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전한 왕은 무엇을 세웠나

흰 상복을 입은 백제 위덕왕이 새벽 안개 속에서 목탑 건설 현장을 바라보는 능산리 왕실 사찰 조성 상상도
패전과 상실 이후, 위덕왕은 무엇을 세우려 했을까. 능산리 왕실 사찰 조성을 모티브로 재구성한 AI 생성 이미지.

패전한 왕은 무엇을 세웠나

위덕왕과 능산리, 칼의 길이 막힌 뒤에 쌓은 힘

2026.10.28 · 한국사


향로가 묻혀 있던 자리에서

1993년 말, 부여 능산리 절터의 한 구덩이에서 금동 향로 하나가 진흙에 잠긴 채 발견되었다. 백제금동대향로다. 용이 몸체를 받치고, 봉황이 꼭대기에서 날개를 펴고, 산봉우리마다 악사와 짐승이 새겨진 이 물건은 오늘날 백제의 화려한 문화를 대표하는 유물이 되었다.

그런데 향로가 발견된 절터는 승리의 기념비보다 죽은 왕을 추모하는 공간에 가까웠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곳을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아들 위덕왕이 조성한 원찰로 보는 견해가 있다.

1995년 같은 절터의 목탑 자리에서 나온 석조 사리감에는 창왕 13년 정해년에 공주가 사리를 공양했다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¹ 창왕은 위덕왕의 이름이다.

향로의 제작 시기는 확정되지 않았으나 6세기 후반 위덕왕 시기의 작품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 견해를 따르면, 백제 문화의 절정을 보여 주는 이 유물은 패전과 애도의 기억이 쌓인 시대의 산물이 된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성왕이 사비로 도읍을 옮기고 한강을 되찾으려다 관산성에서 전사하기까지를 살펴보았다. 이번 글은 그다음 이야기다. 관산성 패전 당시 여창은 왕이 아니라 태자였다.

패전을 겪은 태자는 왕위에 오른 뒤, 재위 45년 동안 무엇을 세웠는가. 그리고 그 45년은 지금의 우리에게 무엇을 묻는가.

554년, 아버지를 잃은 태자와 같은 시간의 세계

553년 신라는 백제가 되찾은 한강 하류를 차지하고, 그곳에 신주(新州)라는 행정구역을 새로 두었다. 이듬해 백제 태자 여창은 가야와 왜의 군사를 이끌고 관산성(오늘의 충북 옥천)을 공격했다. 초반에는 백제가 우세했다.

그러나 성왕이 싸움터의 아들을 위로하려고 소수의 기병과 보병만 거느리고 밤길을 가다가 구천에서 신라 복병에게 죽임을 당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이 싸움에서 백제의 좌평 4명과 군사 2만 9,600명이 죽었다고 적는다.² 120년 가까이 이어진 나제동맹이 이 하루에 끝났다.

살아남은 태자에게는 왕위 계승과 패전 수습이라는 과제가 남았다. 『일본서기』는 여창이 출가해 수도하겠다고 했으나 신하들이 말렸다고 전한다.³

정벌을 주도한 여창이 패전의 책임 때문에 곧바로 즉위하지 못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그는 귀족 세력과 타협해 왕위에 올랐으며 즉위 뒤에도 정치적 제약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⁴ 위덕왕은 즉위하는 순간부터 아버지의 죽음으로 끝난 원정을 이끌었던 아들이었다.

패전의 책임을 안고 즉위한 왕에게는 운신의 제약이 있었을 것이다. 그 속에서 위덕왕의 재건에서 눈에 띄는 것은 아버지를 추모하는 불사와 대외 교류다. 567년 능산리 원찰에 사리가 공양되었고, 이 절은 성왕의 묘역과 도성의 마지막 방어선인 나성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같은 해 위덕왕은 남조의 진(陳)에 사신을 보내는 한편 북제에도 백제 최초의 사절을 파견했다. 567년 이후에는 큰 전쟁이 거의 없었고, 왕은 귀족과 합의하는 가운데 내부 정비에 힘을 쏟았다는 평가가 있다.⁵

577년 북제가 북주에 무너지자 백제는 북주 조정에 축하 사절을 보냈고, 진에는 567년부터 586년까지 네 차례 사신이 오갔다. 이러한 사신 왕래는 백제가 중국의 정세 변화에 맞추어 외교 관계를 조정했음을 보여 준다.

