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과 궤짝에 담긴 한 시대
1960~70년대 농촌 탈출과 첫 단칸방
2026. 10. 06. · 한국현대-이사-②
서울역에 내린 사람들의 짐은 왜 그렇게 가벼웠을까
앞선 글에서 우리는 1950년 12월, 흥남 부두에서 보따리 하나에 목숨을 싸 들고 배에 오르던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그때 짐을 싸게 한 것은 전쟁이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1960년대, 이번에는 전쟁이 아니라 가난이 사람들의 짐을 싸게 했다. 완행열차가 서울역에 닿으면 플랫폼으로 쏟아져 내린 사람들의 손에는 보따리 하나, 혹은 사과 궤짝 하나가 들려 있었다. 사과를 담던 나무 궤짝에 이불과 냄비와 옷가지를 꾸려 올라왔다는 회고는 그 시절 이야기에 흔하게 등장한다.
짐이 가벼웠던 것은 가진 것이 없어서만은 아니다. 돌아올 생각이 없는 사람은 무거운 것을 들고 오지 않는다. 가볍게 싼 짐은 이 길이 다녀오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는 표시다.
사람들은 왜 떠났을까. 가장 쉬운 답은 “가난”이다. 틀린 답은 아니다. 그러나 이 글은 다른 데서 출발한다. 그들이 떠난 이유는 한 번도 같지 않았다. 그리고 이유가 바뀔 때마다, 떠나는 사람이 그 이유를 고를 수 있었던 적은 거의 없었다.
밀려서 떠났고, 끌려서 올라왔고, 다시 쫓겨났다
첫 번째 이유는 밀어냄이었다. 1960년대 초 한국의 농가는 평균 1헥타르가 채 되지 않는 땅에 기대어 살았다. 자식이 여럿이면 땅은 나눌수록 줄었고, 보릿고개는 해마다 되풀이되었다. 1962년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시작되면서 국가의 목표는 수출 공업화로 기울었다. 공장에 필요한 노동력은 농촌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도시 노동자의 임금을 눌러야 수출 가격을 맞출 수 있었고, 그래서 곡물 가격도 낮게 유지되었다. 그 비용을 결국 농가가 짊어졌다는 해석이 학계에서 널리 제기되어 왔다. 농촌에 남아서는 살림이 늘지 않는 구조였고, 이농(離農)은 그 구조가 낳은 결과였다.
두 번째 이유는 끌어당김이었다. 1964년 구로에 수출산업공단이 들어섰고, 가발과 섬유와 봉제가 한국의 주력 수출품이 되었다. 청계천 평화시장의 봉제 공장들도 일손을 불렀다. 일자리가 서울에 있다는 소문은 농촌의 밤을 건너 빠르게 퍼졌다. 누이들이 먼저 올라가 오빠와 남동생의 학비를 댔다는 이야기는 이 시기 가족사에서 가장 자주 반복되는 장면이다.
이들이 처음 얻은 집은 방 하나를 여러 칸으로 쪼갠 이른바 ‘벌집’이거나, 달동네 비탈의 사글세 단칸방이었다. 방 하나에 가족이 함께 눕고, 수도와 화장실은 이웃과 나눠 썼다.
세 번째 이유는 다시 밀어냄이었다. 서울이 사람을 불러들인 속도를 집이 따라가지 못했다. 서울의 인구는 1960년 약 245만 명에서 1970년 약 543만 명으로¹ 10년 만에 두 배를 넘었다. 도시는 늘어난 사람들을 판자촌과 무허가 주택으로 받아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정부는 그 판자촌을 철거하며 주민들을 경기도 광주군 일대의 대단지(오늘의 성남)로 옮겼다.
그곳으로 향한 이들이 모두 철거민은 아니었다. 분양 공고를 믿고 입주권을 사서 들어온 이들도 한데 섞여 있었다. 수만 명이 모여들었지만 일자리도, 상하수도도, 생활 기반도 충분하지 않았다. 1971년 8월 10일, 사람들은 거리로 나섰다. 광주대단지 사건이다. 서울에서 옮겨 온 사람들이 생계와 최소한의 생활 기반을 요구하며 집단으로 항의에 나선 일로, 당시에는 난동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오늘날에는 도시 빈민이 생존권을 요구한 대표적인 사건으로 평가되곤 한다. 농촌에서 밀려 올라온 사람이 도시에서 다시 한 번 밀려난 장면이었다.
