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 하나가 황제의 세금을 정했다
포토시와 마닐라 갤리언, 은으로 묶인 최초의 세계 (1545~1644)
2026.10.21 · 세계사 · 세계사-물자-⑨ · Watchman
푸젠 농부의 은 한 덩이
1580년대 푸젠의 한 농부가 관아에 세금을 내러 갔다고 가정해 보자. 그가 내민 것은 쌀도 베도 아닌 은 한 덩이였다. 그 은의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푸젠의 항구 상인이 나오고, 그 상인에게 은을 건넨 마닐라의 스페인 상인이 나오고, 태평양 건너 멕시코의 아카풀코가 나온다. 길의 끝에는 해발 4,000미터 안팎의 안데스 고원에 솟은 붉은 산 하나가 서 있다.¹
세계는 언제 하나가 되었는가. 증기기관도 전신도 인터넷도 아니었다. 경제사학자 데니스 플린과 아르투로 히랄데스는 그 시작을 1571년으로 꼽는다. 아메리카의 은과 아시아의 비단이 처음으로 한 항로 위에서 꾸준히 오가기 시작한 해다. 이 연대에는 이견도 있다.²
앞선 글에서 우리는 영국의 차 갈증이 청의 은을 빨아들이고, 아편이 그 은을 되돌려 받은 과정을 살펴보았다. 그 글이 은이 빠져나가던 1830년대와 1842년의 이야기였다면, 이번 글은 시계를 250년 되돌린다. 그 은이 애초에 어떻게 중국의 장부 바닥에 깔리게 되었는가를 따라간다.
산이 열리고, 바다가 열리고, 장부가 바뀌었다
1545년, 스페인인들은 오늘의 볼리비아 고원에서 은맥이 드러난 붉은 산을 발견했다. 스페인어로 ‘부유한 산’을 뜻하는 세로 리코, 그 아래 들어선 광산 도시가 포토시다. 인구는 1547년 1만 4천 명가량에서 1571년 4만 명가량으로, 1600년 무렵에는 10만 명을 넘어 15만 명 안팎까지 불어났다고 추산된다.³ 런던이나 세비야에 맞먹는 규모의 도시가 숨 쉬기도 버거운 고원에 솟은 셈이다. 포토시는 17세기 중반까지 스페인령 아메리카 은 산출량의 절반가량을 차지한 것으로 추산된다.
산의 운명을 바꾼 것은 광맥이 아니라 화학이었다. 1570년대 초 수은으로 은을 뽑아내는 아말감법이 포토시에 자리 잡았고, 1560년대 중반 무렵 발견된 우앙카벨리카의 수은 광산이 그 재료를 댔다. 총독 프란시스코 데 톨레도는 이 둘의 결합을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혼인’이라 불렀다고 전한다.⁴
광산을 돌릴 일손은 미타(mita)로 채웠다. 미타는 케추아어로 ‘차례’를 뜻하는 말이다. 잉카 제국에서는 마을마다 차례를 정해 돌아가며 도로를 닦고 창고를 짓고 나라의 밭을 갈았는데, 이 노동이 곧 세금이었다. 스페인은 백성에게 익숙한 이 이름과 틀을 빌려 와 광산에 맞게 고쳤다.
1573년 무렵 톨레도가 정비한 새 미타 아래에서, 고원 여러 지방의 마을은 성인 남자의 7분의 1을 해마다 포토시로 보내야 했다.⁵ 이들은 교대로 광산에서 일하며 얼마간의 임금을 받았다. 그러나 고향에서 먼 길을 걸어와야 했고, 임금이 있었다고 해서 강제라는 성격이 지워지지는 않았다. 사람이 빠져나간 마을은 살림이 비어 갔고, 미타를 피해 고향을 떠나는 이들도 생겼다. 갱도의 어둠과 수은 증기 속에서 쓰러진 사람의 수는 정확히 셀 수 없다. 은은 이 이름 없는 숫자 위에서 쌓였다.