577년은 위덕왕의 개인사에서도 분기점이었다. 2007년 부여 왕흥사터 목탑 자리에서 사리기가 발견되었다. 청동 사리합의 명문에는 정유년 2월 15일,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해 찰(刹)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⁶ 아버지를 위해 절을 짓던 아들이 이번에는 먼저 떠난 아들을 위해 불사를 일으킨 것이다.

이 명문 덕분에 문헌으로만 알던 왕흥사의 창건 시기가 위덕왕대로 앞당겨졌다. 같은 해 위덕왕은 일본에 경론과 율사, 선사를 보냈다고 전한다.⁷ 이후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의 승려와 기술자들은 아스카 불교문화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597년에는 아들 아좌를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있다.⁸

598년 위덕왕은 재위 45년째에 세상을 떠났다. 『삼국사기』는 같은 해 수나라가 고구려 원정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들은 왕이 스스로 길잡이를 자청했다고 적는다. 다만 이 사건의 연대를 600년 무렵으로 보는 연구도 있어, 정확한 시점은 아직 논의 중이다.⁹

왕위는 아우 혜왕에게 넘어갔고, 혜왕과 법왕의 짧은 치세를 거쳐 무왕이 즉위했다. 무왕은 신라를 쉬지 않고 몰아붙였고, 그 공세는 의자왕 대인 642년 대야성 점령으로 이어졌다.¹⁰ 위덕왕의 45년은 그 대외 팽창의 바탕이었다는 평가가 있다.

위덕왕의 재위 기간에 다른 지역에서는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 지중해 건너편의 로마 제국부터 보자. 로마 제국은 395년 동서로 갈라졌고, 서쪽의 서로마는 476년 게르만 출신 장군 오도아케르에게 무너졌다. 이후 이탈리아는 동고트족이 다스리는 땅이 되었다.

반면 동쪽의 동로마 제국(비잔티움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지금의 이스탄불)를 수도로 살아남았다. 이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는 옛 로마의 땅을 되찾겠다며 535년 이탈리아 원정에 나섰다. 554년, 백제가 관산성에서 성왕을 잃은 해에 그는 20년 가까운 전쟁 끝에 이탈리아를 되찾고, 그곳의 통치를 새로 정하는 칙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 전쟁은 이탈리아 전역을 황폐하게 만들었고, 유스티니아누스가 565년에 죽은 지 3년 만에 롬바르드족이 알프스를 넘어 들어왔다. 되찾은 땅의 상당 부분이 다시 제국의 손을 떠났다.

제국의 군사적 보호가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로마를 지탱하는 데에는 교회의 구휼과 협상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590년 교황에 오른 그레고리우스 1세는 교회의 재산으로 도시에 곡식을 풀고, 롬바르드 왕과 직접 협상해 평화를 얻어냈다.¹¹

동아시아에서는 위덕왕이 사신을 보내던 상대가 재위 중에 차례로 사라졌다. 577년 북제가 북주에 멸망했고, 581년 수가 북주의 뒤를 이었으며, 589년 수가 진을 병합해 중국을 통일했다. 백제는 여러 왕조와 관계를 맺으며 중국의 권력 재편에 대응했다.

삼 년의 효, 사십오 년의 정치

위덕왕의 행보는 『논어』 학이편의 한 구절에 비추어 볼 수 있다.

父在觀其志,父沒觀其行,三年無改於父之道,可謂孝矣。
(부재관기지,부몰관기행,삼년무개어부지도,가위효의。)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그 뜻을 보고, 돌아가신 뒤에는 그 행실을 보며, 삼 년 동안 아버지의 도를 고치지 않으면 효라 할 만하다.”¹²

이 구절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자식의 행실과 계승을 어떻게 살필 것인지 묻는다. 이를 왕위 계승의 상황에 비추어 보면, 새 왕이 노선을 바꾸지 않는 일은 흔들리는 나라에 보내는 연속성의 신호가 될 수 있다.

