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통의 기름이 국경을 그렸다
석유, 두 번의 세계대전, 그리고 길목이 된 나라들
2026.10.30 · 역사 · 세계사 · 세계사-물자-⑫
폭 55킬로미터의 목
2026년 2월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격하면서 시작된 전쟁은 여덟 달이 지난 지금도 호르무즈 해협을 흔들고 있다. 이 해협의 전체 폭은 약 55킬로미터이고, 유조선이 실제로 다닐 수 있는 항로는 그중 10킬로미터 안팎이다.¹ 평시에는 세계 해상 석유 교역의 4분의 1 안팎이 이 좁은 물목을 지난다.²
10월 들어 브렌트유는 배럴당 100달러 안팎에서 움직이고 있다. 미국 에너지부 장관은 해협을 통과하는 원유 수송량이 전쟁 이전의 약 80%까지 돌아왔다고 밝혔다.³ 그러나 선박에 대한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회복되었다는 말과 안전해졌다는 말은 같은 뜻이 아니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바나나 한 송이를 둘러싼 철도와 항구와 계약이 한 나라의 선택지를 어떻게 좁혔는지 살펴보았다. 이번에 다룰 석유는 그 의존의 문제를 세계 규모로 넓힌 물자다. 고무와 바나나가 한 지역의 장부를 바꾸었다면, 석유는 20세기 세계의 국경과 세력 관계를 다시 짜는 데 깊이 관여했다.
그 배경은 20세기 초, 영국 해군이 석탄에서 석유로 연료를 바꾸기 시작한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석유를 택한 해군, 선을 그은 열강
1859년 8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타이터스빌에서 에드윈 드레이크가 유정을 뚫었다. 근대 석유 산업의 출발점으로 꼽히는 장면이다.⁴ 한동안 석유는 등불을 켜는 등유였다. 석유는 군함의 보일러와 차량·항공기의 내연기관에 쓰이면서 전쟁 수행에서 점차 중요해졌다.
1911년 10월 윈스턴 처칠이 영국 해군장관에 취임했다. 당시 영국 해군은 웨일스 탄광의 석탄을 연료로 쓰는 세계 최강의 함대였다. 석유를 쓰는 군함은 속도가 빠르고, 연료를 싣는 데 드는 시간과 인력이 적었다.⁵ 문제는 영국 땅 밑에 석유가 없다는 점이었다. 석탄에서 석유로의 전환은 해군이 자국산 석탄 대신 해외에서 들여오는 석유에 의존하게 된다는 뜻이었다. 이 전환은 하루아침에 끝나지 않았고, 처칠 자신도 1914년 6월 의회에서 해군이 앞으로 상당 기간 석탄에 크게 의존할 것이라고 설명했다.⁵
영국이 눈을 돌린 곳은 페르시아였다. 1908년 5월 이곳에서 상업적 유전이 발견되었고, 1914년 6월 영국 의회는 이 유전을 개발하던 앵글로-페르시안 석유회사의 지분 과반을 정부가 사들이는 안을 승인했다.⁶ 영국 정부가 해군의 연료 공급을 확보하기 위해 석유회사의 대주주로 나선 것이다. 해군이 자국산 석탄 대신 해외 석유에 기대기 시작한 순간, 안보의 경계도 자국 밖으로 나갔다.
대항해시대 시리즈가 따라간 다섯 번의 패권 이동은 모두 바다 위에서 벌어졌다. 석유 시대에는 함대뿐 아니라 유전과 수송로를 확보하는 일도 패권 경쟁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영국은 같은 해 11월 인도에서 온 부대를 이라크 남부의 바스라에 상륙시켰다. 페르시아의 정유소와 송유 시설을 지키는 일이 목적의 하나였다. 전차와 트럭, 군함과 비행기가 석유로 움직인 전쟁이었다. 종전 직후인 1918년 11월, 영국의 커즌 경은 연합국이 석유의 물결 위에 실려 승리에 이르렀다는 취지로 말했다고 전해진다.⁷
전쟁 중과 종전 후의 협상에서 열강은 영토의 지배권과 석유 개발권을 함께 다루었다. 1916년 5월 영국과 프랑스는 사이크스-피코 협정으로 오스만 제국의 중동 영토에 설정할 세력권의 경계를 그었다. 1920년 4월 산레모 회의에서는 모술 지역 석유의 지분을 따로 합의했다. 1927년 10월 이라크 북부 키르쿠크 근처 유정에서 석유가 솟구치자 이라크석유회사가 본격적으로 움직였고, 1928년에는 영국·프랑스·네덜란드·미국계 회사들이 옛 오스만 영토 안에서는 각자 따로 개발하지 않고 공동으로만 개발하기로 하는 ‘붉은 선 협정’을 맺었다. 그 선은 협상을 이끈 사업가 굴벤키안이 지도 위에 붉은 연필로 그었다고 전해진다.⁸ 그 선은 현지 주민이 아니라 열강과 회사들이 정한 개발 구역의 경계였다.
