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옮겨가는 권한, 비어가는 자리
8월, 세 기관에서 동시에 벌어진 일
2026.08.31 · 정치·외교 · 경제·국방
8월, 같은 주에 일어난 두 개의 장면
2026년 8월 11일, 정부세종청사 국무회의장. 이재명 대통령이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에게 노란봉투법의 노동쟁의 범위를 시행령으로 명시하라고 재차 지시했다. 지난달 21일에 이어 두 번째였다. 김 장관은 “법에 위임 규정이 없다”며 법리적 우려를 밝혔지만, 대통령은 “법률에 반하지 않는 범위에서 행정부가 세부 사항을 정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 결국 ‘적극 검토’라는 답으로 이어졌다.3
같은 달 28일, 청와대는 조희대 대법원장에게 이례적인 요청을 보냈다. 대법원장이 제청한 손봉기 대구지법 부장판사의 임명동의안을 국회에 넘기지 않겠다는 것, 그리고 다른 후보를 다시 제청하라는 요구였다. 1987년 현행 헌법 체제가 들어선 이후, 대통령이 대법관 제청을 사실상 반려한 첫 사례로 기록된다.4
앞선 글에서 우리는 국가가 노동의 시간을 규정하는 손과, 형사사건을 종결하는 손을 동시에 쥐게 된 여름을 지켜보았다. 그로부터 며칠 뒤, 국가는 이번엔 정책을 집행하는 손과 사법부 인사를 매만지는 손을 나란히 움직였다. 두 사건은 서로 다른 부처, 다른 인물, 다른 법조문에서 벌어졌다. 그런데도 같은 리듬으로 읽힌다면, 그 동시성을 단지 우연으로 돌리기는 어렵다.
1937년 2월, 백악관의 법원 개편안
1937년 2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연방대법원 판사 정원을 최대 15명까지 늘릴 수 있게 하는 ‘사법절차 개혁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표면적 명분은 고령 판사들의 업무 부담 경감이었지만, 속내에는 대법원이 뉴딜 정책의 핵심 법률들을 잇달아 위헌으로 판정하는 상황을 타개하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새 판사를 채워 넣음으로써 자신에게 우호적인 판결을 끌어내겠다는 구상이었다.5
루스벨트는 당시 압도적인 재선에 성공한 직후였기에 정치적 자산은 충분해 보였다. 그러나 법안은 여당인 민주당 내부에서부터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대통령이 마음에 들지 않는 판결을 내리는 법원을 통째로 개편하려 한다”는 비판이 여론을 흔들었다. 그리고 법안을 무력화시킨 결정타는 의회가 아닌 법원 내부에서 나왔다. 대법관 오언 로버츠가 그해 3월, 워싱턴주 최저임금법에 합헌 판결을 내리며 기존 판례를 뒤집었다 — 훗날 “제때 이루어진 전환(the switch in time that saved nine)”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법원이 스스로 방향을 틀자 법원을 개편해야 할 명분은 모호해졌고, 법안은 그해 7월 상원에서 사실상 폐기되었다.
미국 대법원은 그렇게 스스로 답을 냈다. 한국의 대법원은 아직 그 답을 내놓지 않은 상태다. 조희대 대법원장 앞에는 세 갈래 길이 놓여 있다 — 기존 제청을 유지하거나, 청와대의 요구대로 다시 제청하거나, 혹은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하는 길이다. 어느 길을 택하든, 그 선택은 이번 사태의 성격을 다르게 규정짓는 계기가 된다.
결과만 놓고 보면 루스벨트의 시도는 실패에 가까웠다. 다만 그 과정을 들여다보면 다른 궤적이 드러난다. 한 국가의 가장 강력한 권력이라 할지라도 사법부의 구성을 손대려는 순간에는 자신이 속한 정당으로부터도, 심지어 사법부 스스로의 판단으로부터도 제동이 걸릴 수 있다는 점이다. 견제는 헌법 조문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조문을 지키려는 이들의 저항과 자정 작용 속에서 비로소 완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법가와 법의 정신 사이
有良法而乱者有之矣,有君子而乱者,自古及今未尝闻也。(유량법이란자유지의, 유군자이란자, 자고급금미상문야。)
“좋은 법이 있어도 어지러워지는 경우는 있으나, 군자가 있는데도 어지러워진 경우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다.”1
순자에게 법과 사람은 분리되지 않는다. 아무리 정교한 법이라도 그것을 지키고 운용할 책임 있는 사람이 없으면 결국 무너진다는 것이 이 구절의 요지다. 법 그 자체가 통치를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법을 짊어질 얼굴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몽테스키외는 다른 각도에서 같은 문제를 겨눴다. “권력을 가진 자는 누구나 그것을 남용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영원한 경험이다.”2 그는 이 남용을 막는 유일한 방법이 권력으로 권력을 막는 것, 즉 서로 다른 기관이 서로를 견제하도록 설계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법률의 위임을 넘어서는 영역을 시행령으로 메우려 할 때, 법치(Rule of Law)는 자칫 ‘법을 수단 삼은 통치(Rule by Law)’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경고를 남긴다. 플라톤이 철인왕(哲人王)에게 기대했던 것 역시 결국 이 경계선이었다 — 최선의 통치자조차 자신을 묶을 제도 없이는 그 최선을 보장받기 어렵다는 성찰이다.