위덕왕은 성왕의 정책을 이어받아 대외 교류와 불교를 키웠다는 평가를 받는다.¹³ 위덕왕의 재위 45년을 이 구절에 비추어 보면, 아버지의 유업을 잇는 일이 어떻게 장기적인 국가 운영으로 이어졌는지 물을 수 있다.

정면 충돌이 어려운 자리에서는 노자의 물이 떠오른다. 『도덕경』 78장은 이렇게 적는다.

天下莫柔弱於水,而攻堅強者莫之能勝。
(천하막유약어수,이공견강자막지능승。)
“천하에 물보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없으나, 단단하고 강한 것을 공략하는 데 물을 이기는 것이 없다.”¹⁴

관산성 이후의 백제에게 신라는 쉽게 넘을 수 없는 상대였다. 위덕왕의 외교와 불교 교류는 정면 충돌의 부담을 줄이면서 국력을 축적하려는 대응으로 볼 수 있다.

서양의 눈으로는 투키디데스가 전한 멜로스 대화가 겹쳐진다. 강자는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약자는 겪어야 하는 것을 겪는다는 대목이다.¹⁵ 이 대화는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의 냉혹한 힘의 격차를 드러낸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약소국이 상대의 계산을 바꿀 여지는 어디에 있는지 물을 수 있다. 약소국은 기술과 종교, 외교를 통해 협력 상대로서의 가치를 높일 수도 있다.

다만 이 비교만으로 위덕왕의 선택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외교와 불사가 왕권과 귀족 관계 속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함께 살펴야 한다.

철학은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패배 뒤에 세우는 것들

동로마와 백제를 나란히 놓으면 하나의 질문이 드러난다. 동로마는 되찾은 땅을 유지하는 비용 앞에서 흔들렸다고 볼 수 있다. 백제는 한강을 잃은 뒤 전쟁이 아닌 방식으로도 힘을 쌓았다. 중국의 여러 왕조와 왜에 사신과 승려, 기술자를 보내 외교의 폭을 넓혔고, 능산리 원찰과 왕흥사 같은 절을 지으며 흔들린 왕실의 구심점을 다시 세우려 했다.

두 사례를 함께 보면, 영토를 얻는 일과 얻은 뒤에 나라를 유지하는 일이 서로 다른 과제였음을 생각하게 된다. 군사적 성과와 달리, 기술과 종교의 교류는 국경을 넘어 후대에 영향을 남기기도 한다. 능산리의 향로와 왕흥사 사리기, 아스카에 전해진 불교 문화는 그 흔적을 보여 준다.

패배는 정책을 바꾸는 사건이 아니라 힘의 형태를 바꾸는 사건이다. 칼의 길이 닫히면 나라는 기억과 연결과 기술로 새 길을 낸다. 로마의 곡식 창고도, 위덕왕의 사신단도, 아스카의 사찰도 같은 법칙을 따랐다.

그러나 이 길에는 대가가 있었다. 위덕왕은 귀족과 타협해 왕위에 올랐고, 그 타협의 비용은 왕권의 약화로 돌아왔다는 해석이 있다. 대외 관계를 안정시키는 동안 귀족 세력도 기반을 강화했을 가능성이 있다.

패배 이후의 재건은 책임을 묻는 일과 다음을 준비하는 일을 한 사람이 동시에 짊어지게 만든다. 위덕왕은 이 두 가지를 한 몸으로 45년 동안 짊어졌다.

오늘의 한국도 이 구분 앞에 서 있다. 2026년 10월 6일 시작된 국정감사는 첫 주부터 법사위와 재경위 등 곳곳에서 고성과 파행으로 이어졌다.¹⁶ 10월 21일 국회 운영위원회는 대통령비서실 국감 증인 채택을 두고 충돌했다.

야당은 대통령실 인사 개입 의혹과 금융상품 도입 과정을 규명해야 한다며 증인을 요구했고, 여당은 비서실 부속실장이 국감에 출석한 전례가 없다고 맞섰다.¹⁷ 두 주장의 시비는 여기서 다루지 않는다. 다만 책임을 묻는 일과 다음을 준비하는 일은 서로를 대신하지 못하며, 한쪽이 다른 쪽을 삼키는 순간 나라가 균형을 잃는다는 구조는 진영과 무관하게 작동한다.