제2차 세계대전은 석유 없이는 전쟁을 이어 갈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일본은 석유의 대부분을 미국에서 들여오고 있었다. 1941년 7월 미국이 일본의 자산을 동결하고 8월 석유 수출을 사실상 막자, 남방의 네덜란드령 동인도 유전을 확보하는 문제가 일본 지도부의 핵심 과제로 떠올랐다. 같은 해 12월의 진주만 공격도 이러한 자원 확보 구상과 대미전 판단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⁹ 독일은 1942년 여름 남쪽 카프카스 유전 지대를 향해 공세를 폈다가 스탈린그라드의 패배와 함께 멈췄고, 1944년 5월부터는 연합군의 폭격이 합성연료 공장을 겨냥했다. 병력과 무기가 남아 있어도 연료가 끊긴 군대는 움직이기 어렵다.
연합국은 석유 공급 여건에서 상대적으로 유리했다. 연합국이 쓴 석유의 압도적 다수는 미국의 유전에서 나왔다.¹⁰ 그리고 1945년 2월 14일, 얄타 회담을 마치고 돌아가던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가 수에즈 운하 근처 그레이트 비터 호에 정박한 순양함 퀸시호 위에서 사우디아라비아의 이븐 사우드 왕을 만났다.¹¹ 미국 기업이 사우디에서 양허를 얻은 것은 1933년, 상업 유전이 확인된 것은 1938년 3월이었다. 이 만남은 석유만을 의제로 삼은 자리가 아니었지만, 전후 미국과 사우디 관계의 출발점으로 자주 언급된다.
전후에는 석유의 소유권과 가격 결정권을 둘러싼 갈등이 이어졌다. 1951년 이란은 영국계 앵글로-이란 석유회사를 국유화했다. 석유에서 나오는 이익을 외국 회사가 아니라 자국이 갖겠다는 선택이었고, 영국은 크게 반발했다. 1953년 8월에는 영국 비밀정보국과 미국 중앙정보국이 이란의 군부와 왕당파를 움직여 국유화를 이끈 모사데크 총리를 몰아냈다. 총리가 쿠데타로 물러나면서 국왕의 권력은 더 강해졌고, 미국 정부도 2013년 공개한 기밀 해제 문서로 이 개입을 확인했다. 1960년 9월 산유국들은 바그다드에서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만들었다.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 중 아랍 산유국들이 석유 금수와 감산에 나서자, 배럴당 3달러 안팎이던 가격은 몇 달 만에 네 배 가까이 뛰었다.¹² 산유국들이 가격과 생산량에 대한 영향력을 넓히려 한 전환점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땅을 가진 나라가 곧 길을 가진 나라는 아니었다.
붙잡으려는 자는 놓친다
노자는 천하를 다루려는 자들에게 이렇게 경고했다.
將欲取天下而為之,吾見其不得已。天下神器,不可為也。為者敗之,執者失之。
(장욕취천하이위지,오견기부득이。천하신기,불가위야。위자패지,집자실지。)
“천하를 취하려고 억지로 손을 대는 자가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나는 본다. 천하는 신령한 그릇이라 억지로 만들 수 없다. 억지로 하는 자는 패하고, 움켜쥐는 자는 잃는다.”¹³
붉은 연필로 그은 선은 지도 위에서는 단단했다. 그러나 선 아래의 기름은 선을 따라 흐르지 않았다. 1953년 이란에서 미국과 영국 정보기관이 개입해 일으킨 쿠데타는, 국유화를 택한 나라의 정부를 바깥의 힘이 무너뜨렸다는 기억으로 남아 이란과 서방 사이의 불신을 깊게 한 사건으로 평가된다.¹⁴ 1973년의 금수는 석유를 쓰는 나라들의 질서가 산유국의 공급과 협조에 얼마나 의존했는지를 드러냈다. 노자가 말한 신기(神器)는 중동의 땅 밑에도 들어맞는다. 움켜쥐려는 손이 커질수록 놓치는 속도도 빨라진다.
한비자는 변화 앞의 대비를 이렇게 말했다.
世異則事異,事異則備變。
(세이즉사이,사이즉비변。)
“세상이 달라지면 일이 달라지고, 일이 달라지면 대비도 바뀌어야 한다.”¹⁵
영국 해군의 연료 전환도 변화한 기술과 군사 환경에 대응한 사례다. 연료를 바꾼 판단은 합리적이었다. 다만 대비가 바뀔 때는 취약점도 함께 바뀐다. 새 연료는 새 속도와 함께 새 의존을 들여왔다.
