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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9:18–29‘보았다’와 ‘보지 않았다’ 사이에 놓인 저주
열 절에 다섯 번 나오는 ‘가나안’
제11편 · 2026.10.31 · Watchman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을 이루던 열일곱 절이 끝나고, 방주에서 나온 세 아들이 소개된다
9:1–17절에서 말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노아의 말은 한 마디도 기록되지 않는다. 9:18절에서 장면이 바뀐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이 셈과 함과 야벳이라고 소개된 뒤, 이야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한 문장이 덧붙는다.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니라.” 노아의 가족 이야기에 가나안이라는 이름이 왜 먼저 나오는가. 이번 글은 이 질문을 안고 9:18–29절을 따라간다.
이번 범위는 9:18–29절이다. 마소라 본문(WLC)에서 9:17절 뒤와 9:29절 뒤에 같은 단락 표지 ‘פ’가 있고, 그 사이에는 다른 단락 표지가 없다.1 이 글에서는 이 대목을 네 부분으로 나누어 살핀다. 9:18–19절은 세 아들의 소개, 9:20–24절은 포도원과 장막의 사건, 9:25–27절은 노아의 말, 9:28–29절은 노아의 햇수와 죽음이다. 9:19절은 이 세 아들에게서 사람들이 나와 온 땅으로 퍼져 나갔다고 서술한다.
벌거벗음을 ‘본 아들’과 ‘보지 않은 두 아들’이 같은 장면 안에서 맞선다
9:20절에서 노아는 ‘농부’(이시 하아다마 איש האדמה, 직역하면 ‘땅의 사람’)가 되어 포도원을 일군다. 흠정역은 9:21절을 다음과 같이 옮긴다.
21 포도주를 마신 뒤 취해 자기 장막 안에서 덮지 않은 채 있었더니
21 And he drank of the wine, and was drunken; and he was uncovered within his tent.
— 창세기 9:21 (킹제임스 흠정역 · KJV)
‘덮지 않은 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갈라’(גלה, 드러내다) 어근의 형태인 ‘와이티갈’(ויתגל)이다.2 본문은 술에 취한 노아가 어떤 경위로 벌거벗게 되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흠정역은 9:22절을 다음과 같이 옮긴다.
22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보고 밖에 있는 자기의 두 형제에게 고하매
22 And Ham, the father of Canaan, saw the nakedness of his father, and told his two brethren without.
— 창세기 9:22 (킹제임스 흠정역 · KJV)
‘벌거벗음’(에르와 ערוה)은 9:22절에 한 번, 9:23절에 두 번 나온다. 창세기 전체에서 이 낱말이 나오는 곳은 이 세 번과 42:9, 12절뿐이다.3 ‘아버지’(아브 אב)는 9:18–23절에 다섯 번 나온다. 두 번은 함을 가리키는 ‘가나안의 아버지’(9:18, 22절)에, 세 번은 노아를 가리키는 ‘자기 아버지’(9:22절, 9:23절 두 번)에 쓰인다. 9:21–23절에서 노아의 이름은 한 번도 나오지 않고, 노아는 ‘아버지’로만 불린다. 함의 행위를 나타내는 동사는 ‘보았다’(와야르 וירא)와 ‘알렸다’(와야게드 ויגד) 두 개다. 반면 셈과 야벳의 행위는 더 많은 동사로 서술된다. 흠정역은 9:23절을 다음과 같이 옮긴다.
23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 어깨에 올려놓고 뒷걸음쳐 들어가 자기들의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덮었는데 그들의 얼굴이 뒤를 향하였으므로 그들이 자기들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보지 아니하였더라.
23 And Shem and Japheth took a garment, and laid it upon both their shoulders, and went backward, and covered the nakedness of their father; and their faces were backward, and they saw not their father’s nakedness.
