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화공주는 어디로 갔나

새벽 안개가 깔린 소백산맥의 성벽 위에서 건너편 산성을 바라보는 백제 무왕
안개 너머 적국의 산성을 바라보는 백제 무왕. 신라와 오랜 전쟁을 벌였던 시대

선화공주는 어디로 갔나

무왕, 서동 설화, 그리고 사십 년 동안 끝나지 않은 신라와의 전쟁

2026.10.30 · 한국사


금판에 새겨진 이름은 선화공주가 아니었다

2009년 1월, 전북 익산 미륵사지 서쪽 석탑의 심주석에서 나온 사리봉안기가 공개되었다. 가로 15.5센티미터, 세로 10.5센티미터의 금판 앞뒷면에 글자를 새긴 뒤, 글자마다 붉은 칠을 한 유물이었다.¹ 금판에는 탑에 사리를 모신 날이 기해년(639년) 정월 스무아흐레로 적혀 있고, 재물을 내어 절을 세운 이는 ‘백제 왕후’로 밝혀져 있었다.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¹

천 년 넘게 우리가 알아 온 이야기는 달랐다. 『삼국유사』 무왕 조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의 청으로 미륵사가 세워졌다고 전한다. 마를 캐어 팔던 소년 서동은 서라벌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 주었다. 그러면서 선화공주가 밤마다 남몰래 자신의 방을 찾는다는 노래를 퍼뜨렸다. 궁에서 쫓겨난 공주는 서동과 맺어졌고, 훗날 왕이 된 서동이 그 절을 세웠다는 이야기다.²

금판이 나온 뒤 학계의 반응은 갈렸다. 서동 설화를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로 보는 쪽이 있었고, 무왕의 재위가 사십 년이 넘으니 639년에 기록된 왕후에 앞서 다른 왕비가 있었을 가능성을 열어 두는 쪽도 있었다.³ 논쟁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금판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왕후가 재물을 내어 절을 세웠다는 사실, 그리고 639년 정월에 사리를 모셨다는 사실이다.

선화공주의 실존 여부는 이 글의 주제에서 다소 벗어나 있다. 던지려는 질문은 다른 데 있다. 왜 하필 신라의 공주였는가. 무왕은 재위 기간에 신라를 거듭 공격했다. 그런데 그 왕에게 붙은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신라 공주와의 사랑이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관산성에서 아버지를 잃은 위덕왕이 45년 동안 능산리의 향로와 왕흥사의 사리기를 남기며 패배 이후의 힘을 쌓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위덕왕이 세상을 떠난 뒤 아우 혜왕과 혜왕의 아들 법왕이 짧게 재위했다. 이어 600년 왕위에 오른 이가 무왕이다. 그가 물려받은 것은 지켜야 할 왕실만이 아니었다. 갚아야 할 전선도 함께 물려받았다.

사십 년 동안 이어진 전선

『삼국사기』는 무왕을 법왕의 아들로 적고, 『삼국유사』는 연못의 용과 과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전한다.⁴ 즉위 3년째인 602년, 무왕은 군사를 보내 신라의 아막성을 공격했다. 『삼국사기』에는 616년에도 같은 성(모산성이라고도 부른다)을 공격한 기록이 있다.⁵ 지금의 전북 남원 운봉고원 일대로 추정되는 이 성은, 철 산지가 있는 고원을 차지하기 위해 백제와 신라가 20여 년 동안 다툰 곳으로 알려져 있다. 2020년 남원시의 발굴조사에서는 6세기 중반에서 7세기 초반에 만든 신라 토기가 나왔고, 기록에 나타난 성의 사용 시기와 대체로 부합한다는 평가가 나왔다.⁶

624년에는 백제의 공격이 소백산맥 동쪽으로 확대된 것으로 보는 연구가 있다. 무왕 말년부터는 공격이 신라의 하주 방면에 집중되었고, 그 흐름은 아들 의자왕 때인 642년 대야성 점령으로 이어졌다.⁷

이 시기의 전쟁은 주변 정세와도 맞물려 있었다. 순서대로 따라가 보자.

