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퀴가 공기를 얻자 숲은 할당량을 얻었다
고무와 콩고자유국, 레오폴드 2세와 보이지 않는 공급망 (1888~1908)
공기가 든 바퀴
1888년 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수의사 존 보이드 던롭은 자갈길에서 덜컹거리는 아들의 세발자전거를 보다가 고무관에 공기를 채운 바퀴를 만들었다고 전한다.¹ 공기 타이어의 원리 자체는 1845년 스코틀랜드인 로버트 윌리엄 톰슨이 이미 특허를 냈으나, 이것을 세상의 대세로 만든 것은 던롭의 재발명이었다.² 이 바퀴는 자전거 경주를 휩쓸었고, 1895년에는 프랑스 보르도-파리 경주에 공기 타이어를 단 자동차가 출전했다.³
런던 공원에서 파리 큰길까지, 자전거를 탄 사람들은 덜컹거림이 사라진 것을 발명의 승리로 읽었다. 틀린 말이 아니다. 다만 부드러운 바퀴가 굴러가려면 그 안을 채울 고무가 먼저 있어야 했다. 1890년대 앤트워프 부두에는 적도 아프리카의 덩굴에서 짜낸 고무가 포대째 내려지고 있었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안데스의 산 하나가 황제의 세금을 정하고 은이 태평양을 건넌 과정을 살펴보았다. 은이 땅속에서 나왔다면 이번 물자는 숲에서 나온다. 은의 시대에 광산이 사람의 시간을 징발했다면, 고무의 시대에는 마을 전체가 징발되었다. 이 글은 가볍고 탄력 있는 물건 하나가 한 나라 크기의 숲을 어떤 장부로 바꾸었는지 따라간다.
숲에 매겨진 할당량
레오폴드 2세는 1865년부터 벨기에를 다스린 입헌군주였다. 의회가 권한을 쥔 작은 나라의 왕은 제국을 갖고 싶어 했다. 1876년 그는 브뤼셀에 지리학자와 탐험가를 모아 국제아프리카협회를 세웠다. 간판은 탐험과 문명화, 그리고 노예무역 철폐였다.⁴
1884년 11월부터 1885년 2월까지 열린 베를린 회의에서 열강은 콩고 분지의 자유무역과 노예무역 금지를 약속했고, 레오폴드의 영유를 사실상 받아들였다.⁴ 이렇게 태어난 콩고자유국은 벨기에의 식민지가 아니었다. 벨기에 정부의 소유도 아니었다. 왕 한 사람이 주권자로 서 있는 사유 국가였고, 영토는 벨기에의 수십 배에 달했다.⁵ 자유무역을 약속받은 땅이 한 사람의 독점지가 된 셈이다.
초기의 수입원은 상아였다. 그런데 상아가 줄어들 무렵 세계는 공기 타이어와 자전거, 자동차를 맞았고, 콩고의 숲에는 고무를 내는 덩굴이 널려 있었다. 1891~92년 레오폴드는 주인 없는 땅의 산물을 국가에 귀속시키는 법령을 내렸다. 이 법령들이 마을 주민이 숲에서 거둔 것을 사실상 국가의 것으로 돌렸다는 해석이 일반적이다.⁶ 일부 집계에 따르면 고무 수출량은 1895년 580톤에서 1900년 3,740톤으로 불어났다.⁷
고무를 걷는 방식은 교역이 아니었다. 마을마다 정해진 양의 고무를 정해진 날짜까지 가져와야 했다. 야생 덩굴은 한곳에서 오래 뽑아 쓸 수 없어서, 일손은 갈수록 더 먼 숲으로 들어가야 했다.⁷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왕의 사설 군대 푸블리크군(Force Publique)이 나섰다. 장교는 유럽인이었고 사병은 아프리카인이었다. 이들은 여성과 아이를 인질로 잡아 남자들을 숲으로 내몰았고, 하마 가죽 채찍 시코트(chicotte)를 휘둘렀다.⁸ 병사들이 쏜 탄환의 증거로 사람의 잘린 손이 쓰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일부 지역에서는 고무 할당량의 부족분을 손으로 대신 바쳤다는 증언도 있다.⁹ 고무는 값을 치르고 사 오는 물건이 아니라, 할당량으로 걷어 오는 물건이 되었다.