— 창세기 9:23 (킹제임스 흠정역 · KJV)
두 형제의 동사는 가져가다(와이카흐 ויקח), 올려놓다(와야시무 וישימו), 걷다(와일레쿠 וילכו), 덮다(와예카수 ויכסו)의 넷이다. 첫 동사 ‘와이카흐’는 단수형이고 둘째 동사 ‘와야시무’부터 복수형이다.4 ‘뒤로’(아호라니트 אחרנית)는 걷는 방향과 얼굴이 향한 방향을 설명할 때 각각 한 번씩, 모두 두 번 나온다. ‘보다’(라아 ראה) 어근은 9:18–29절에서 9:22절의 ‘보았다’와 9:23절의 ‘보지 않았다’(로 라우 לא ראו), 두 곳뿐이다. 같은 낱말 ‘에르와’를 가운데 두고 한 아들은 보았고 두 아들은 보지 않았다. 9:24절에서 깨어난 노아의 반응은 다음과 같다.
24 노아가 포도주에서 깨어나 자기의 작은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24 And Noah awoke from his wine, and knew what his younger son had done unto him.
— 창세기 9:24 (킹제임스 흠정역 · KJV)
노아가 ‘알게 된 것’(와예다 וידע)은 작은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아사 로 עשה לו)이다. 앞 장면에서 함의 행위로 서술된 것은 보고 알린 일이다. 서술자는 이를 작은아들이 노아에게 ‘행한 일’이라고 적는다. 본문은 보고 알린 일과 ‘행한 일’ 사이의 관계를 더 설명하지 않는다. 또 ‘작은아들’(학카탄 הקטן)이 누구인지도 이름으로 밝히지 않는다. 뒤의 해석 쟁점에서 이 문제를 살핀다.
9:25–27절은 노아의 첫 말이다. 6:9–9:29절에서 노아의 직접 화법은 이 세 절뿐이다.5 흠정역은 9:25절을 다음과 같이 옮긴다.
25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을 것이요, 그는 그의 형제들에게 종들의 종이 될 것이니라, 하고
25 And he said, Cursed be Canaan; a servant of servants shall he be unto his brethren.
— 창세기 9:25 (킹제임스 흠정역 · KJV)
노아는 함이 아니라 가나안에게 ‘아루르’(ארור, 저주받은)라고 선언한다. 이어지는 9:26절은 흠정역에서 “또 이르되, 주 곧 셈의 하나님은 찬송할지어다”로 시작한다. ‘찬송할지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바루크’(ברוך)이며, 찬송의 대상은 셈이 아니라 ‘셈의 하나님’이다. 9:1–17절에서 하나님을 가리키는 명칭으로는 ‘엘로힘’만 쓰이는데, 9장에서 ‘주’(יהוה)라는 이름이 나오는 곳은 9:26절뿐이다. 흠정역은 9:27절을 다음과 같이 옮긴다.
27 하나님께서 야벳을 크게 만드실 것이요, 그가 셈의 장막들에 거하게 하시리니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될 것이니라, 하였더라.
27 God shall enlarge Japheth, and he shall dwell in the tents of Shem; and Canaan shall be his servant.
— 창세기 9:27 (킹제임스 흠정역 · KJV)
가나안의 이름은 노아의 세 마디에 모두 나온다. 9:25, 26, 27절에 한 번씩이고, 서술자가 말한 9:18, 22절을 더하면 9:18–27절에서 다섯 번이다. 9:26절과 9:27절의 끝은 히브리어로 똑같은 네 낱말이다. ‘와이히 케나안 에베드 라모’(ויהי כנען עבד למו,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될 것이니라’). ‘종’(에베드 עבד)은 9:25–27절에 네 번 나온다. 9:27절에서 ‘크게 만드실 것이요’로 옮긴 ‘야프트’(יפת)는 자음만 놓고 보면 ‘야벳’(예페트 יפת)의 이름과 같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던 ‘아루르’가 노아의 입에서도 나온다
‘아루르’가 속한 ‘아라르’ 어근(ארר)은 창세기에서 3:14, 3:17, 4:11, 5:29, 9:25절에 나온 뒤 12:3, 27:29, 49:7절에도 나온다.6 3:14, 3:17, 4:11절의 ‘저주받은’(아루르)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고, 대상은 뱀(3:14절), 땅(3:17절), 가인(4:11절)이다. 5:29절에서는 노아의 아버지가 ‘주께서 저주하신 땅’을 말하며 아들의 이름을 짓는다. 점검한 1–9장 범위에서, 사람이 ‘아루르’를 직접 선언하는 첫 기록은 9:25절이다. 그 대상은 땅이나 짐승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이름이다.
