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는 사라졌고 백제는 남았다

475년 한성 함락 후 불타는 왕도를 뒤로하고 구름다리 형태의 피난민 행렬을 이끄는 백제 왕자의 모습
475년 고구려의 공격으로 한성이 함락된 직후, 불타는 도읍을 뒤로하고 금강 변을 따라 웅진으로 향하는 백제 피난민 행렬.

로마는 사라졌고 백제는 남았다

문주왕, 동성왕, 그리고 폐허의 도읍에서 나라를 다시 세우는 방식

2026.10.21 · 역사 · 한국사

도읍을 잃은 나라는 어떻게 되는가

475년, 한강 변의 도읍 한성이 무너졌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 장수왕이 이끈 3만 병력이 성을 에워쌌고, 개로왕은 성을 빠져나가려다 붙잡혀 처형되었다.¹ 건국 전승으로는 기원전 18년까지 거슬러 오르는 도읍, 대대로 쌓은 궁궐과 종묘와 사직이 며칠 사이에 적의 손에 넘어갔다.

그 무렵 지중해 반대편에서도 도읍이 주저앉고 있었다. 476년, 게르만 출신 군대 지휘관 오도아케르가 서방의 마지막 황제로 기록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했다. 이탈리아에서 서방 황제의 계보는 이때 사실상 끊겼다.² 한성 함락과 서로마 황제 폐위는 한 해 차이다.

두 사건 사이에 직접적인 연결은 없다. 백제 사신이 로마를 알았을 리 없고, 로마 사람이 백제를 들었을 리도 없다. 그런데도 나란히 놓으면 같은 질문이 생긴다. 도읍을 잃은 나라는 그 뒤에 어떻게 되는가. 서방 제국은 이름이 지도에서 지워졌고, 백제는 그 뒤로 185년을 더 버텨 660년에야 사라졌다.

한 가지는 바로잡아 두어야 한다. “로마가 사라졌다”는 말은 반만 맞다. 서쪽의 황제 자리는 비었지만, 동쪽의 로마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천 년 가까이 더 이어졌다. 제목이 가리키는 로마는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서방 제국이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보장왕과 안시성에서 당의 대군을 막아 낸 고구려를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시계를 170년 되돌려, 같은 재편기의 첫머리에서 그 고구려에 도읍을 빼앗긴 나라로 간다. 이 글이 묻는 것은 백제가 무엇을 잃었는가가 아니라, 잃은 뒤에 무엇을 남겼는가이다.

폐허 위에 세운 두 개의 질서

먼저 서쪽을 본다. 오도아케르는 황제를 폐위한 뒤 제국의 표장을 동로마 황제 제논에게 보냈다. 서방에 황제가 따로 필요 없다고 알리면서, 형식상 제국의 질서 안에서 이탈리아를 다스리겠다는 뜻을 비친 것이다.² 이 정당성의 빌림은 곧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갔다. 동고트의 왕 테오도리쿠스가 488년 제논의 뜻을 업고 이탈리아로 진군했고, 493년 화해의 연회 자리에서 오도아케르를 직접 제거했다고 전해진다.³ 그는 로마의 원로원과 관료제를 그대로 두고, 제국의 대리인이라는 형식을 유지한 채 다스렸다. 갈리아에서는 프랑크의 클로비스가 496년 무렵 가톨릭 세례를 받아 로마계 주민과 주교들의 지지를 얻었다.³ 로마를 부수고 들어선 세력들이 로마를 입고 통치한 셈이다.

이제 동쪽을 본다. 개로왕의 아들 문주는 한성이 포위되자 신라에 구원을 청하러 떠났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1만의 군사를 얻어 돌아왔으나 성은 이미 함락된 뒤였다.¹ 문주는 즉위했고, 같은 해 도읍을 웅진, 오늘날의 공주로 옮겼다. 금강이 휘감는 산세는 방어에 유리하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⁴

그러나 새 도읍은 안전하지 않았다. 477년, 병권을 쥔 최고위 신하 병관좌평 해구는 정치를 마음대로 하다가 사냥 나간 문주왕을 살해했다.¹ 왕을 곁에서 떠받치던 사람이 왕을 해친 것이다. 뒤를 이은 삼근왕은 문주왕의 맏아들이었지만 겨우 열세 살이었고, 군사와 나라의 정사는 모두 해구에게 맡겨졌다.¹