그 은이 갈 곳은 스페인만이 아니었다. 1565년 아우구스티노회 수사이자 항해가인 안드레스 데 우르다네타가 필리핀 세부에서 멕시코로 돌아오는 길을 찾아냈다. 북태평양의 쿠로시오 해류를 타고 크게 돌아오는 이 귀환 항로가 열리자 아카풀코와 필리핀을 잇는 정기 항로가 생겼다.⁶ 1571년 스페인이 마닐라를 세우면서 이 항로는 중국의 문 앞에 닿았다. 이후 1815년까지 250년 동안 ‘마닐라 갤리언’이라 불린 대형 범선이 은을 싣고 서쪽으로, 비단과 도자기를 싣고 동쪽으로 오갔다.
이 은을 끝에서 빨아들인 쪽은 명이었다. 15세기를 지나며 명의 지폐 보초(寶鈔)는 신용을 잃었고, 시장은 은으로 기울어 갔다. 1567년 해금이 완화되어 푸젠 월항에서 민간 무역이 열리자 푸젠 상인들이 마닐라로 몰려갔다.⁷ 결정타는 세금이었다. 16세기 중반부터 저장·푸젠 등지에서 시험되던 은납화는 1580년대 초 장거정이 전국으로 넓힌 일조편법(一條鞭法)으로 굳어졌다. 이 제도는 토지세와 부역을 하나로 묶어 은으로 내게 했다.⁸ 제국의 장부 자체가 은 단위로 다시 쓰인 것이다.
게다가 금 한 냥에 은 예닐곱에서 여덟 냥을 쳐주던 중국과 열세 냥 안팎을 쳐주던 유럽 사이에는 값의 틈이 있었다는 추산이 있다.⁹ 은을 요구하는 세금과 시장은 커졌는데 나라 안의 은 생산은 그 수요를 따르지 못했으니, 중국은 은을 가장 비싸게 사 주는 시장이 되었다. 중국으로 가져가기만 해도 차익이 남는 구조였다. 마닐라에서는 스페인 상인과 화인 상인이 서로 없어서는 안 될 사이이면서 서로를 두려워했고, 1603년과 1639년 두 차례 화인 학살이 일어났다.¹⁰
그렇다면 은을 캐서 보낸 스페인은 부유해졌는가. 펠리페 2세는 1557년, 1575년, 1596년에 국가 파산을 선언했다.¹¹ 은은 세비야를 스쳐 플랑드르의 군대와 제노바의 은행가에게로 흘러갔다. 유입된 은이 국내 농업과 제조업을 키우는 데 쓰이기보다 전쟁 비용과 외채 변제로 빠져나갔다는 해석이 널리 받아들여진다. 1600년 마르틴 곤살레스 데 세요리고는 국왕에게 올린 건의서에서 스페인을 ‘마법에 걸린 사람들의 공화국’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¹² 장 보댕은 이미 1568년에 금은의 유입을 물가 상승의 원인으로 짚은 바 있었다.¹³
이 은의 그림자는 조선에도 드리웠다. 1592년 임진년에 일본군이 조선을 덮치자 명의 만력제는 원군을 보냈다. 명이 그만한 군대를 먹이고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일조편법 이후 세금이 은으로 걷혀 국고에 은이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전란은 중국의 은 장부 위에서 치러진 셈이다.
그런데 만력제의 치세에는 큰 군사 행동이 잇따랐다. 1592년 서북 변경 닝샤에서 일어난 반란의 진압, 같은 해 시작되어 1598년까지 이어진 조선 파병, 그리고 1599년 무렵 서남 변경 파저우(播州)의 토벌이다. 역사가들은 이 세 번의 원정을 ‘만력삼대정’이라 부른다. 군비는 국고를 크게 갉아먹었고, 만력제는 부족한 은을 메우려 광산을 열어 은을 캐고 상세를 거두는 환관을 각지에 보냈다고 알려져 있다.¹⁴ 이 환관들이 지방에서 원성을 샀다는 기록도 전한다.
