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거된 자리에서 도시가 시작되었다
오스만의 파리와 1970년대 서울, 밀려나는 자들의 첫 장
2026. 10. 08. · 한국현대-이사-③
계고장 한 장이 도착하던 날
1970년대 서울의 판자촌 문틀에는 종이 한 장이 붙곤 했다. 철거 계고장이다. 기한은 며칠뿐이었고, 어디로 가라는 말은 거의 없었다. 있다 해도 서울 바깥의 이름 없는 벌판이었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사과궤짝 하나를 안고 서울역에 내린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그들은 밀려서만 온 것이 아니라, 돈을 벌 수 있는 곳을 찾아 스스로 서울을 골랐다. 임금이 있는 곳으로 몸을 옮기는 것은 시장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그런데 그 선택으로 닿은 도시가 이번에는 그들의 자리를 다시 셈하기 시작한다. 처음 이동은 기회가 이끌었고, 두 번째 이동은 개발이 정한 순서가 이끌었다. 떠나는 이유는 계속 바뀌었다. 바뀌지 않은 것은, 그 이유를 정하는 자리에 이들이 앉아 있는 일이 드물었다는 점이다.
1960년 약 245만 명이던 서울 인구는 1970년 약 553만 명이 되었다.¹ 10년 사이에 두 배를 넘겼다. 이 숫자를 도시가 감당하는 방법은 둘이었다. 집을 더 짓거나, 사람을 더 멀리 보내거나. 서울은 두 가지를 동시에 택했다. 그리고 이 방식은 서울이 처음 쓴 것이 아니었다. 한 세기 전 파리가 먼저 걸었던 길이었다.
도시를 열기 위해 사람을 비우다
1853년 6월, 나폴레옹 3세는 오스만을 센 현의 지사로 임명했다. 이후 17년 동안 파리는 거대한 공사장이 되었다. 중세의 좁은 골목은 넓은 대로로 바뀌었고, 상하수도와 공원과 정거장이 들어섰다. 1852년 3월의 법령으로 도로 공사를 위한 토지 수용의 문턱이 이미 크게 낮아져 있었다.²
명분은 분명했다. 위생, 교통, 치안이었다. 콜레라가 휩쓸던 좁은 골목이 불결했던 것은 사실이었고, 군대와 마차가 달릴 길이 필요했다는 점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철거된 자리에 살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가.
중심부의 노동자 거주지가 헐리면서 집값과 임대료가 올랐다. 새로 지어진 건물은 이전 주민이 감당할 수 없는 값이었다. 노동자들은 1860년에 파리로 편입된 외곽 지역인 벨빌, 메닐몽탕, 몽마르트르, 그리고 그 너머로 밀려났다. 파리가 12개 구에서 20개 구로 넓어진 바로 그해였다.² 도시는 커졌지만 가난한 사람의 자리는 줄었다. 밀려난 주민의 정확한 수치는 연구자마다 견해가 갈리지만, 대략 수십만 명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엥겔스는 1872년부터 연재한 『주택문제』에서 이 방식에 아예 ‘오스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노동자 거주지를 가로질러 대로를 내고 그 자리를 번듯하게 바꾸는 수법이 파리를 넘어 다른 도시로 퍼지고 있다는 지적이었다.³ 그리고 한 세기 뒤, 그 반복은 한반도에서 확인된다.
1960년대 말부터 서울은 한강변과 청계천변, 산비탈의 무허가 정착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1970년 4월에는 시민아파트의 대표 격이던 와우아파트가 무너져 33명이 숨졌다.⁴ 빠르게 짓는다는 목표가 안전을 앞질렀다는 비극이었다. 한쪽에서는 철거가 이어졌고, 한쪽에서는 서둘러 지은 집이 무너졌다.
철거민이 보내진 곳 가운데 가장 큰 곳이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지금의 성남이다. 1969년께부터 서울의 철거민이 트럭에 실려 이곳으로 옮겨졌다. 도로도, 상하수도도, 일터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구릉지였다. 도시는 나중에 오기를 기다렸고, 사람이 먼저 도착했다.