그런데 그 권력은 한 해를 넘기지 못했다. 478년, 해구는 은솔 연신과 함께 대두성에서 군사를 일으켰고, 『삼국사기』는 이를 반란으로 적는다. 왕명을 받든 덕솔 진로가 정병 500명을 이끌고 가서 해구를 죽였고, 연신은 고구려로 달아났다.¹ 사료는 해구가 왜 군사를 일으켰는지 적지 않는다. 남은 것은 나라의 실권을 쥔 사람이 한 해 만에 왕명을 받든 군사에게 쓰러졌다는 사실이다. 반란이라는 이름이 이긴 쪽의 기록에서 붙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삼근왕은 479년 열다섯 살로 세상을 떠났다.¹ 문주왕이 옮겨 놓은 웅진은 이 반란이 진압되고서야 왕이 통제하는 도읍의 꼴을 갖추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동성왕은 그 위에서 즉위했다. 『삼국사기』는 그를 문주왕의 동생 곤지의 아들로 적는다.¹ 그의 치세 전반은 놀랄 만큼 조직적이었다. 『남제서』에 실린 495년의 표문에서 백제는 전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관작을 내려 달라고 청했고, 남제 황제는 이를 허락했다.⁵ 바다 건너 대륙의 정통 왕조에게서 정당성을 빌린 것이다. 493년에는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었고, 494년과 495년 고구려의 공세 앞에서 두 나라는 서로를 구원했다.¹ 안으로는 해씨·진씨 같은 기존 대성 세력과 결이 다른 신진 인물들을 요직에 쓰며 왕권을 다졌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이해다.⁴

그러나 재건이 안정기에 들어서자 균열이 드러났다. 499년 큰 가뭄이 들어 백성이 굶주렸다. 신하들이 창고를 열자고 청했지만 왕은 듣지 않았고, 한산 사람 2천 호가 고구려로 넘어갔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¹ 이듬해인 500년, 왕은 궁 동쪽에 임류각을 세우고 연못을 파 진기한 짐승을 길렀다. 신하들이 간언하자 궁문을 닫아걸고 듣지 않았다. 501년, 가림성을 쌓는 일을 맡은 위사좌평 백가가 임지에 가기를 꺼리다 앙심을 품고 사냥을 나간 왕을 자객으로 해쳤다. 백가의 반란은 뒤이어 즉위한 무령왕이 진압했다.¹

부드러운 것이 살고, 편안한 것이 죽인다

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堅強者死之徒,柔弱者生之徒。(견강자사지도,유약자생지도。)

“단단하고 강한 것은 죽음의 무리이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의 무리이다.”⁶

도읍을 잃은 나라에게 이 문장은 위로가 아니라 지침이다. 한성을 지키는 일에 모든 것을 걸었던 단단함이 무너진 자리에서, 웅진의 백제는 방향을 틀었다. 남제의 관작을 받고 신라와 혼인으로 묶인 것은 자존심이 센 나라의 모습이 아니다. 살아남아야 하는 나라의 모습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 6장에서,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일만큼 다루기 어렵고 성공이 불확실하며 위험한 일이 없다고 썼다. 옛 질서에서 이익을 얻던 자들은 적이 되고, 새 질서에서 이익을 얻을 자들은 아직 확신하지 못해 미온적이기 때문이다.⁷ 문주왕과 동성왕의 최후는 이 문장을 사료로 옮긴 것처럼 읽힌다. 재건의 칼날은 바깥의 적보다 재건을 함께 짊어진 사람들 쪽에서 먼저 날아왔다.

그리고 맹자가 있다.

然後知生於憂患而死於安樂也。(연후지생어우환이사어안락야。)

“그런 뒤에야 근심과 어려움 속에서 살고 안락 속에서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⁸

동성왕의 연대기는 이 문장의 전반과 후반을 함께 보여 준다. 위기 때 그는 동맹을 놓지 않았다. 기근 앞에서는 창고를 열자는 신하들의 청을 물리쳤고, 백성이 고구려로 떠난 이듬해에 연못을 팠으며, 간언이 오르자 궁문을 닫았다. 근심 속에서 열려 있던 귀가 안락 속에서 닫히는 순서가 연대기에 그대로 남아 있다. 임류각이 올라가고 이듬해, 그는 목숨을 잃었다.

철학은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중심은 옮길 수 있지만 구조는 옮기지 못하면 사라진다

세 가지 패턴이 보인다.