1970년은 이 이동의 모순이 한 해 안에 겹친 해였다. 그해 4월 정부는 농촌을 살리자는 새마을운동을 제창했고, 7월 7일에는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길은 빨라졌고 나라는 속도를 얻었다.
같은 해 4월 8일에는 서울 와우산 기슭의 시민아파트가 무너졌다. 11월 13일에는 평화시장의 재단사 전태일이 스스로 몸에 불을 붙였다. 속도가 닿은 곳과 속도가 닿지 못한 곳이 같은 해, 같은 도시에 있었다. 농촌을 붙잡는 구호와 도시로 끄는 힘이 같은 나라에서 동시에 작동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 모든 일이 겹친 도시의 한복판에서 첫 단칸방의 월세를 세고 있었다.
맨체스터의 지하실과 서울의 벌집 사이
이 풍경을 처음 보는 사람은 없다. 한국이 압축해서 겪은 일을 영국은 100년에 걸쳐 먼저 겪었다.
18세기 중반부터 이어진 인클로저(공유지의 울타리 치기)는 영국 농민이 기대던 터전을 흔들었다. 사람을 도시로 빨아들인 직접적인 힘은 그 뒤에 왔다. 증기기관을 단 면직 공장이 북부 도시에 들어서면서, 땅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공장의 일손으로 흡수되었다. 맨체스터는 19세기 초 수만 명 규모의 도시에서 1851년 30만 명 안팎으로 불어났다. 그해 영국의 인구조사에서 도시 거주민이 사상 처음으로 농촌 거주민을 앞질렀다.
그렇게 몰려든 사람들을 도시는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환기도 되지 않는 지하 셀러에 살았고, 하수는 길 한가운데를 흘렀다. 1832년과 1849년에는 콜레라가 도시를 휩쓸었다.
에드윈 채드윅이 1842년에 낸 위생 조사 보고서에는 맨체스터 노동자 계급의 평균 사망 연령이 17세로 집계되어 있다.² 영아 사망이 평균을 끌어내린 수치라는 점을 감안해도 주거 환경이 어떤 상태였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1845년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에서 이 도시의 골목을 직접 걸으며 기록했다.³
영국이 공중보건법을 제정한 것은 1848년이었다.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든 지 반세기 가까이 지난 뒤였고, 하수도와 상수도가 도시 전체에 놓이기까지는 다시 수십 년이 걸렸다.
같은 시기 다른 나라는 이동 자체를 설계했다. 중국은 1958년 1월 호구등기조례를 공포해 농촌 호적을 가진 사람이 도시로 옮겨 가는 것을 법으로 막았다. 식량 공급과 도시 인구를 국가가 통제하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1968년 12월 이후에는 방향이 거꾸로 되어, 도시의 젊은이 1,600만 명가량이 농촌으로 보내졌다. 도시의 일자리와 식량 부담을 덜고 사회를 통제하려는 국가의 계산이 여기서도 작동했다.
이동을 막는 나라와 이동을 풀어 둔 나라는 정반대처럼 보인다. 그러나 두 나라 모두에서 사람의 이동은 국가의 설계 안에 들어 있었고, 개인이 고를 수 있는 것은 그 설계가 허락한 틈뿐이었다. 1963년 12월 서독으로 가는 광부들이 첫 비행기에 오른 것도 그 틈 중 하나였다. 이 시기 한국인은 국내의 철도로도, 국경 너머의 항로로도 움직이고 있었다.
맨체스터의 지하실과 서울의 벌집은 서로 다른 시대와 다른 나라의 풍경이지만, 도시가 준비하기 전에 사람이 먼저 도착했다는 점에서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은 왜 반복되는가.
