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이 함대를 이겼다
항해법과 영국 해운 패권
2026.09.01 · 바다
바다는 배로 지배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17세기 어느 가을, 런던의 의회는 함대 없이 바다를 손에 넣는 법을 하나 통과시켰다.
1592년의 무적함대도, 화려한 해전도 아니었다. 종이 한 장, 조항 몇 줄이었다. 그리고 그 조항은 지금도 형태를 바꿔가며 반복되고 있다.
2025년 봄, 미국 역시 유사한 수단을 다듬기 시작했다. 무역대표부(USTR)가 중국산 선박과 중국 선사에 미국 입항 수수료를 부과하기로 한 것이다.5 표면적 명분은 무역법 정비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세계 조선업의 절반 이상을 점유한 중국의 해운 지배력을 겨냥한 조치다.6
전함이 아니라 서류로 해상 패권을 흔드는 방식 — 이것은 낯설지 않다. 이미 370여 년 전 영국이 네덜란드를 상대로 먼저 썼던 수법이기 때문이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네덜란드가 자본과 신용의 힘으로 유럽 최강의 해상 제국을 세웠으나, 그 힘을 지킬 만큼의 인구와 영토를 갖지 못해 결국 구조적 한계에 직면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작은 나라는 왜 결국 지는가》, 네덜란드 공화국의 규모의 한계). 그 뒤를 이은 것은 더 강한 함대가 아니라, 더 정교한 법이었다.
1651년 10월, 의회가 통과시킨 법 하나
1651년 10월, 크롬웰이 이끌던 잉글랜드 의회(Rump Parliament)는 항해법(Navigation Act)을 통과시킨다.1 조항의 핵심은 단순했다. 잉글랜드나 그 식민지로 들어오는 상품은 오직 잉글랜드 선박 혹은 원산국 선박으로만 운송하도록 제한하는 내용이었다.
겉으로는 무역 규정이었다. 그러나 이 법이 실제로 겨냥한 상대는 하나였다. 유럽의 화물을 실어 나르며 중계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던 네덜란드였다. 당시 네덜란드 상선은 유럽 해상운송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고 있었고, 잉글랜드는 자국 상선단만으로는 이 구조를 뚫을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잉글랜드는 배를 더 짓는 대신, 네덜란드 배가 잉글랜드 항구에 들어올 수 없도록 법을 고쳤다.
네덜란드는 이 법을 전쟁의 명분으로 받아들였다. 이듬해인 1652년, 제1차 영란전쟁(Anglo-Dutch War)이 시작된다.2 초반에는 당시 세계 최강으로 불리던 네덜란드 해군이 기선을 제압했다. 그러나 1653년, 명제독 마르턴 트롬프가 전사하면서 네덜란드의 전의는 크게 꺾였고, 양측 모두 전쟁으로 무역이 끊기는 것을 더 견디기 어려워했다. 1654년 4월, 양국은 웨스트민스터 조약으로 전쟁을 끝맺는다. 이 조약에서 네덜란드는 잉글랜드의 항해법을 그대로 인정하기로 했고, 자국 함선이 잉글랜드 근해를 지날 때는 먼저 경례하기로 합의했다. 전장에서는 승패를 주고받았지만, 조약 테이블 위에서는 법이 그대로 남은 것이다. 1660년, 왕정복고와 함께 즉위한 찰스 2세는 이 법을 오히려 더 강화한다. 담배·설탕·면화처럼 식민지에서 나는 주요 산물을 ‘열거 품목(enumerated goods)’으로 따로 지정해, 이 품목들은 오직 잉글랜드나 다른 잉글랜드령 식민지로만 수출할 수 있도록 못박았다. 1663년에는 스테이플법(Staple Act)을 더해 반대 방향도 막았다. 유럽에서 만든 물건이 식민지로 들어갈 때도 반드시 잉글랜드 항구를 한 번 거치도록 한 것이다. 식민지 입장에서는 팔 때도 살 때도 런던을 통과해야 하는 구조에 갇힌 셈이었다.
전쟁은 세 차례(1652, 1665, 1672년) 반복되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지점은 여기다. 잉글랜드가 해전에서 압도적으로 이긴 전쟁은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 세기가 지날 무렵, 대서양 무역의 중심은 암스테르담에서 런던으로 완전히 옮겨가 있었다. 함대가 승부를 내지 못한 자리를, 법이 대신 결정한 것이다.
다만 법 조항 자체가 이긴 것은 아니었다. 항해법이 통과된 직후에도 밀무역은 여전히 성행했고, 잉글랜드 내 물가는 오히려 흔들렸다. 법이 끝내 효력을 발휘한 것은, 규제의 충격을 견뎌낼 거대한 내수 시장과 식민지라는 ‘판’을 잉글랜드가 이미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비자와 홉스, 법에서 권력을 본 두 사람
韓非子曰: “抱法處勢則治,背法去勢則亂。”3
(한비자왈, 포법처세즉치, 배법거세즉난.)