1971년 8월 10일, 이주민 5만여 명이 최소한의 생계 수단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왔다. 분양 땅값이 약속보다 크게 오른 데다 세금까지 매겨졌기 때문이다.⁵ 이 사건은 오랫동안 ‘난동’이나 ‘폭동’으로 불렸고, 오늘날에는 해방 이후 첫 대규모 도시 빈민 투쟁으로 평가받는다. 이름도 ‘광주대단지 사건’에서 ‘민권운동’으로, 다시 ‘항쟁’으로 바뀌었다. 같은 사건을 무엇이라 부르느냐가 곧 밀려난 사람을 어떻게 기억하느냐였다. 정부가 한발 물러서면서 사태는 가라앉았고, 이곳은 1973년 7월 성남시로 승격되었다. 서울이 내보낸 사람들이 하나의 도시를 이룬 것이다.
항산이 없으면 항심도 없다
맹자는 양혜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若民,則無恒産,因無恒心。
(약민,즉무항산,인무항심。)
“백성은 일정한 생업이 없으면 일정한 마음도 지니지 못한다.”⁶
항산(恒産)은 흔히 생업의 기반으로 풀린다. 그런데 맹자가 항산의 내용으로 구체적으로 든 것은 밭 백 묘와 집터 다섯 묘(五畝之宅)였다.⁶ 항산에는 처음부터 집터가 들어 있었다. 이유는 어렵지 않다. 계고장 한 장에 사는 곳이 흔들리는 사람은 이웃과 관계를 쌓을 수도, 동네에 책임을 질 수도, 내일을 계획할 수도 없다. 그런 일은 모두 머무를 수 있다는 전제 위에서만 가능하다. 거주가 보장될 때 사람은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고, 보장되지 않을 때 사람은 임시 체류자가 된다. 맹자가 말한 항심은 거주의 안정과 떼어서 생각하기 어렵다.
1968년 파리에서 앙리 르페브르는 『도시에 대한 권리』를 펴냈다. 도시는 사고파는 교환가치로만 소비되는 상품이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쓰고 함께 만들어 가는 작품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⁷ 오스만이 파리를 바꾼 지 한 세기가 지나서야, 도시를 삶의 공간이 아니라 상품으로 다룰 때 무엇이 밀려나는지가 이론의 언어를 얻은 셈이다.
세 번 반복되는 문장
파리와 서울을 나란히 놓으면 세 가지 문장이 겹친다.
첫째, 비움에는 언제나 공공의 이름이 붙는다. 파리에서는 위생과 질서였고, 서울에서는 도시 미관과 근대화였다. 이름이 틀렸다는 뜻이 아니다. 문제는 그 명분이 비용을 누가 치르는지 묻는 질문을 지워 버린다는 데 있다.
둘째, 개발의 이익은 장부에 오르고, 이동의 비용은 장부 밖으로 흩어진다. 대로가 열리면 땅값이 오르고 분양 수익이 적힌다. 그러나 이사 비용, 일터에서 멀어진 시간, 끊어진 이웃 관계는 어느 장부에도 오르지 않는다. 회계의 말로 하면 대차대조표 밖에 쌓이는 부채다. 이 부채는 사라지지 않고, 밀려나는 사람의 삶이 대신 갚는다.
셋째, 이동 자체가 거래의 대상이 된다. 광주대단지에서는 입주 권리가 전매되면서 값이 뛰었다고 알려져 있다. 자리를 얻은 사람이 그 권리를 팔고 다음 자리를 찾아 떠나는 모습은 철 따라 옮겨 다니는 철새를 닮았다. 이주민은 시장 바깥의 구경꾼이 아니라, 그 안에서 값을 셈하고 움직이는 참여자이기도 했다. 이 패턴은 이후 ‘딱지’라는 이름으로 한국 도시 개발의 한 풍경이 된다. 떠나는 사람의 얼굴은 바뀌어도, 떠나게 만드는 구조는 그대로였다. 철새는 스스로 날개를 치지만, 계절을 정하는 것은 철새가 아니다.
그렇다면 파리는 이 반복의 끝에 무엇을 보여 주는가. 오스만이 해임된 것은 1870년 1월이었다. 불과 1년여 뒤인 1871년 3월, 파리 코뮌의 중심에는 벨빌과 몽마르트르 같은 밀려난 사람들의 동네가 있었다. 사회학자 로저 굴드는 이를 구조로 읽는다. 오스만 사업이 노동자를 외곽으로 흩자, 그곳에서는 직업이 아니라 거주가 사람들의 관계를 엮었다. 굴드에 따르면 1871년의 봉기를 조직한 힘은 계급 못지않게 이웃 연대였다.⁸ 학계에서 논쟁이 이어지는 해석이다. 그러나 이 해석이 맞든 일부만 맞든, 밀려남은 사라지지 않고 쌓였다가 다른 형태로 돌아온다는 패턴은 남는다. 1971년 8월 광주대단지의 벌판도 같은 질문을 던졌다.