땅과 노아의 이름을 잇는 흐름도 있다. 8:21절에서 하나님은 사람 때문에 땅을 다시는 저주하지 않겠다고 하시는데, 이때 쓰인 동사는 ‘아라르’가 아니라 ‘칼랄’(קלל)이다. 9:20절에서 노아는 ‘땅의 사람’이 된다. 5:29절, 8:21절, 9:20절, 9:25절이 ‘땅’(아다마)과 저주 어휘를 나누어 쓰는 흐름은 어휘의 반복을 바탕으로 구절 사이의 연관성을 살펴본 해석이며, 본문이 이 네 구절의 관계를 직접 설명하지는 않는다.
‘복’ 어근(바라크 ברך)은 9장에서 9:1절의 ‘복을 주시며’와 9:26절의 ‘찬송할지어다’, 두 곳에 나온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주신 9:1절의 ‘아들들’에는 함도 들어 있다. 9:25절의 저주는 복을 받은 함의 아들 가나안에게 선언된다. 복과 저주가 한 장 안에서 이렇게 얽힌 구조로 이해해 볼 수 있다.
‘벌거벗음’을 뜻하는 ‘에르와’와 ‘드러내다’를 뜻하는 ‘갈라’를 함께 쓰는 표현은 레위기 18장과 20장의 성적 금령에 자주 나온다. ‘에르와’는 레위기 18장에 24번, 20장에 8번 나오며, 18:3절은 이집트 땅과 가나안 땅의 행위를 따르지 말라고 한다.7 9:22절의 ‘보다’가 이러한 표현과 관련되는지는 뒤의 해석 쟁점에서 다룬다. 낱말이 겹친다는 사실과 같은 뜻이라는 판단은 구분해야 한다.
9:28절은 노아가 ‘홍수 이후’ 350년을 살았다고, 9:29절은 노아가 모두 950년을 살았다고 기록한다. 950년에서 350년을 빼면 600년으로, 홍수가 땅에 닥쳤을 때 노아가 육백 세였다는 7:6절의 기록과 일치한다. 또 9:29절의 ‘그의 모든 날이 … 년이었고 그가 죽었다’는 5:5절을 비롯한 5장의 죽음 기록과 같은 어구 틀이다.8
함이 한 일은 무엇이며, 왜 가나안이 저주받고, ‘그의 종’은 누구의 종인가
첫 번째 쟁점은 함이 무엇을 했는가이다. 본문이 함의 행위로 서술하는 것은 보고 알린 일이지만(9:22절), 9:24절은 그것을 작은아들이 노아에게 ‘행한 일’이라고 적는다. 이에 관한 해석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보고 밖에 알린 일 자체가 아버지를 욕되게 한 행위라는 견해가 있다. 두 형제가 뒷걸음쳐 덮은 9:23절과의 대조에 기댄다.