서양에서는 마키아벨리가 『군주론』 13장에서 남의 힘에 기댄 군대를 경계했다. 그는 자기 힘에 뿌리를 두지 않은 권력의 명성처럼 약하고 불안정한 것은 없다고 썼다.¹⁶ 그가 겨눈 것은 용병과 원군이었다. 그러나 이 문장은 군대뿐 아니라 연료에도 들어맞는다. 남의 땅에서 나와 남의 바다를 건너오는 연료에 기댄 힘은, 공급이 흔들리는 순간 움직일 수 있는 폭이 급격히 좁아진다.
기름이 아니라 길목이 권력이었다
앞서 살펴본 석유사에서는 세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첫째는 연료의 위치다. 1911년의 영국, 1941년의 일본, 1942년의 독일은 처지와 선택이 달랐지만, 필요한 연료를 안정적으로 확보해야 한다는 과제는 공통적이었다. 밖에 있는 연료에 기댄 나라는 군사력의 크기와 별개로 외교와 항로에 안보를 맡겼다. 20세기의 석유는 매장량의 문제이기 이전에 위치의 문제였다.
둘째는 선과 흐름의 차이다. 1916년과 1928년의 지도 위 선은 당대의 강자들이 그었다. 그러나 선 아래의 석유가 누구의 것인지는 1951년과 1973년에 다시 물어졌다. 지도는 힘이 있을 때 그려지고, 힘의 균형이 바뀔 때 다시 그려진다.
셋째는 길목이다. 석유를 가진 나라와 석유가 지나는 길을 쥔 쪽이 다르면, 수송로를 통제하거나 위협할 수 있는 쪽도 공급량과 거래 비용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가격을 정하는 힘과 운송에 차질을 일으키는 힘은 다르지만, 시장은 둘 모두에 반응한다. 이번 전쟁이 이 원리를 다시 보여 주고 있다. 한국 정유사들은 호르무즈 통항에 차질이 생기자, 사우디의 홍해 연안 항구에서 출하되는 원유로 공급 부족을 보완했다. 그런데 7월에 예멘 후티 반군이 홍해 점거를 선언했고, 10월에는 사우디 얀부의 아람코 시설을 공격했다고 주장했다.¹⁷ 우회로를 만들면 그 우회로도 새로운 길목이 된다.
고무와 바나나가 보여 준 것은 한 물자에 기댄 나라의 선택지가 어떻게 좁아지는가였다. 석유는 같은 문제를 한 지역이 아니라 문명 전체의 크기로 키웠다. 철도와 항구를 쥔 회사의 자리에 이제 해협과 송유관을 쥔 쪽이 서 있을 뿐이다.
비축일수가 말해 주지 않는 것
한국은 2025년 기준으로 원유의 69.1%를 중동에서 들여왔고, 그중 95% 이상이 호르무즈 해협을 지났다.¹⁸ 정부는 지난 3월 정부와 민간의 비축량에 추가 확보 가능한 물량을 합쳐 208일분의 대응 여력이 있다고 밝혔다.¹⁹ 비축은 공급 충격을 견딜 시간을 벌어 준다. 그러나 그 시간을 버티는 데 얼마가 들지는 비축일수만으로 알기 어렵다. 운임과 보험료, 원유 가격의 상승 폭과 지속 기간은 그 숫자에 담겨 있지 않다.
이 취약성에 대응하려면 국회의 예산 심사에서도 구체적인 선택이 필요하다. 10월 6일 시작한 국정감사는 30일 끝날 예정이고, 이어 820조 9천억 원 규모의 2027년도 예산안 심사가 기다리고 있다.²⁰ 비축 확대와 수입선 다변화, 수송로 차질에 대한 대비에 얼마를 배정할 것인가. 그 예산으로 공급 중단의 위험을 얼마나 줄일 수 있는가. 해협은 국회의 일정표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물어야 할 것은 비축유가 며칠 남았느냐만이 아니다. 누가 공급을 막을 수 있고, 그때 한국은 어디서 원유를 구해 어느 길로 들여올 수 있는가. 위기가 닥친 뒤에도 확보할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이며, 미리 준비해야만 가능한 대안은 무엇인가.
한국은 원유를 수입하면서, 그 원유가 지나는 길의 위험도 함께 떠안는다. 이 의존은 하루아침에 줄일 수 없다. 그러나 의존을 줄이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은 준비를 미룰 이유가 되기 어렵다. 대비를 늦출수록 구조적 취약성에는 정책적 선택의 책임도 더해질 수 있다.