1620년대 이후 포토시의 가장 좋은 광석이 바닥을 드러내며 산출이 줄었다.³ 일본이 문을 닫은 1630년대 이후에는 일본 은이 중국으로 흘러드는 양도 꺾였다고 본다.¹⁵ 은이 귀해지면 은으로 세를 내는 농민에게는 같은 세율도 더 무거운 짐이 된다. 여기에 소빙기의 흉작과 기근이 겹쳤다. 1644년 명은 무너졌다. 1630~40년대 은 유입이 실제로 얼마나 줄었고 그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는 연구자 사이에 이견이 있으며, 은 공급의 감소를 멸망의 단일한 원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세금의 단위가 바깥에서 오는 금속에 묶여 있었다는 사실이 기근과 만났을 때 세정이 흔들리는 속도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¹⁶
귀한 금속이 사람을 가난하게 만들 때
이 장면을 읽는 데에는 세 개의 문장이 필요하다. 첫째는 노자의 문장이다.
不貴難得之貨,使民不爲盜。
(불귀난득지화,사민불위도。)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백성이 도둑이 되지 않는다.”¹⁷
노자는 도둑을 없애는 길이 형벌이 아니라 사람들이 탐내는 것을 바꾸는 데 있다고 보았다. 포토시의 산은 이 문장을 거꾸로 비추었다. 은이 귀해지는 순간, 한 마을의 성인 남자 7분의 1을 해마다 산으로 보내는 일이 법과 제도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다. 그것을 도둑질이라 부를 수는 없다. 그러나 귀한 금속 하나가 사람의 시간을 단위로 징발하는 제도를 낳았다는 점에서 이 문장은 서늘하다. 은의 그림자는 바다 건너 명의 농민에게도 닿았다. 세금을 은으로 내려면 먼저 곡식을 팔아 은으로 바꿔야 했다. 그런데 은이 귀해지면 은 한 냥을 얻는 데 드는 곡식이 늘어난다. 세금은 그대로인데 내야 할 곡식은 점점 많아진 것이다.
둘째는 『관자』의 문장이다.
五穀食米,民之司命也;黃金刀幣,民之通施也。
(오곡식미,민지사명야;황금도폐,민지통시야。)
“오곡과 쌀은 백성의 목숨을 맡은 것이요, 황금과 칼 모양의 돈은 백성이 서로 통하게 하는 수단이다.”¹⁸
곡식은 목숨이고 화폐는 통행 수단이다. 일조편법은 이 순서를 뒤집었다. 명의 농민은 곡식을 지어 놓고도 은이 있어야 나라 앞에 설 수 있었다. 통행 수단이 목숨보다 위에 올라선 것이다.
그런데 그 통행 수단을 쥐고 있던 것은 명 조정이 아니었다. 멀리 있는 산과 그 산에서 오는 배였다.
셋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장이다. 『정치학』 1권 9장에서 그는 화폐를 쌓는 일 자체를 부로 여기는 생각을 의심하며, 넘치도록 가지고도 굶어 죽을 수 있는 것이 어떻게 부일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손에 닿는 것이 모두 황금으로 변해 굶주린 신화 속 미다스가 그 예다.¹⁹ 은이 쏟아져 들어오는 나라에서 파산이 되풀이되고, 건의서에 ‘마법에 걸린 사람들’이라는 말이 오른 장면은 이 오래된 우화의 가장 큰 무대였을 수 있다.
은이 지나간 자리, 은이 머물지 못한 자리
이 장면에서 세 가지 패턴이 남는다.