먼저 수나라가 있었다. 중국을 통일한 수가 고구려 원정을 거듭 준비하자 백제는 이를 외교적 기회로 삼으려 했다. 한 연구는 백제가 600년 무렵 수의 원정에 편승해 길잡이를 자청했고, 611년 원정이 가시화되자 출병 시기를 물었으며, 원정이 실제로 벌어진 612년에는 직접적인 군사 행동까지 도모했다고 본다. 같은 연구는 『삼국사기』가 『수서』의 기사를 가져오면서 백제에 대한 의혹을 담은 대목은 옮기지 않았다고 지적한다.⁸

바다 건너 왜도 수와 외교 관계를 맺으려 했다. 607년 왜는 수에 사신을 보내 국서를 전했다고 『수서』는 적는다.⁹ 수라는 거대한 중심이 서자, 백제도 신라도 왜도 저마다 그 중심에 닿는 길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는 612년부터 거듭된 고구려 원정에 실패했고,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 속에 무너졌다. 618년 그 자리에 당이 들어섰다.¹⁰ 당은 621년 말부터 신라, 서돌궐, 고구려, 백제에 화친을 권하는 사신을 보냈다.¹¹ 중원의 새 제국이 이웃들에게 싸움을 멈추라고 권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같은 시기 지중해 건너편에서는 두 제국이 서로를 소진시키고 있었다. 이야기는 십여 년 앞선 590년에 시작된다. 사산조 페르시아에서 장군 바흐람 초빈이 반란을 일으켜 왕 호스로 2세를 쫓아냈고, 쫓겨난 호스로는 동로마 영내로 피신해 황제 마우리키우스에게 도움을 청했다. 마우리키우스는 군대를 내주어 이듬해 호스로를 왕좌에 복귀시켰고, 호스로는 그 대가로 아르메니아 등지의 영토를 넘겨주었다. 전승은 호스로가 이 황제를 아버지처럼 불렀다고 전한다.

그런데 602년, 병사들의 반란으로 마우리키우스가 살해되고 군인 출신 포카스가 제위에 올랐다. 호스로 2세는 은인의 복수를 내세우며 군사를 일으켰고, 두 제국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다만 많은 연구자는 이 복수를 명분으로 보고, 앞서 내준 변경을 되찾으려는 계산과 제국이 흔들리는 틈을 노린 판단이 함께 있었을 것으로 해석한다. 602년은 무왕이 아막성을 공격한 바로 그해다.¹²

전쟁은 길게 이어졌다. 페르시아군은 614년 예루살렘을 점령했고 이어 이집트까지 차지했다. 626년에는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포위되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반격으로 627년 전세가 뒤집혔다. 628년 호스로 2세가 아들 카바드 2세의 정변으로 제거되면서 평화가 맺어졌고, 26년의 전쟁이 끝났다.¹² 그러나 승자와 패자 모두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아라비아반도에서 일어난 이슬람 공동체의 군대가 636년 야르무크에서 동로마군을 꺾었고, 사산조는 651년에 멸망했다.¹²

중원에서는 수가 무너지고 당이 섰고, 지중해에서는 동로마와 사산조가 서로를 소진시켰다. 두 곳에서 같은 일이 벌어진 셈이다. 큰 중심이 흔들리거나 재편되는 시기에 변경의 나라들은 새 중심에 닿는 길을 찾는다. 중심이 흔들리는 시기에 변경의 전쟁은 중심의 판 위에서 치러진다. 백제와 신라는 바로 그 변경에 있었다. 다시 한반도로 돌아오자.