패배 이후에 우리는 무엇을 짓는가

오늘 우리가 위덕왕의 시대를 돌아볼 때 마주하는 것은 능산리 절터와 왕흥사 사리기, 그리고 그 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향로다. 역사는 이 지점에서 질문을 던진다. 한 나라가 큰 상실을 겪은 뒤, 그 자리에 무엇을 세우는가.

위덕왕 사후 44년이 지나 백제는 대야성을 함락했다. 그러나 훗날의 승리만으로 그의 치세를 평가하기는 어렵다. 패전 이후 나라를 유지하고 다음 세대에 기반을 넘긴 과정도 함께 살펴야 한다. 나라가 힘을 회복하는 데에는 한 사람의 재위보다 긴 시간이 필요할 수 있다.

오늘의 대한민국에도 이 질문을 가져올 수 있다. 정권이 바뀌고 정책의 방향이 달라져도, 다음 세대를 길러 내는 교육과 오랜 축적이 필요한 연구, 지역에서 일하며 살아갈 기반은 꾸준히 이어져야 한다. 성과가 늦게 나타나는 일일수록 당장의 정치적 보상은 작을 수 있다. 그렇기에 무엇을 새로 시작할지 못지않게, 무엇을 중단하지 않고 다음 정부와 다음 세대에 넘길지 합의하는 일이 중요하다.

물론 이어 간다는 이유만으로 잘못된 정책까지 보존할 수는 없다. 실패의 책임을 밝히고 제도를 고치는 일은 재건의 일부다. 다만 책임을 물은 뒤에도 질문은 남는다.

같은 실패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무엇을 바꾸었는가.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어떤 절차를 세웠는가. 그 변화가 시민의 일상에 닿을 때까지 누가 책임지고 이어 갈 것인가.

위덕왕의 사찰 조성을 오늘의 국가 정책에 그대로 옮길 수는 없다. 그러나 그의 시대를 돌아보며 우리가 힘을 무엇으로 판단하는지는 되물을 수 있다. 청년이 앞날을 계획할 수 있는 사회, 작은 가게가 다음 달을 준비할 수 있는 경제, 이견이 있어도 공정한 절차를 기대할 수 있는 제도 역시 나라를 지탱하는 힘일 것이다.

책임을 밝히는 일과 미래를 세우는 일은 서로를 대신할 수 없다. 다음 세대가 물려받을 것은 우리가 누구를 이겼다는 기록만이 아니다. 우리가 고쳐 놓은 제도와 지켜 낸 신뢰, 끝내 포기하지 않은 삶의 기반도 함께 남는다.

향로 앞에서 시작한 질문은 결국 우리에게 돌아온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세우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자리를 떠난 뒤에도 다음 사람의 삶을 받쳐 줄 수 있는가.


* 참고할 말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 시편 126:5
¹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 명문(1995 출토). 창왕 13년은 정해년이라 567년이지만 연표상 566년으로 1년 차이가 난다는 지적이 있으며, 백과사전류는 566년경으로 적는다.
²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15년(554).
³ 『일본서기』 흠명기(여창의 출가 의사를 전하는 대목).
⁴ 「百濟 威德王代의 정치 상황과 대외 관계」.
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덕왕’.
⁶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 명문(2007 발굴, 문화재청 국보 지정 예고 2019.4.1). ‘찰(刹)’은 탑 또는 사찰로 해석이 갈린다.
⁷ 『일본서기』 민달기 6년(577)조.
⁸ 『일본서기』 추고기 5년(597)조.
⁹ 윤경진, 「7세기 초 백제의 對隋 군사외교와 史書의 인식」(2021).
¹⁰ 김창석, 「6세기 후반~7세기 전반 백제·신라의 전쟁과 대야성」.
¹¹ 그레고리우스 1세 관련 서지.
¹² 『논어』 학이 11장.
¹³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덕왕’.
¹⁴ 『도덕경』 78장.
¹⁵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5권(멜로스 대화, 5.89).
¹⁶ 뉴시스(2026.10.9), 파이낸셜뉴스(2026.10.4).
¹⁷ 경북매일(2026.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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