이유가 바뀌어도 짐은 계속 쌌다
시선을 한 걸음 물려서 보면 구조가 보인다. 흥남에서는 전쟁에 쫓겨 짐을 쌌고, 1960년대에는 가난에 밀려 쌌고, 1970년대에는 공장과 도시의 불빛에 끌려 쌌고, 그 도시에서 다시 철거에 쫓겨 쌌다. 이유는 네 번 바뀌었지만 그때마다 짐을 싼 사람은 같은 사람들이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이동은 예외가 아니라 기본값이었다. 정착은 이동 사이에 잠깐 끼어든 쉼표에 가까웠다. 그래서 이 시기의 ‘집’은 머무는 곳이 아니라 다음 이동을 기다리는 정거장에 가까웠다.
주거의 방식이 이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 준다. 전세는 목돈을 맡기고 계약이 끝나면 돌려받는 방식이고, 사글세는 보증금 없이 몇 달 치 월세를 미리 내는 방식이다. 맡길 목돈조차 없는 사람이 택하는 것이 사글세였다. 사글세방의 사람은 집을 사는 것이 아니라 매달 떠날 수 있는 권리를 산다.
이 구조에서 확신할 수 있는 패턴이 하나 있다. 이동의 이유가 외부에서 정해지는 사회에서는, 사람은 목적지를 고를 수 있어도 출발의 이유는 고르지 못한다. 1960년대의 청년은 서울을 골랐다고 느꼈겠지만, 그를 농촌에서 밀어낸 힘은 그가 고르지 않은 것이었다. 선택이라고 느낀 것과 실제로 선택할 수 있었던 것 사이의 간격이 이 시대의 단칸방이었다.
오늘의 상경 열차는 어디서 출발하는가
사과 궤짝은 사라졌지만 열차는 아직 달린다. 오늘의 청년은 취업과 진학을 이유로 짐을 싸서 수도권으로 올라가고, 그 짐은 이제 캐리어와 이삿짐 트럭에 실린다. 수도권 인구가 비수도권을 넘어선 것은 2019년이고,⁴ 지방 소멸은 이제 일상어가 되었다. 오늘 한국 청년의 상경 열차는 사과 궤짝의 시대와 같은 방향으로 달리고 있다. 이유는 가난에서 일자리로, 일자리에서 집값과 기회로 바뀌었지만 방향은 바뀌지 않았다.
앞으로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도 이 구조 안에서 읽힌다.
첫째, 떠날 수 있는 사회와 떠날 수밖에 없는 사회를 구분해야 한다. 이동 자체는 막을 수도 없고 막아서도 안 된다. 그러나 이동이 선택일 때와 강제일 때 사회가 치르는 비용은 다르다. 선택으로 옮긴 사람은 새 도시에 뿌리를 내리지만, 밀려난 사람은 새 도시에서도 임시 거처의 감각으로 산다.
둘째, 도착지의 최소 기준을 이동보다 먼저 세워야 한다. 영국이 1848년에야 법으로 확인한 것은 도시가 사람을 받는 능력의 한계였고, 한국이 광주대단지에서 확인한 것도 같은 사실이었다. 이동이 끝난 뒤에 기준을 세우면 그 비용은 먼저 도착한 세대가 치른다. 주거는 이동의 마지막 청구서가 도착하는 곳이다. 도착지의 집이 정거장으로만 설계되면, 그곳에 닿은 세대는 정착을 다음 세대에게 미룬다.
셋째, 머무를 이유가 떠날 이유만큼 구체적이어야 한다. 1970년의 새마을운동은 농촌을 붙잡으려 했지만 이농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구호는 사람을 붙들지 못한다. 사람이 머무는 곳은 일자리와 교육과 병원이 닿는 곳이다.
사과 궤짝 위에서 시작된 이동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바라보는 자의 기록은 짐을 싸는 손을 기록하되, 그 짐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계속 묻는다.
그렇다면 오늘의 우리는 지금 어떤 이유로 짐을 싸고 있으며, 그 이유를 우리가 고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 참고할 말씀: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래 것을 찾나니’ — 히브리서 13:14
¹ 통계청(현 국가데이터처) 인구주택총조사 1960·1970년 서울특별시 인구.
² Edwin Chadwick, Report on the Sanitary Condition of the Labouring Population of Great Britain (1842).
³ Friedrich Engels, Die Lage der arbeitenden Klasse in England (1845).
⁴ 행정안전부 주민등록인구통계 2019년 말 기준 수도권·비수도권 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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