랍비 전승은 다르게 푼다. 바빌로니아 탈무드 산헤드린 70a는 함이 노아를 거세했다는 풀이와 성적으로 욕보였다는 풀이를 함께 싣고, 라시는 9:22절 주석에서 이 두 풀이를 나란히 옮긴다.9
레위기의 표현에 비추어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보다’를 아버지의 아내와의 성관계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버그스마와 한은 이를 노아의 아내, 곧 함의 어머니와의 관계로 보고, 가나안이 그 관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고 논증한다. 같은 논문은 엿봄, 거세, 아버지에 대한 성폭력이라는 해석을 각각 비판한다.10
행위자를 가나안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파르베르는 『피르케 드라비 엘리에제르』와 카라, 이븐 에즈라가 이 길을 택했다고 소개한다.11
두 번째 쟁점은 왜 가나안이 저주의 대상이 되는가이다. 『창세기 라바』 36장의 랍비 유다는 9:1절에서 이미 복을 받은 함은 저주할 수 없어 노아가 가나안을 저주했다고 풀었고, 바히야 벤 아셰르는 함의 맏아들 가나안에게 내린 저주가 함의 모든 후손에게 미친다고 해석했다.11 자료 비평의 풀이도 있다. 파르베르는 본래 이야기에서 가나안이 노아의 막내였고, 후대의 편집자가 ‘함’과 ‘가나안의 아버지’라는 표현을 끼워 넣어 두 계보를 맞추었다고 제안한다.11 본문만으로는 이 견해들 가운데 어느 것이 타당한지 확정하기 어렵다.
세 번째 쟁점은 ‘그의 종’에서 ‘그’가 가리키는 대상이다. 9:26, 27절의 ‘라모’(למו)는 ‘그에게’와 ‘그들에게’가 모두 가능한 형태여서, KJV 난외주도 ‘그의 종’ 옆에 ‘그들의 종’을 병기한다.12 9:25절의 ‘그의 형제들’은 가장 가까운 선행어가 가나안이지만, 셈과 야벳은 가나안의 형제가 아니라 함의 형제이다(9:22절). 파르베르가 짚은 이 관계 역시 본문만으로는 분명하게 설명하기 어렵다.
이 대목은 후대에 큰 상처를 남긴 풀이와도 닿아 있다. 이 대목에서 노아가 저주의 대상으로 지목하는 인물은 가나안이다. 바이블 오디세이(SBL)의 글은 10장이 함을 구스, 이집트, 붓, 가나안의 조상으로 소개한다고 적고, 저주를 가나안에서 함으로, 다시 함에서 아프리카계 사람들 전체로 옮기는 노예제 옹호의 풀이가 16–17세기에 나타났다고 설명한다. 그 연결은 본문에 없다.13 같은 글은 9장을 이스라엘 안에서 가나안 사람들이 예속된 현실의 기원을 설명하는 이야기로 보는 학계의 견해도 소개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노아가 가나안에게 선언한 저주를 함에게 향한 것으로 보고, 포도원 장면을 그리스도의 수난을 가리키는 그림으로 풀었다
후대에 제시된 해석을 하나 덧붙인다. 4–5세기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신국론』 16권 1장에서 노아가 함의 아들인 가나안에게 저주를 선언함으로써 함을 저주한 것으로 보았다.14 2장에서는 이 이야기를 예표로 풀었다. 노아의 벌거벗음은 그리스도의 수난이고, 셈과 야벳은 할례받은 이들과 받지 않은 이들이며, 그들이 덮은 옷은 성례를, 뒷걸음은 지나간 일에 대한 기억을 뜻한다고 보았다. ‘뜨겁다’는 뜻으로 풀어 낸 함의 이름에서는, 수난을 입으로 알리면서 행실로 욕되게 하는 이들을 보았다. 이는 사건의 세부를 교회사의 그림으로 옮겨 해석한 한 갈래이다. 이 소개는 후대의 수용 사례를 보인 것이며, 앞서 살핀 해석을 입증하는 근거로 삼지는 않는다.