첫째, 은이 가장 많이 지나간 자리는 가장 오래 부유한 자리가 아니었다. 광산 아래에는 미타의 광부가 있었고, 세비야에는 파산 선언이 있었고, 중국에는 은을 계산 단위로 삼은 장부가 있었다. 광산, 항구, 장부 가운데 어느 곳도 은의 값을 스스로 정하지 못했다. 값을 정한 것은 세 자리를 잇는 항로의 수요와 공급이었다. 은이 가장 많이 지나간 자리가 가장 오래 부유했던 자리는 아니었다.
둘째, 개혁이 틀려서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개혁이 기댄 공급선이 제 것이 아니어서 흔들린다. 일조편법은 복잡한 세제를 하나로 묶어 세정을 단순하게 만든 개혁으로 평가받는다. 문제는 그 개혁이 서 있던 바닥이 은의 수입이라는, 명이 통제할 수 없는 흐름이었다는 점이다. 은의 공급이 흔들리던 1620년대 조정이 동림당과 엄당의 당쟁에 휩쓸려 있었다는 서술은 여러 연구에서 발견된다.²⁰ 효율을 얻은 개혁이 공급선을 잃으면, 효율은 곧 취약성이 된다.
셋째, 설계자 없는 연결은 끊길 때에도 책임질 자가 없다. 포토시의 감독관은 할당량을, 마닐라의 상인은 차익을, 푸젠의 상인은 비단 값을 계산했을 뿐이다. 세 대륙을 잇는 이 순환을 처음부터 그려 둔 사람은 없었다. 설계자 없는 연결은 해체하는 자도 없이 끊어진다.
이 패턴을 지금의 한국에 겹쳐 보되, 17세기의 은과 오늘의 달러를 같은 것이라 할 수는 없다는 단서를 붙여 둔다. 다만 나라의 장부가 바깥에서 오는 하나의 기준에 기대는 구조는 모양을 바꿔 되돌아올 수 있다. 2026년 10월 19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1,330.3원으로 마감했다. 2년여 만의 최저치다.²¹ 석 달 전인 7월 24일에는 국제 유가가 다시 배럴당 100달러를 넘고 미국이 한국산 제품에 12.5%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힌 가운데 1,466.6원이었다.²² 석 달 사이 130원 넘게 오간 이 숫자는 한국의 정책과 수출만이 아니라 유가와 달러, 워싱턴의 결정이 함께 쓴 숫자다.
같은 시기 국회에서는 10월 6일 시작된 국정감사가 한창이다. 10월 2일 공소청이 출범한 검찰청 폐지 이후의 제도를 놓고 여당은 폐지를 성과로 내세우고 야당은 ‘개악’이라 부르며, 서울 집값과 대통령 관련 사건의 공소 취소 논란도 공방의 한복판에 있다.²³ 그 공방에서 누가 옳은지는 이 글이 가릴 일이 아니다. 다만 같은 주에 이 나라는 안에서 제도의 주도권을 두고 다투고 있고, 바깥에서 온 숫자의 움직임으로 숨을 돌리고 있다. 이 점은 적어 둘 만하다. 안도의 숫자는 기록하되, 그 숫자를 누가 써 주었는지도 함께 적어 두어야 한다.
우리 장부의 바닥은 어디에 있는가
푸젠의 농부는 은이 어디서 오는지 알지 못했다. 알 필요도 없었다. 은은 늘 왔으므로. 그가 은이 오는 길의 존재를 비로소 알게 된 것은, 아마도 그 길이 가늘어지고 난 뒤였을 것이다.
바깥의 항로에 기대지 않는 장부는 없다. 문제는 그 기댐을 알고 있는가이다. 지금 우리의 장부에는 바깥에 걸려 있는 바닥이 몇 개나 되는가. 그 가운데 하나가 흔들리는 날, 안에서는 무엇을 두고 다투고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날을 위해 우리는 지금 어떤 자리를 비워 두고 있는가.
