가의 이익과 겹쳤다. 비용은 적이 치렀기 때문이다. 에브리의 피해자는 적이 아니라 교역 상대였다. 약탈의 비용이 자국 상인에게 돌아오자, 해적을 단속해야 한다는 요구는 더욱 절박해졌다. 해적 단속은 자국의 교역을 지키기 위한 현안이 된 것이다.

상업적 손실이 자국에 돌아오자 영국 당국이 해적을 추적하고 처벌해야 할 이유는 더욱 커졌다. 거기에는 외교적 책임과 항해 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요구도 함께 작동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역사는 이 지점에서 질문을 던진다. 단속은 정의 때문에 시작되었는가, 청구서 때문에 시작되었는가.

사라진 사람, 남은 이야기

에브리는 바하마 방면으로 향한 뒤 기록에서 사라진다. 일부 선원은 체포되어 1696년 런던에서 재판을 받았고, 처형된 이들도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가장 큰 이름은 붙잡히지 않았다. 확인되지 않은 행적을 둘러싸고 ‘해적 왕’의 전설이 자라났다. 이 로망의 탄생은 시리즈 마지막 편에서 다룬다.

패턴은 이렇게 읽힌다

세부 기록에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약탈의 여파가 직접 피해자를 넘어 교역과 외교 관계로 번졌다는 흐름은 확인할 수 있다. 그 흐름에서 읽히는 패턴을 분명히 적는다.

첫째, 약탈의 피해는 배 안에서 끝나지 않았다. 승객과 선원에게 가해진 폭력에 더해, 사건과 직접 관련이 없던 상인과 회사 관계자에게도 손실과 구금의 위험이 번졌다.

둘째, 비용이 번지는 약탈은 단속의 대상이 된다. 상업적 손실이 자국에 돌아오자 당국이 해적을 추적해야 할 이유는 더욱 커졌다. 허가의 선은 법이 긋지만, 그 선을 단속으로 바꾸는 힘은 비용이 돌아오는 방향에서 나왔다.

셋째, 이익을 챙기는 쪽이 먼저 움직이고 책임을 지는 쪽은 나중에 움직인다. 이 비대칭은 17세기 인도양에만 있던 일이 아니다.

에브리는 보물을 가져갔지만, 그 약탈이 남긴 책임은 수라트의 상관과 영국 당국 사이를 떠돌았다. 한 척의 배에서 시작된 폭력이 교역의 조건까지 바꾸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바다의 연결이 부(富)뿐 아니라 위험과 책임도 함께 옮긴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연결은 누구의 장부에 어떤 비용을 남기고 있는가. 멀리서 보아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한 척의 배가 남긴 계산서도 그중 하나다. 바라보는 자의 기록은 그 계산서가 도착하는 방향을 따라간다.

다음 편 예고: 약탈의 이익이 노동과 무역의 구조와 어떻게 얽혀 있었는지, 해적선 안의 규칙과 거점으로 이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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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할 말씀: ‘이익을 탐하는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 — 잠언 1:19

참고 자료: Wikipedia “Henry Every”, “Ganj-i-Sawai”, “Capture of the Grand Mughal Fleet”; HISTORY.com (Evan Andrews); World History Encyclopedia “Henry Every”; Stephen Liddell(2021) 해설; Tyler Joseph Kynn(2021), “Pirates and pilgrims: The plunder of the Ganj-i-Sawai, the hajj, and a Mughal captain’s perspective”; Pigou, The Economics of Welfare(1920); Coase, “The Problem of Social Cost”(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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