이 범위의 짜임은 ‘봄’과 ‘보지 않음’, 저주와 복이 얽힌 구조로 헤아려 볼 수 있다
아래 표에서는 본문에서 확인한 내용을 ‘관찰’, 그에 근거한 해석을 ‘추론’, 근거가 충분하지 않은 가능성의 제시를 ‘사변’으로 구분한다.
| 어휘·구절·주제 | 내용 | 판단 구분 |
|---|---|---|
| ‘에르와’(벌거벗음) | 9:22절 한 번, 9:23절 두 번. 창세기에서는 42:9, 12절에도 나옴 | 관찰 |
| ‘보다’(라아) | 9:22절 ‘보았다’, 9:23절 ‘보지 않았다’ 두 곳뿐 | 관찰 |
| ‘아버지’(아브) | 9:18–23절에 다섯 번(함 둘, 노아 셋). 9:21–23절에 노아의 이름 없음 | 관찰 |
| 행위 동사 | 함은 보았다·알렸다 둘, 셈과 야벳은 가져가다·올려놓다·걷다·덮다 넷 | 관찰 |
| 노아의 말 | 6:9–9:29절에서 9:25–27절뿐. 9:26절·27절의 끝 네 낱말이 같음 | 관찰 |
| ‘가나안’·‘종’ | ‘가나안’ 9:18–27절에 다섯 번, ‘에베드’ 9:25–27절에 네 번 | 관찰 |
| ‘아루르’(저주받은) | 3:14, 3:17, 4:11, 5:29, 9:25절. 사람이 직접 선언하는 첫 용례는 9:25절(1–9장 점검 범위) | 관찰 |
| ‘바라크’(복)와 ‘주’(יהוה) | 9장에서 ‘바라크’는 9:1절과 9:26절, ‘주’는 9:26절에만 나옴 | 관찰 |
| 노아의 햇수 | 9:28–29절 350년과 950년. 9:29절은 5장의 죽음 기록과 같은 틀 | 관찰 |
| ‘봄’과 ‘보지 않음’의 대비 | 같은 ‘에르와’를 두고 한 아들의 ‘봄’과 두 아들의 ‘보지 않음’이 맞서는 구조 | 추론 |
| 9:1절의 복과 9:25절의 저주 | 복 받은 집안의 다음 세대 위에 저주가 선언되는 구조 | 추론 |
| 땅의 저주 어휘와의 이어짐 | 5:29, 8:21, 9:20, 9:25절의 ‘땅’과 저주 어휘가 겹침 | 추론 |
| ‘야프트’와 ‘예페트’ | 자음이 같은 두 낱말이 의도된 말놀이일 수 있음 | 사변 |
표의 관찰에서 이끌어 낸 추론은 셋이다. 첫째, 이 장면은 ‘봄’과 ‘보지 않음’의 대비로 짜였다고 볼 여지가 있다. 둘째, 9:1절의 복과 9:25절의 저주가 한 장 안에서 얽혀 복 받은 집안의 다음 세대로 저주가 내려가는 구조로 풀어 볼 수 있다. 셋째, 하나님께서만 선언하시던 ‘아루르’가 노아의 입에서 나오는 점은 ‘땅’을 두고 이어진 저주 어휘의 흐름 끝에 놓인 것으로 헤아려 볼 수 있다. 이 셋은 어휘의 분포와 구조에 근거한 추론이며, 본문이 그 뜻을 직접 설명하지는 않는다. 함이 실제로 무엇을 했는지, 왜 가나안이 저주받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정되지 않으므로 이 글은 어느 쪽도 택하지 않는다. 앞 편의 9:1–17절은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을 이루었고, 이번 범위에서는 사람의 행위와 노아의 말이 이야기를 이끈다.
근거가 약한 추측도 하나 적어 둔다. ‘야프트’와 ‘예페트’의 자음이 같다는 것은 관찰이지만, 이를 의도된 말놀이로 볼 가능성도 있으나, 본문은 이를 말하지 않으므로 사변으로 남겨 둔다.
