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양이 흔들리자, 한강도 흔들렸다

책계왕이 쌓은 아차성을 연상시키는 한강 변 산등성이의 고대 아시아 성벽 유적과 석양
한강 유역과 고구려의 위협에 대비해 성을 쌓았던 책계왕·분서왕 시대의 역사를 상징하는 고대 산성 유적.

낙양이 흔들리자, 한강도 흔들렸다

책계왕과 분서왕 · 286년 ~ 304년

역사·한국사 · 2026.08.19


지금도 크지 않은 나라들은 더 큰 나라와의 관계를 통해 안전을 산다.

군사 동맹, 통상 협정, 때로는 왕실 간의 혼인까지 — 형식은 시대마다 다르지만 논리는 같다. 강한 이웃과 묶이면 당장의 위협은 줄어든다. 다만 그 이웃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그 흔들림은 고스란히 내 몫으로 넘어온다.

1,700여 년 전, 한강 유역의 신생국가 백제도 같은 선택 앞에 서 있었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고이왕이 율령을 반포하며 백제를 ‘법으로 다스려지는 나라’로 세우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그 아들 책계왕의 시대는, 그렇게 세워진 나라가 국경 밖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잃었는지를 보여준다.

대방의 사위가 된 왕 — 286년의 선택

책계왕은 286년, 고이왕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삼국사기』 백제본기).

그는 즉위와 함께 대방태수의 딸 보과(寶菓)를 왕비로 맞았다. 이는 단순한 혼인이 아니라, 한반도 서북부에 자리한 중국계 군현 대방(帶方)과 백제 사이의 정치적 결속이었다고 읽힐 수 있다. 대방은 원래 한사군(漢四郡) 체제의 잔재로, 낙랑군에서 갈라져 나온 행정 거점이었다.

이 결속은 곧 시험대에 올랐다. 책계왕 2년인 287년, 고구려가 대방을 공격하자 대방태수는 사위의 나라 백제에 원병을 요청했다. 책계왕은 군사를 보내 대방을 구원했다(『삼국사기』). 사돈 관계가 실제 군사행동으로 이어진 사례였다.

동시에 그는 북쪽 국경에 아차성(阿且城)과 사성(蛇城)을 새로 쌓았다. 고구려와의 충돌 가능성을 이미 상수로 놓고 있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298년, 책계왕은 국경에서 침입을 막다가 전사했다(『삼국사기』). 사료에는 침입 세력이 ‘한(漢)’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낙랑·대방 지역의 중국계 잔존 세력으로 보는 견해와 한반도 남부 삼한(三韓) 계열의 개입으로 보는 견해가 함께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느 쪽이든 대방의 사위가 되어 얻은 연대가, 오히려 그 반대편에서 오는 위협으로 되돌아왔다는 본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 듯하다.

그의 아들 분서왕은 즉위 직후 놀랍게도 대방을 먼저 공격했다. 아버지가 목숨을 걸고 지켰던 대상을 아들이 먼저 친 셈이다. 이는 모순이라기보다 정세 변화에 따른 전략적 전환으로 풀이할 수 있다. 서진 중앙이 내분으로 대방을 통제할 힘을 잃어가던 상황에서, 대방은 더 이상 ‘지켜야 할 사돈’이라기보다 ‘주인 없는 거점’에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서왕은 그 힘의 공백을 선제적으로 활용하는 쪽을 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304년, 그는 그렇게 확보한 땅과 함께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했다(『삼국사기』).

낙양에서 시작된 균열, 변방까지 번지다

같은 시기, 대륙의 중심에서는 훨씬 더 큰 균열이 시작되고 있었다.

서진(西晉)은 280년, 위·촉·오 삼국을 통일하며 대륙을 하나의 질서 아래 두는 데 성공한 나라였다. 그러나 그 통일은 오래가지 못했다. 291년, 황실 내부의 권력 다툼인 이른바 ‘팔왕의 난(八王之亂)’이 시작되었고, 이는 306년까지 이어지며 서진 중앙 권력을 근본에서부터 흔들었다.