이 체제의 모순을 장부에서 읽어 낸 사람은 총을 든 군인도 현장의 선교사도 아니었다. 리버풀 해운 회사 엘더 템프스터의 사무원 에드먼드 모렐이다. 이 회사는 앤트워프와 콩고를 잇는 항로를 콩고자유국과 계약해 운항하고 있었다. 프랑스어에 능했던 모렐은 벨기에에 자주 파견되어 회사 장부를 들여다보았다.¹⁰ 그가 본 것은 단순했다. 콩고에서 오는 배에는 고무와 상아가 가득한데, 콩고로 가는 배에는 총과 쇠사슬, 탄약 같은 것이 실려 있었다. 호크실드에 따르면 콩고에서 나온 상품의 값은 들어간 물품 값의 다섯 배 안팎이었다.¹⁰ 정상적인 교역이라면 오가는 짐의 값이 서로를 설명해야 한다. 한쪽으로만 흐르는 장부는 교역이 아니라 징수라는 뜻이다. 모렐은 1900년 이 내용을 연재 기사로 밝혔다.¹⁰
영국 영사 로저 케이스먼트는 1903년 6월 레오폴빌에 도착해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으며 상류로 올라갔다. 그가 쓴 보고서는 1904년 2월 공개되었다.¹¹ 그해 3월 모렐과 케이스먼트는 콩고개혁협회를 세웠다.¹² 5월에는 선교사의 아내 앨리스 실리 해리스가 바링가 선교 거점에서 한 사진을 찍었다. 다섯 살 딸의 잘린 손과 발을 내려다보는 아버지 응살라의 모습이다.¹³ 이 사진은 글을 읽지 않는 사람에게도 사태를 알렸고, 영국과 미국에서 여론이 움직였다. 사망자 수는 지금도 논쟁 중이다. 추산은 150만에서 1,300만 명까지 갈리며, 호크실드와 얀 판시나 등이 제시한 약 1,000만 명이 가장 널리 인용되는 수치지만 높은 쪽에 속한다는 비판도 함께 따른다.¹⁴
문학도 숲의 장부를 읽기 시작했다. 조지프 콘래드는 콩고에서 증기선 선장으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어둠의 심연』을 1899년 잡지에 연재했고, 마크 트웨인은 1905년 레오폴드가 변명하는 풍자 『레오폴드 왕의 독백』을 썼다.¹⁵ 1908년 11월 15일 벨기에 의회는 콩고자유국을 넘겨받아 벨기에령 콩고로 바꾸었다.¹⁶ 왕의 사유지가 나라의 식민지가 된 날, 체제는 끝난 것이 아니라 주인이 바뀌었다. 강제노동은 형태를 바꾸어 이어졌고, 콩고는 1960년에야 독립했다.
같은 시기 대륙을 건너 아마존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있었다. 브라질 아마존의 고무 호황은 마나우스를 오페라하우스가 있는 도시로 바꾸었고, 상류의 푸투마요에서는 페루 아마존 회사가 원주민을 고무 채취에 몰아넣었다. 케이스먼트는 1910년 이곳으로 가 콩고에서 본 것과 같은 구조를 다시 조사했다.¹⁷ 이 폭력의 채산을 먼저 깨뜨린 것은 항의서만이 아니었다. 1876년 영국인 헨리 위컴이 브라질에서 반출한 씨앗이 큐 식물원을 거쳐 실론과 말라야의 농장으로 옮겨졌고, 1913년에는 세계 고무 생산 약 10만 8천 톤 가운데 재배 고무가 4만 7천 톤을 넘어섰다.¹⁸ 사람을 숲으로 내몰아야만 굴러가던 산업이 농장의 나무에게 밀려난 것이다. 고래기름이 석유에게 밀려나 고래가 숨을 돌린 이야기와 같은 결의 장면이다. 이 대체가 도덕적 각성이 아니라 가격의 문제였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짐승을 이끌어 사람을 먹게 하는 일
이 장면을 읽는 데에는 세 사람이 필요하다. 먼저 맹자다. 양혜왕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庖有肥肉,廐有肥馬,民有飢色,野有餓莩,此率獸而食人也。
(포유비육,구유비마,민유기색,야유아표,차솔수이식인야。)
“푸줏간에는 살진 고기가 있고 마구간에는 살진 말이 있는데 백성의 얼굴에는 굶주린 빛이 있고 들에는 굶어 죽은 시체가 널려 있다면, 이는 짐승을 이끌어 사람을 잡아먹게 하는 것이다.”¹⁹
맹자가 겨눈 것은 직접 칼을 든 자가 아니다. 곳간이 가득한데 백성이 굶는 구조를 방치한 정치다. 콩고의 숲에서 사람을 문 것은 법령이었고 할당량이었고 회사의 배당이었다. 법령에는 손이 없고 장부에는 채찍이 없지만, 그 둘이 이어지는 자리에서 사람은 먹혔다.