노아의 말이 끝난 자리에서, 가나안이라는 이름은 어디로 이어지는가
9:27절의 마지막 네 낱말 뒤에 노아의 말은 더 나오지 않는다. 9:28–29절은 햇수와 죽음을 적고 장을 닫는다. 그런데 이 세 아들에게서 사람들이 나와 온 땅으로 퍼져 나갔다는 9:19절의 서술은 아직 이어지지 않았다. 이 세 아들의 후손과 그들이 이루는 민족들은 다음 장의 계보에 등장한다. 가나안과 셈과 야벳의 관계는 그 계보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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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9:18–29절의 히브리어(WLC)와 영문 KJV는 eBible.org 공개본(bibliaonline.com.br의 KJV+WLC 열람, https://www.bibliaonline.com.br/kjv+wlc/gn/9)으로 확인했다. 단락 표지는 9:7절 뒤 ‘ס’, 9:17절 뒤 ‘פ’, 9:29절 뒤 ‘פ’이며 9:18–28절 사이에는 없다. BHS와는 대조하지 못했다. ↩
2. 계수 기준은 제10편 각주 2와 같다(WLC 단어 단위, 마켑으로 이은 말은 각각 센다, 접두사가 붙은 형태는 해당 어근으로 센다). 9:21절의 ויתגל은 ‘갈라’(גלה) 어근의 형태로 보이며 KJV는 ‘was uncovered’이다. 형태 판정은 필자의 것이며 사전·형태 분석 자료로 재검증하지 못했다. ↩
3. ערוה는 9:22절(עֶרְוַת), 9:23절(עֶרְוַת, וְעֶרְוַת)이다. 창세기 용례 다섯 번(9:22, 9:23 두 번, 42:9, 42:12)은 Bibliaparalela 스트롱 6172 용례 목록(https://bibliaparalela.com/hebrew/strongs_6172.htm)으로 확인했고, 42:9, 12절 본문은 열람하지 못했다. אב는 9:18절(אֲבִי), 9:22절(אֲבִי, אָבִיו), 9:23절(אֲבִיהֶם 두 번)이다. נח은 WLC 9:18, 19, 20, 24, 28, 29절에 있고 9:21–23절에는 없다. ↩
4. 9:23절의 וַיִּקַּח(단수), וַיָּשִׂימוּ, וַיֵּלְכוּ, וַיְכַסּוּ는 WLC로 확인했다. אחרנית는 9:23절에 두 번이다. ראה 어근은 9:22절 וַיַּרְא와 9:23절 רָאוּ뿐이다(WLC 9:18–29절 직접 점검). 형태 판정은 필자의 것이다. ↩
5. 6:9–9:24절에 노아의 직접 발언이 없다는 점은 제10편 작업에서 점검했다. 이번 작업에서는 9:25–29절을 WLC로 확인했다. 9:25–27절이 노아의 말이고(‘와요메르’는 9:25, 26절 두 번), 9:28–29절은 서술이다. BHS와는 대조하지 못했다. ↩
6. 확인한 내용 — ארר 용례는 Blue Letter Bible 목록(https://www.blueletterbible.org/lexicon/H779/wlc)으로 확인했다: 창세기 3:14(אָרוּר), 3:17(אֲרוּרָה), 4:11(אָרוּר), 5:29(אֵרְרָהּ), 9:25(אָרוּר), 12:3, 27:29(두 번), 49:7. 3:14절은 주 하나님이 뱀에게 하시는 말씀임을 YLT 대역 열람으로, 4:11절의 WLC 문구(וְעַתָּה אָרוּר אָתָּה מִן־הָאֲדָמָה)는 lueur.org 대조 열람으로 확인했다. 5:29절의 KJV 문구(‘…because of the ground which the LORD hath cursed’)는 thebible.ch KJV 열람으로 확인했다. 확인하지 못한 내용 — 3:17절과 4:9–10절의 앞 문맥, 5:28–29절의 화자(라멕). 8:21절의 ‘칼랄’은 제10편 각주 8의 확인에 따른다. ↩
7. 레위기 용례 수(18장 24회, 20장 8회)는 각주 3의 용례 목록으로 확인했다. 18:3절과 ‘아버지의 벌거벗음’ 관련 구절(18:7–8, 20:11, 20:17)은 각주 10의 논문 요약에 따랐으며 레위기 본문은 직접 열람하지 못했다. ↩