바라보는 자의 기록이 멀리서 보아야 보이는 것들을 적는 일이라면, 가장 먼저 적어 둘 것은 은이 들어오는 날이 아니라 은이 오는 길일지 모른다.
* 참고할 말씀: ‘은이 나는 광산이 있고 금을 불리는 곳이 있으며’ — 욥기 28:1
¹ 포토시 세로 리코 개발 개시 1545; Peter Bakewell, Miners of the Red Mountain: Indian Labor in Potosí, 1545–1650 (1984). 고도는 포토시 시가지 기준
² Dennis O. Flynn & Arturo Giráldez, “Born with a ‘Silver Spoon’: The Origin of World Trade in 1571,” Journal of World History 6:2 (1995); Arturo Giráldez, The Age of Trade: The Manila Galleons and the Dawn of the Global Economy (2015)
³ Bakewell (1984); 인구 추산은 연구자에 따라 차이가 있음 (1600년 무렵 10만~16만)
⁴ 톨레도 총독의 표현은 Huancavelica–Potosí 연결에 관한 연구에서 인용되는 문장. 수은 아말감법 도입 1570년대 초
⁵ 미타(mit’a)는 케추아어로 “차례”를 뜻함. Bakewell (1984); Jeffrey Cole, The Potosí Mita, 1573–1700 (1985)
⁶ Andrés de Urdaneta 귀환 항로 발견 1565; 마닐라 건설 1571; 마닐라 갤리언 운항 1565~1815
⁷ 隆慶開海 (1567), 푸젠 월항 개방
⁸ 一條鞭法, 장거정(張居正), 1580~81년 전국 시행 (토지 측량 1581)
⁹ Benito Legarda, After the Galleons (2001) 등. 금은비가를 중국 1:6~8, 유럽 1:12~13 안팎으로 보는 추산. Flynn & Giráldez (1995)는 중국에서의 은 가치를 다른 지역의 두 배 안팎으로 서술
¹⁰ 마닐라 화인(상글레이) 학살 1603, 1639. 사망자 수는 추산 편차가 커서 본문에 명시하지 않음
¹¹ John H. Elliott, Imperial Spain 1469–1716 (1963) 등. 펠리페 2세 국가 파산 1557, 1575, 1596 (1560, 1607 등 추가 파산 논의 있음)
¹² Martín González de Cellorigo, Memorial de la política necesaria y útil restauración a la república de España (1600)
¹³ Jean Bodin, Response to the Paradoxes of Malestroit (1568)
¹⁴ Ray Huang, 1587, A Year of No Significance (Yale UP, 1981). 만력삼대정(1592 닝샤, 1592~98 조선 파병, 1599 파저우)
¹⁵ William S. Atwell, “International Bullion Flows and the Chinese Economy circa 1530–1650,” Past & Present 95 (1982)
¹⁶ Atwell (1982); 명 멸망 1644. 은 공급 감소와 소빙기·재정 위기·반란의 복합 요인 논쟁
¹⁷ 『老子』 3장
¹⁸ 『管子』 國蓄. 이어지는 대목의 표현 원문 대조 필요
¹⁹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1권 9장 (1257b). 인용은 취지 번역
²⁰ 동림당과 엄당의 대립, 천계 연간(1621~27). 예: Ray Huang 등 명말 정치사 연구 종합
²¹ 뉴시스, 「원·달러 환율, 1330.3원 마감…2년여 만의 최저치」 2026.10.19
²² 뉴시스, 원·달러 환율 1466.6원 마감 보도 (유가 100달러 재돌파·한국산 12.5% 관세 부과 방침) 2026.7.24
²³ 뉴시스 2026.10.8 (법사위 법무부 국정감사 여야 입장), 뉴스1 2026.10.12 (국감 2주차 쟁점: 검찰청 폐지 후속·서울 집값 공방)
© Watchman, 바라보는 자의 기록 (bara.watchmaninsight.com). 무단 전재 및 2차 창작 시 사전 동의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