삼국의 전선은 그 권고 뒤에도 멈추지 않았다. 무왕 말년인 631년에는 왕자 풍을 왜에 보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있다.¹³ 백제는 수에서 당으로, 왜로, 여러 방향으로 손을 뻗고 있었고, 그렇게 뻗은 손들의 끝에서 신라를 향한 칼은 계속 움직였다.

달팽이 뿔 위의 두 나라

『장자』 칙양편에는 달팽이 뿔 위의 전쟁 이야기가 나온다.

有國於蝸之左角者曰觸氏,有國於蝸之右角者曰蠻氏,時相與爭地而戰,伏尸數萬。
(유국어와지좌각자왈촉씨,유국어와지우각자왈만씨,시상여쟁지이전,복시수만。)
“달팽이 왼쪽 뿔에 나라를 둔 이는 촉씨라 하고, 오른쪽 뿔에 나라를 둔 이는 만씨라 한다. 때때로 서로 땅을 다투어 싸우니, 쓰러진 시체가 수만이었다.”¹⁴

이 우화는 승패보다 시야의 넓이를 묻는다. 우주의 넓이에서 보면 두 나라가 다투는 땅은 달팽이 뿔 하나만 하다. 백제와 신라가 오랫동안 다툰 운봉고원의 성도, 시야를 넓히면 달팽이 뿔 위의 땅처럼 보일지 모른다. 다만 그 뿔 위에서 죽어 간 사람의 수는 결코 작지 않았다.

백제의 바깥 외교는 전국시대 범저의 계책을 닮아 있다. 『사기』 범저채택열전에 나오는 말이다.

王不如遠交而近攻,得寸,則王之寸也;得尺,亦王之尺也。
(왕불여원교이근공,득촌,즉왕지촌야;득척,역왕지척야。)
“왕께서는 먼 나라와 사귀고 가까운 나라를 치는 편이 낫습니다. 한 치를 얻으면 왕의 한 치요, 한 자를 얻어도 왕의 한 자입니다.”¹⁵

무왕이 이 구절을 읽고 따랐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수·당·왜와 손을 잡고 신라를 치는 구도가 이 계책이 그리는 모양과 거의 같았다는 점은 짚어 둘 만하다. 범저의 말은 한 치씩 늘어나는 이익을 약속한다. 그 이익이 사십 년 동안 실제로 쌓였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철학은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먼 나라와 사귀는 동안 가까운 나라가 한 일

642년, 신라 왕 덕만이 보낸 사신이 당에 구원을 요청했다고 『삼국사기』는 적는다.¹⁶ 그리고 18년 뒤인 660년, 백제는 나당 연합군 앞에 무너졌다. 무왕이 수·당·왜와 맺은 외교 관계는 백제를 지탱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방식은 맞은편에서도 작동했다. 가까운 나라를 계속 치는 동안, 그 가까운 나라는 더 먼 곳에서 친구를 찾았다. 먼 나라와 손잡고 가까운 나라를 치는 전략은, 맞은편이 더 먼 나라와 손잡는 순간 같은 모양으로 되돌아온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서동 설화는 적국의 공주와 맺어지는 이야기이고, 금판이 말하는 왕후는 자국 대귀족의 딸이다. 이야기는 전쟁의 바깥에서 결말을 꿈꾸고, 기록은 전쟁을 치르는 왕실이 실제로 기댄 곳을 보여 준다. 무왕이 익산에 왕궁과 미륵사를 세운 일을 사비의 귀족 세력과의 관계 속에서 읽는 견해도 있다.¹⁷ 이야기가 적과 손을 잡는 동안, 기록은 안쪽 귀족과 손을 잡았다.

여기에 전쟁이 만드는 서사의 구조가 있다. 수십 년 이어진 전선 위에서 사람들은 전선 바깥의 결말을 상상하기 마련이다. 설화가 공주를 적국에서 데려오고, 사찰이 그 공주의 이름으로 기억되고, 노래가 아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건너는 동안 신라와의 전쟁은 거듭 이어졌다. 끝나지 않는 전쟁은 땅만이 아니라 이야기도 바꾼다.