8. 9:28절(שְׁלֹשׁ מֵאוֹת שָׁנָה וַחֲמִשִּׁים שָׁנָה)과 9:29절(תְּשַׁע מֵאוֹת שָׁנָה וַחֲמִשִּׁים שָׁנָה וַיָּמֹת)은 WLC로 확인했다. 7:6절(וְנֹחַ בֶּן־שֵׁשׁ מֵאוֹת שָׁנָה)은 Blue Letter Bible(https://www.blueletterbible.org/verse/wlc/gen/7/6), 5:5절(וַיִּהְיוּ כָּל־יְמֵי אָדָם … וַיָּמֹת)은 bible.cc(https://bible.cc/texts/genesis/5-5.htm)로 확인했다. 5장의 나머지 죽음 기록은 이번 작업에서 열람하지 못했다. ↩
9. 라시 9:22절 영역: ‘Some say that he castrated him and some say that he sodomized him (Sanhedrin 70a)’(https://widetorah.com/genesis/9/22/, 번역자 미표시). 한국어 풀이는 필자의 요약이다. 탈무드 원문은 열람하지 못했다. ↩
10. John Sietze Bergsma and Scott Walker Hahn, “Noah’s Nakedness and the Curse on Canaan (Genesis 9:20–27),” JBL 124/1 (2005): 25–40. PDF 사본(https://nakedbiblepodcast.com/wp-content/uploads/2015/12/Hahn-Bergsma-Noahs-nakedness-and-the-curse-on-Canaan.pdf)의 열람 요약으로 확인했으며, 쪽수 대조는 하지 못했다. ↩
11. Zev Farber, “Noah’s Nakedness: How the Canaan-Ham Curse Conundrum Came to Be,” TheTorah.com, 2015.10.15.(https://www.thetorah.com/article/noahs-nakedness-how-the-canaan-ham-curse-conundrum-came-to-be). 『피르케 드라비 엘리에제르』, 카라, 이븐 에즈라, 『창세기 라바』 36장, 바히야 벤 아셰르의 풀이는 이 글의 소개에 따랐으며 각각의 원문은 열람하지 못했다. ↩
12. KJV 난외주는 각주 1의 eBible.org 공개본에 표시된 9:26절 ‘his servant: or, servant to them’과 9:27절 ‘enlarge: or, persuade’이다. למו의 용법 범위는 문법서·사전에서 확인하지 못했다. ↩
13. Bible Odyssey, “The Curse of Ham”(https://www.bibleodyssey.com/articles/the-curse-of-ham/). 저자와 게재일은 표시되어 있지 않다. 참고문헌으로 David M. Goldenberg, The Curse of Ham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5)과 Stephen R. Haynes, Noah’s Curse (Oxford University Press, 2002)가 실려 있다. 10장 본문은 이번 작업에서 열람하지 못했다. ↩
14. Augustine, De civitate Dei 16.1–2. 영역은 Marcus Dods, George Wilson, J. J. Smith 번역 Standard Ebooks 판(https://standardebooks.org/ebooks/augustine-of-hippo/the-city-of-god/marcus-dods_george-wilson_j-j-smith/text/book-16)이다. 해당 장의 내용은 열람 요약과 단구 확인으로 점검했고 문단 전문 대조는 하지 못했다. 라틴어 원문은 열람하지 못했다. 한국어 풀이는 필자의 요약이며, 1장의 ‘아들을 통한 저주’ 표현은 발행 전 원문과 대조해 확정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