동양이 ‘책임질 사람의 부재’를 걱정했다면, 서양은 ‘견제할 구조의 부재’를 걱정한 셈이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은 공교롭게도 이 두 가지 우려가 포개지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세 기관, 같은 여름
노동부는 법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우려를 두 차례 밝혔으나 결국 ‘적극 검토’로 물러섰다. 대법원은 헌정사 최초로 제청이 반려되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 두 지점은 권력이 집중되는 자리다. 그런데 같은 시기, 정반대의 그림 하나가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 경찰청이다. 여기서 문제는 권력의 과잉이 아니라 진공에 가깝다.
조지호 전 경찰청장이 2024년 12월, 12·3 비상계엄 관여로 탄핵소추된 이후 — 헌법재판소가 이듬해 12월 파면을 확정하기까지 — 경찰청은 지금까지 1년 8개월 남짓 직무대행 체제로 운용되고 있다. 그사이 국가수사본부장 자리마저 한때 공석이 되는 초유의 상황이 겹치기도 했다. 오는 10월, 검찰의 보완수사권이 전면 폐지되면서 형사사건 수사 권한은 경찰로 완전히 이양될 예정이다. 한쪽에서는 권한이 시행령 하나, 제청 하나를 두고도 팽팽하게 다투어지는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14만 명 조직 전체의 권한이 20개월째 수장이 부재한 조직으로 옮겨가고 있다. 권력의 과잉과 진공이라는 상반된 풍경이 같은 정부 아래 같은 여름에 번갈아 나타나고 있다.6
이 공백과 앞선 글에서 살펴본 사례들 — 광주에서 여고생 살해 사건의 증거를 없앤 정황, 연이은 제주 실종 사건에서 되풀이된 허위 종결 처리, 그리고 접근금지명령을 어긴 전직 경찰관이 배우자를 살해한 사건8 — 이 정확히 어떤 인과로 연결되는지는 아직 단정하기 어렵다. 광주 사건의 증거인멸이 개별 경찰관의 독단이었는지, 지휘 라인의 판단이었는지는 검찰 특별수사단이 지금도 규명 중이다. 다만 한 매체는 이미 “1년 8개월째 청장 공백”과 “예견된 부실 수사”를 나란히 놓으며 의문을 제기했다(뉴데일리, 2026.8.26). 이러한 시선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는, 그 공백이 고스란히 국민 피해로 귀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세 기관을 나란히 놓으면 공통의 결이 드러난다. 노동부에서는 이견이 결국 관철되는 자리로, 대법원에서는 관행이 흔들리는 자리로, 경찰청에서는 책임질 얼굴 자체가 사라지는 자리로 — 권한이 이동할 때마다 그 반대편에 있어야 할 무언가는 조용히 옅어진다. 이것이 대통령 개인의 판단에 따른 것인지, 임기 초반의 구조적 현상인지, 혹은 인선 절차의 우연한 지연들이 겹친 결과인지는 지금 시점에서 단정하기 어렵다. 다만 같은 여름, 같은 정부 아래서 세 곳의 견제 지점이 동시에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 관계만큼은 분명하게 짚어둘 수 있다.
우리가 아직 확인하지 않은 얼굴
루스벨트의 법원 개편안은 결국 그 자신의 정당 내부에서, 그리고 법원 스스로의 판단 안에서 제동이 걸렸다. 견제는 때로 반대편이 아니라, 같은 편 안에서 살아남은 상식으로부터 시작되기도 한다. 한국의 이번 여름은 아직 그 결말에 도달하지 않았다. 노동부의 우려는 물러섰고, 대법원의 답은 아직 나오지 않았으며, 경찰청의 빈자리는 다음 인선을 기다리고 있다.
* 참고할 말씀: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 — 잠언 29:2
각주
1. 荀子, 『荀子』君道篇, “有良法而乱者有之矣,有君子而乱者,自古及今未尝闻也”
2.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11부 4장
3. 노란봉투법 노동쟁의 범위 관련 대통령 지시 및 고용노동부 대응(2026.7.21, 2026.8.11) — 2026년 8월 보도 종합
4. 대법관 후보자 제청 반려 관련 청와대·대법원 갈등(2026.8.28) — 2026년 8월 보도 종합
5. 프랭클린 루스벨트 사법절차 개혁법안 및 오언 로버츠 판결 전환(1937.2~1937.7) 관련 역사적 사실 — 공개 역사 자료 종합
6. 경찰청장 직무대행 체제 장기화(2024.12~) 및 청장 공백-부실수사 연관 보도(뉴데일리, 2026.8.26) — 2026년 8월 보도 종합
7. 제주 실종 신고 허위 종결 처리 반복 발생(장미란씨 사건 등) — 경향신문(2026.8.23), 연합뉴스(2026.8.29) 보도 종합
8. 제주 전직 경찰관의 가정폭력 접근금지명령 위반 및 배우자 살해 사건(2026.8.23~25) — 2026년 8월 보도 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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