오늘의 한국 정치에서도 대립이 이야기를 바꾸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정치 유튜브와 온라인 공간에서는 같은 사건도 지지하는 진영에 따라 다른 이야기로 전해지곤 한다. 2026년 발표된 한 연구는 정치 유튜브 이용이 자기 진영에 대한 자부심을 거쳐 상대 진영을 향한 적대적 행동 의향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제시했다.¹⁸ 문제는 의견이 다르다는 데 있지 않다. 우리 편의 잘못은 사정으로 설명하고 상대편의 잘못은 본성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이야기는 사실을 살피는 일을 대신할 수 있다. 그렇게 굳어진 이야기 속에서는 상대의 고통마저 의심의 대상이 되기 쉽다. 대립이 오래될수록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익숙한 이야기가 끝내 보지 못하게 하는 사람의 얼굴일지 모른다.

노래는 남고 이름은 흔들린다

서동요는 서라벌의 아이들이 불렀다고 전해지는 노래다. 이야기의 출발이 백제의 궁정이 아니라 신라의 골목이었다는 점은 흥미롭다. 가장 치열하게 싸운 상대의 땅에서, 상대 왕의 연애담이 먼저 퍼졌다는 설정이기 때문이다. 이 설정이 후대의 윤색인지, 어떤 기억의 흔적인지는 알 수 없다.

639년 정월 사택왕후가 탑에 사리를 모신 뒤 2년이 지난 641년, 무왕이 세상을 떠났다. 무왕 때의 대립은 아들 의자왕 대에도 이어졌다. 의자왕은 대야성을 함락했지만, 그로부터 18년 뒤 백제는 멸망했다.

금판에 새겨진 이름은 선화가 아니었지만, 노래는 천 사백 년 가까이 건너 지금도 불린다. 땅을 얻은 왕의 전공보다 국경을 넘어 맺어졌다는 이야기가 오래 남는다.

바라보는 자의 기록이 묻는 것은 하나다. 우리가 지금 부르는 노래는 무엇의 이름을 가리고 있는가.


* 참고할 말씀: ‘너희 중에 싸우는 것과 다투는 것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 야고보서 4:1

¹ 미륵사지 석탑 사리봉안기(2009 공개). 번역은 김상현 교수 번역을 보도한 한국경제(2009.1.29) 참조.

² 『삼국유사』 권2 기이 무왕(武王) 조.

³ 서울신문(2009.1.21), 주간경향(2021.11).

⁴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 조, 『삼국유사』 무왕 조.

⁵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 3년(602), 17년(616).

⁶ 남원시 아막성 발굴조사 학술자문회의 보도(전북일보, 2020.11.17).

⁷ 김창석, 「6세기 후반~7세기 전반 백제·신라의 전쟁과 대야성」.

⁸ 윤경진, 「7세기 초 백제의 對隋 군사외교와 史書의 인식」(2021).

⁹ 『수서』 동이전 왜국(倭國) 조(대업 3년, 607).

¹⁰ 수의 고구려 원정 실패와 멸망, 618년 당 건국.

¹¹ 염경이, 「당 고조대 사신파견과 외교」(전북사학 35, 2009).

¹² Walter E. Kaegi, Heraclius: Emperor of Byzantium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Hugh Kennedy, The Great Arab Conquests (Da Capo Press, 2007). 연도만 표기했고 월은 원전 대조 전이다.

¹³ 『일본서기』 서명기 3년(63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부여풍’.

¹⁴ 『장자』 칙양편.

¹⁵ 『사기』 범저채택열전.

¹⁶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조.

¹⁷ 익산 경영과 귀족 세력의 관계에 대한 학계 논의(김주성, 정재윤 등 연구 참조).

¹⁸ 정치 유튜브 이용과 내집단 의식·태도극화의 관계를 다룬 국내 연구 참조(예: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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