첫째, 재건의 정당성은 밖에서 빌리되, 힘은 안에서 만든다. 테오도리쿠스는 제국의 대리인이라는 형식을, 클로비스는 주교들의 승인을, 동성왕은 남제의 관작을 빌렸다. 빌린 정당성은 실력의 대체물이 아니라 실력이 자리 잡을 시간을 벌어 주는 장치였다. 위기 이후의 나라는 중심을 새로 짓기 전에, 중심을 인정해 줄 바깥의 눈을 먼저 확보한다.

둘째, 재건 연합은 재건자를 삼킨다. 해구는 문주왕 곁에서 병권을 쥐고 있던 귀족이었고, 백가는 동성왕이 키운 신진 세력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오도아케르를 연회에서 제거한 테오도리쿠스의 이탈리아도 같은 문법 위에 서 있었다. 위기 때 권력을 맡긴 사람들은 위기가 끝나는 순간 청구서를 내민다. 재건은 폐허를 치우는 일에서 끝나지 않고, 폐허를 함께 치운 사람들에게 무엇을 갚을 것인가에서 다시 시작된다.

셋째, 서방 제국이 끝내 이어지지 못한 이유와 백제가 이어진 이유를 가르는 지점은 잃은 것의 크기가 아니다. 서방 황제는 도읍을 잃자 중심 자체가 비어 버렸다. 백제는 도읍을 잃었지만 왕을 잃지 않았고, 그 왕이 새 땅에서 동맹과 관료와 외교의 틀을 다시 짰다. 나라를 지탱하는 것은 도읍이라는 장소가 아니라, 장소를 옮겨도 작동하는 구조다.

그러나 구조는 한 번 짜면 끝나지 않는다. 임류각과 닫힌 궁문이 보여 주듯, 재건의 두 번째 시험은 폐허가 아니라 안정이다. 곤경 속에서 열려 있던 귀가 안락 속에서 닫힐 때, 칼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날아온다.

2026년 10월, 국정감사에 이어 2027년도 예산안 심사를 앞둔 국회에서 정부·여당은 증가율 12.8%의 예산을 미래 성장동력에 대한 투자라 설명하고, 야당은 지출 증가율과 국채 잔고를 문제 삼는다. 어느 쪽 설명이 옳은지는 이 글이 묻는 질문 밖에 있다. 다만 공동체가 갈리는 지점은 무엇을 세울지보다, 세운 비용을 누가 어떻게 나누느냐에서 시작된다는 패턴만은 짚어 둔다.⁹

우리는 무엇이 남는 나라인가

한성은 불탔고, 웅진은 좁았고, 문주왕과 동성왕은 둘 다 자객에게 죽었다. 이 연대기는 승리의 기록이 아니다. 그런데도 백제는 그 뒤 185년을 더 살았다. 살아남은 나라의 연대기는 대개 화려한 승전보가 아니라, 끊어진 것을 이어 붙이려던 사람들의 불안한 기록으로 남는다.

서방 제국이 사라진 자리에서 후대는 로마를 기억하는 방식으로 이탈리아를 읽었고, 백제가 이어진 자리에서 후대는 웅진과 사비를 읽는다. 두 이야기가 던지는 질문은 같다.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우리에게는 무엇이 남는가. 도읍인가, 왕인가, 사람들 사이에 쌓아 둔 신뢰인가.

그 대답은 오래 걸려서야 보인다. 바라보는 자의 기록은 그 질문을, 멀리서 아직 끝나지 않은 채로 계속 바라본다.


* 참고할 말씀: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대대의 파괴된 기초를 일으키리니’ — 이사야 58:12


1. 김부식,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개로왕·문주왕·삼근왕·동성왕조.

2. 서로마 폐위(476) 관련: P. Heather, The Fall of the Roman Empire (Macmillan, 2005).

3. 테오도리쿠스·클로비스 관련: C. Wickham, The Inheritance of Rome (Viking, 2009).

4. 웅진 천도 및 동성왕대 정치 세력 관련: 노중국, 『백제정치사』 (일조각, 1988).

5. 『남제서』 권58 동남이열전 백제조(건무 2년, 495년 표문).

6. 『도덕경』 76장.

7. 마키아벨리, 『군주론』 6장(요지).

8. 『맹자』 고자하편.

9. 2027년도 예산안(지출 증가율 12.8%) 및 국정감사·예산안 심사 일정 관련 언론 보도(2026.09~10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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