낙랑과 대방은 지리적으로 서진의 가장 먼 변방 행정구역이었다. 중앙이 내분에 빠지면, 그 통제력이 가장 먼저 끊기는 곳도 바로 그런 변방이다. 책계왕이 대방의 사위가 되고, 대방을 구원하고, 결국 대방·낙랑 세력과의 충돌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286년부터 298년까지의 시간은, 정확히 서진 중앙 권력이 균열하기 시작한 시점과 겹친다.

책계왕과 분서왕이 상대한 것은 ‘강한 제국의 변방’이 아니라, ‘무너지고 있는 제국이 미처 놓지 못한 손’이었다고 읽힐 수 있다. 낙랑·대방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들을 지탱하던 중심은 이미 스스로를 지탱하기도 버거운 상태였다.

제국이 흔들릴 때, 변방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

이 구도에서 백제의 선택을 다시 보면, 단순한 ‘동맹의 성공과 실패’로 정리하기는 어렵다.

책계왕이 대방과 맺은 혼인 동맹은 즉위 직후에는 분명한 이득이었다. 287년 원병 요청에 응한 것도, 그 관계 안에서는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문제는 그 관계의 다른 쪽 끝, 즉 대방·낙랑을 떠받치던 서진의 중심이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백제가 통제할 수 없었다는 데 있다.

동맹은 상대가 강할 때는 방패가 되지만, 상대가 흔들릴 때는 그 흔들림을 함께 짊어지게 만드는 밧줄이 되기도 한다. 책계왕의 죽음과 분서왕의 죽음은 모두, 백제가 스스로 일으킨 전쟁이 아니라 대방·낙랑이라는 무너져가는 세력권 안으로 끌려 들어간 결과였다는 점에서 같은 패턴을 공유한다.

역사는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중심이 흔들리는 제국 곁에 서 있던 변방 소국의 선택지가 애초에 얼마나 좁았는지는, 이 시기의 기록만으로 단정하기 어렵다. 다만 그 좁은 선택지 안에서 백제가 무엇을 붙잡고 무엇을 놓았는지는, 이후 근초고왕 대의 팽창까지 이어지는 흐름의 한 갈피로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누구의 사위인가

책계왕도, 분서왕도 스스로 무너뜨린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다만 자신들이 손을 잡았던 상대가 무너지는 자리에 함께 서 있었을 뿐이다.

지금 이 질문을 현재로 가져와 본다면 — 우리가 지금 붙잡고 있는 관계 중, 그 중심이 조용히 흔들리고 있는 것은 없는가.

오늘날 한국이 처한 외교적 위치는 이 질문을 관념으로 남겨두지 않는다. 주한미군 재배치, 방위비 분담 재협상, 워싱턴의 대중(對中) 전략 선회 — 이 셋은 지난 몇 년간 단 한 번도 완전히 조용했던 적이 없다. 동맹이 깨졌다는 뜻이 아니다. 동맹의 조건이 더 이상 한 세대 전처럼 고정된 상수가 아니라는 뜻이다. 대방의 사위였던 책계왕도 관계는 유지되고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가 놓친 것은 관계의 존속이 아니라, 그 관계를 떠받치던 상대의 중심이 이미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 참고할 말씀: ‘고관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 시편 146편 3절


[3부] 삼국 경쟁기 — 백제 소시리즈 전체 보기

3-백제-① 초고왕 — 신라와의 백년 전쟁 시작 (166~214년) → 바로가기
3-백제-② 고이왕 — 율령 반포, 법이 나라를 만든다 (234~286년) → 바로가기
3-백제-③ 책계왕·분서왕 — 낙랑·대방과의 충돌 (286~304년) ▶ 이번 편


¹ 『삼국사기』 백제본기, 책계왕·분서왕조.
² 서진 팔왕의 난(291~306년) 관련 서술은 통설에 근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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