밀려난 자들의 몫을 장부에 적을 때
한국현대사에서 이동이 기본값이었다면, 질문은 ‘이동을 막을 것인가’가 아니다. 사람은 일자리와 교육과 가족을 따라 언제든 움직인다. 질문은 이동의 비용이 누구에게 얼마나 돌아가는가이다.
시장은 이 이동을 가능하게 한 힘이었다. 임금이 있는 곳으로 사람을 부른 것도, 낡은 도시를 새 도시로 바꾼 속도를 낸 것도 시장이었다. 문제는 시장 자체가 아니라, 시장이 쓰는 장부가 너무 좁다는 데 있다.
도시가 성숙하는 것은 건물이 높아지는 일이 아니다. 떠나는 사람의 몫을 장부에 적는 일이다. 방향은 세 가지로 모인다.
첫째, 이주 대책은 철거 뒤에 덧붙이는 보상이 아니라 계획 단계에서 먼저 설계하는 조건이어야 한다. 광주대단지는 사람이 먼저 도착하고 도시가 나중에 왔다. 순서가 거꾸로였다.
둘째, 개발 이익을 계산하는 장부에 세입자의 이주 비용과 관계의 단절 비용을 함께 올려야 한다. 장부 밖 부채를 장부 안으로 들이는 일이다. 이는 개발을 막는 규제가 아니라 가격을 정확히 매기는 일이다. 비용을 빠뜨린 가격은 시장의 신호로서도 부정확하고, 보이지 않는 비용은 줄어들지 않고 다음 세대에게 이월된다.
셋째, 한 동네에 얼마나 오래 머물 수 있는가를 도시의 성과 지표로 삼아야 한다. 새로 지은 집의 수만 세어서는 도시가 사람을 붙들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오래 머무는 주민은 단골과 상권과 일자리를 만드는 도시의 자산이기도 하다.
이 문장은 진영을 가르지 않는다. 개발을 반대하는 말도, 찬성하는 말도 아니다. 시장을 의심하는 말도, 맹신하는 말도 아니다. 개발이 어떤 장부 위에서 이루어지느냐를 묻는 말이다. 파리는 이 세 가지를 하지 않았고, 서울도 한동안 하지 않았다. 그 결과가 무엇이었는지는 이미 두 번의 역사가 보여 주었다.
오늘도 수도권 곳곳에서 재개발과 재건축의 속도를 둘러싼 논쟁이 이어지고, 전세와 월세를 옮겨 다니는 사람들의 불안은 가라앉지 않는다. 집을 내놓는 사람과 집을 비우는 사람은 오늘도 같은 사람이 아니다. 재개발의 속도가 낡은 주거를 개선해 온 공도 크다. 공급의 ‘숫자’와 사업의 ‘속도’는 도시가 살아 움직이기 위해 필요한 지표다. 다만 그 지표가 소외되는 삶의 자리를 셈하지 않는 한, 우리는 한 세기 전의 장부를 그대로 복사해 쓰고 있는 셈이다.
1853년 파리의 대로 위에서도, 1971년 광주대단지의 벌판 위에서도, 짐을 싸는 사람들은 같은 질문을 안고 있었다. 이 도시에서 내 자리는 얼마나 오래 허락되는가. 우리는 아직 그 질문에 충분히 답하지 않았다.
* 참고할 말씀: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 이사야 5:8
¹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1960·1970). 서울 인구 약 245만 명 → 약 553만 명.
² David Harvey, Paris, Capital of Modernity (2003). 1852년 3월 토지 수용 법령, 1860년 파리 외곽 편입(12개 구→20개 구).
³ Friedrich Engels, 『주택문제』(Zur Wohnungsfrage, 1872~73).
⁴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1970년 4월 8일), 사망 33명.
⁵ 성남시 8·10 성남(광주대단지) 항쟁 관련 공식 설명(주민 5만여 명, 1971.8.10, 1973.7.1 성남시 승격).
⁶ 『孟子』 梁惠王 上. 百畝之田, 五畝之宅 구절 포함.
⁷ Henri Lefebvre, Le droit à la ville (1968).
⁸ Roger V. Gould, Insurgent Identities: Class, Community, and Protest in Paris from 1848 to the Commun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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