두 번째는 칸트다. 『도덕형이상학 정초』(1785)에서 그는 인간성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단지 수단으로만 대하지 말라고 요구한다.²⁰ 자전거를 타던 이들 가운데 누구도 이 규칙을 일부러 어기지 않았다. 문제는 수단화가 눈앞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는 데 있다. 타이어 한 개와 한 사람 사이에는 가게, 도매상, 해운사, 사무소, 군대가 끼어 있었다. 규칙은 매개가 길어질수록 어길 사람이 흐려진다.
세 번째는 한나 아렌트다. 그는 『전체주의의 기원』(1951)에서 제국주의가 해외에서 행정과 포고에 의한 통치를 키웠다고 보았고, 훗날 『폭력론』(1970)에서 관료제를 책임질 사람이 아무도 없는 ‘아무도 아닌 자의 지배’라 불렀다.²¹ 콩고자유국의 책임은 왕에게도, 회사에도, 현지 장교에게도 나뉘어 있었고 누구에게도 온전히 돌아가지 않았다. 훗날 그가 이름 붙인 책임 회피의 씨앗이 이 숲에서 먼저 싹텄다고 읽을 수 있다.
장부 밖으로 밀려나는 것들
이 장면에서 세 가지 패턴이 남는다.
첫째, 값이 오르면 비용은 장부 밖으로 밀려난다. 고무 값이 오르자 레오폴드의 장부에는 이익이 쌓였다. 그러나 숲의 마을이 치른 시간과 건강, 목숨은 어느 항목에도 적히지 않았다. 가격이 오를수록 비용은 장부 밖으로 밀려났다. 이 패턴은 은의 광산에서도, 고래기름의 포경선에서도 되풀이되었다.
둘째, 보이지 않는 체제는 보이는 순간 비용이 된다. 체제를 흔든 것은 한 사무원의 눈, 한 영사의 보고서, 한 선교사의 사진이었다. 새로운 사실이 발견된 것이 아니라 이미 있던 사실이 한곳에 모였을 뿐이다. 보이지 않던 체제는 보이게 되는 순간부터 비용이 되었다.
셋째, 선의의 명분은 감사를 건너뛰게 만든다. 문명화와 노예무역 철폐라는 간판이 있었기에 열강은 콩고자유국의 장부를 오래 들여다보지 않았다. 좋은 이름을 단 독점은 가장 늦게 검증받는다.
이제 고개를 돌려 오늘의 한국을 본다. 120년 전의 고무와 오늘의 코발트를 같은 것이라 할 수는 없다. 다만 가볍고 쓸모 있는 물건의 뒷면을 읽는 구조는 모양을 바꿔 되돌아온다. 한국 배터리 산업은 리튬·니켈·코발트 같은 주요 원료의 90% 이상을 해외에서 들여오는 구조로 알려져 있고, 코발트는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캔 원광이 중국에서 정·제련된 뒤 황산코발트로 공급되는 경로가 일반적이다.²² 그런데 이 콩고가 2025년 2월 코발트 수출을 막았다가 그해 10월 16일부터 쿼터제로 바꾸었다. 2026년과 2027년 연간 상한은 각각 9만 6,600톤으로, 2024년 생산량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²³ 120년 전 숲의 할당량이 브뤼셀의 왕궁에서 정해졌다면, 지금 코발트의 상한선은 킨샤사에서 정해진다. 이것이 정당한 자원 주권의 행사인지, 가격을 지키기 위한 공급 통제인지는 이 글이 가를 일이 아니다. 다만 정제는 다른 대륙에서, 완제품의 값은 서울과 세계의 소비자 사이에서 정해지는 구조라는 사실만은 적어 둘 만하다. 광산 노동 환경을 둘러싼 국제 인권단체의 문제 제기도 오래 이어져 왔다.²⁴ 우리가 쓰는 가벼운 물건의 장부는, 지금 누구의 손에서 쓰이고 있는가.
굴러가는 것의 뒷면
던롭의 바퀴는 지금도 굴러간다. 그것을 탄 사람은 덜컹거림이 사라진 것만 느꼈을 것이다. 바퀴 안의 고무가 어떤 숲에서, 어떤 날짜에, 누구의 어깨를 거쳐 왔는지는 장부에 없었다.
편리한 물건 뒤의 장부는 늘 멀리 있다. 우리는 지금 쓰는 물건 가운데 몇 개의 뒷면을 알고 있는가. 그것을 알게 되는 날, 우리는 값을 더 치를 것인가, 아니면 장부를 다시 덮을 것인가. 그리고 그날 그 장부를 쓰고 있을 사람은 누구인가.
바라보는 자의 기록이 멀리서 보아야 보이는 것들을 적는 일이라면, 가장 가까운 물건의 가장 먼 뒷면을 적는 일도 그 안에 들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