1911년 처칠의 취임 이후 영국 해군이 추진한 연료 전환과 2026년 호르무즈의 긴장은 서로 다른 조건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해외의 연료와 수송로에 의존할수록, 자국의 군사력과 경제력만으로 통제하기 어려운 위험이 커질 수 있다는 점에서는 맞닿아 있다.
먼바다의 길목은 국내의 물가와 생업으로 이어진다. 그 길목을 통제하기는 어려워도, 그 길목에 얼마나 의존할지는 우리가 바꾸어 갈 수 있다. 바라보는 자의 기록은 먼 곳의 사건이 우리의 선택과 만나는 지점을 계속 기록한다.
* 참고할 말씀: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인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터진 웅덩이라 물을 저장할 수 없느니라’ — 예레미야 2:13
1. 호르무즈 해협 폭 약 55km, 유조선 통항 가능 구간 10km 안팎. 「한국, 석유 비축 세계 6위…호르무즈 봉쇄에도 단기 대응 ‘충분’」, KNN, 2026.3.5.
2. 호르무즈 해협 통과량은 세계 해상 석유 교역의 4분의 1 이상, 세계 석유 소비의 약 5분의 1. U.S. Energy Information Administration, Today in Energy(2024년 및 2025년 1분기 기준).
3. 브렌트유 10월 6일 종가 101.62달러(EIA 단기에너지전망 관련 보도), 10월 중순 105달러대. 미 에너지부 장관의 원유 수송량 회복 발언은 「호르무즈 해협 선박 공격에 공급 회복 우려…유가 5개월 만의 최고치 근처」, Investing.com(로이터 인용), 2026.10.20.
4. 드레이크 유정, 1859년 8월 27일 타이터스빌.
5. 처칠의 해군장관 취임 1911년 10월과 해군 연료 전환: Daniel Yergin, The Prize (1991). 처칠의 1914년 6월 하원 발언: UK Parliament, Hansard.
6. 페르시아 유전 발견 1908년 5월, 영국 정부의 앵글로-페르시안 석유회사 지분 과반 확보 1914년 6월. Yergin, The Prize.
7. 커즌의 발언은 1918년 11월 연합국 석유회의 연설로 전해지며, 표현은 문헌에 따라 다르다.
8. 사이크스-피코 협정(1916.5), 산레모 석유 합의(1920.4), 키르쿠크 바바 구르구르 유정(1927.10), 붉은 선 협정(1928.7). Yergin, The Prize. 굴벤키안의 붉은 연필 일화는 전승이다.
9. 미국의 일본 자산 동결(1941.7.26)과 석유 수출 제한(1941.8). Yergin, The Prize.
10.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국 석유 공급에서 미국이 차지한 비중. Yergin, The Prize.
11. 루스벨트·이븐 사우드 회동, 1945년 2월 14일 퀸시호. 사우디 양허 1933년, 달맘 7호정 성공 1938년 3월.
12. 이란 국유화(1951), 모사데크 축출(1953.8), OPEC 결성(1960.9), 1973년 10월 금수 조치와 가격 상승. Yergin, The Prize. 1953년 쿠데타에 대한 CIA의 관여는 2013년 공개된 기밀 해제 문서로 확인되었다.
13. 노자, 『도덕경』 29장. 판본에 따라 ‘不可執也’의 포함 여부가 다르며, 여기서는 이 구절을 뺀 형태를 인용했다.
14. 1953년 쿠데타의 이후 영향에 관한 평가: Ervand Abrahamian, The Coup: 1953, the CIA, and the Roots of Modern U.S.-Iranian Relations (2013).
15. 한비자, 「오두(五蠹)」.
16. 마키아벨리, 『군주론』 13장.
17. 「이란전 이후 사우디산 의존 더 커졌는데…후티 협박에 화들짝」, 경향신문, 2026.7.21. 후티 반군의 얀부 아람코 시설 공격 주장은 로이터 인용 Investing.com 보도(2026.10.20)이며, 실제 피해 규모는 별도 확인이 필요하다.
18. 한국석유공사 집계, 2025년 기준 중동 의존도 69.1%, 호르무즈 경유 95% 이상. 「호르무즈 봉쇄 ‘비상등’…한국, 비축유 208일분으로 버틸까」, 토요경제, 2026.3.5.
19. 정부 비축 7,648만 배럴, 민간 비축 7,383만 배럴, 3개월 내 추가 확보 가능 3,500만 배럴을 합산한 208일분. 산업통상부 발표(2026.3.3), 위 토요경제 보도.
20. 2026년 국정감사(10.6~30) 일정과 2027년도 예산안 820조 9천억 원 관련 보도(202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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