“법을 끌어안고 권세에 자리하면 다스려지고, 법을 등지고 권세를 버리면 어지러워진다.”
한비자에게 법이란 군주 개인의 도덕이나 무력을 대신하는 것이었다. 힘이 아니라 규칙이 질서를 만든다는 발상. 17세기 잉글랜드가 항해법으로 한 일도 이와 다르지 않다. 해군력에서 네덜란드를 압도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잉글랜드는 ‘규칙’을 먼저 바꾸어 유리한 자리를 선점했다.
서양에서는 토머스 홉스가 비슷한 통찰에 도달했다. 그는 『리바이어던』에서 국가의 법이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억누르기 위해 개인들이 위임한 힘의 총합이라고 보았다.4 홉스에게 법은 도덕의 산물이 아니라 질서를 향한 계약의 산물이었다. 항해법 역시 도덕적 명분보다는, 해상 무역이라는 무질서 상태에서 잉글랜드에 유리한 질서를 강제로 세우려는 계약이었다고 읽힐 수 있다.
한비자가 말한 세(勢) 개념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법은 그것을 뒷받침할 힘의 자리 없이는 공문(空文)에 그친다는 것. 오늘날 301조 조치가 실제로 작동하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미국 시장이라는, 어떤 나라도 쉽게 등지지 못할 담보가 그 뒤에 있기 때문으로 읽힐 수 있다.
법이 힘을 대신할 수 있다는 이 오래된 통찰은, 국력의 격차를 뒤집을 수 없을 때 국가가 택하는 마지막 카드로 반복되어 온 것은 아닌가 — 역사는 이 지점에서 질문을 던진다.
패권은 법의 언어로 넘어간다
흥미로운 건 명분의 방향이다. 앞서던 쪽(네덜란드, 오늘날의 중국)은 늘 자유무역을 외쳤고, 뒤쫓던 쪽(잉글랜드, 오늘날의 미국)은 늘 법과 규제를 무기로 삼았다. 승자는 자유무역을 부르짖고, 쫓기는 자는 법과 규제를 부르짖는다 — 이것이 패권 이동기마다 반복되는 명분의 역설이다.
여기서부터는 조심스럽게 말할 이유가 없다. 패권의 이동은 전투가 아니라 규칙의 이동에서 먼저 시작된다. 이것이 항해법과 301조 조치가 370년의 시차를 두고 공통으로 증언하는 패턴이다.
네덜란드가 잃은 것은 단 한 번의 해전이 아니었다. 잉글랜드가 만든 새로운 규칙 안에서 네덜란드 상선이 설 자리를 서서히 잃어간 것이다. 중국의 조선업이 지금 마주한 것도 같은 구조다. 미국은 조선 능력에서 이미 중국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중국의 선박 건조 점유율은 1999년 5% 미만에서 2023년 51%로 급증했다6). 그래서 미국이 택한 카드는 배를 더 짓는 경쟁이 아니라, 입항 조건 자체를 바꾸는 것이었다.
힘의 격차를 뒤집을 수 없을 때, 국가는 전장을 규칙의 영역으로 옮긴다. 이것은 우연히 반복되는 사건이 아니라, 패권 이동기마다 나타나는 구조다. 반도체 수출통제, 관세, 표준 경쟁 — 오늘날 국가 간 충돌의 상당수가 함포가 아니라 법조문의 형태를 띠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영국이 항해법을 통과시킨 1651년, 조선의 조정에서도 조용한 규칙의 대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7월, 영의정 김육의 주도로 충청도에 대동법이 시행된다.7 집집마다 걷던 공납을 토지 결수에 따른 쌀 한 가지 기준으로 바꾼 조치였다. 규모도 무대도 전혀 달랐지만, 원리는 같았다. 낡은 규칙을 바꾸는 쪽이 다음 시대의 질서를 가져간다는 것. 런던의 의회가 바다의 규칙을 다시 쓰던 그해, 조선의 조정은 세금의 규칙을 다시 쓰고 있었다 — 다만 한쪽은 밖을 향했고, 한쪽은 안을 향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2년 뒤인 1653년 8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의 무역선 한 척이 대만에서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 태풍을 만나 제주 앞바다에 좌초했다. 헨드릭 하멜의 표류였다.8 이 배에는 당대 세계 최고 수준으로 꼽히던 네덜란드의 항해술과 화포 제작 기술을 지닌 이들이 타고 있었다. 26년 앞서 같은 경로로 표류해 조선에 귀화한 벨테브레(박연)가 훈련도감에서 홍이포 주조법을 전수한 전례가 이미 있었기에, 조선 조정도 하멜 일행을 처음에는 훈련도감에 배속시켰다.9 그러나 이 활용은 오래가지 못했다. 하멜 일행 중 항해사와 포술장 두 사람이 한양에 온 청나라 사신의 행차에 갑자기 뛰어들어, 자신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매달리는 사건이 벌어졌다. 조선으로서는 청과의 외교 문제로 번질 수 있는 소동이었다. 두 사람은 결국 처형되었고, 나머지 일행도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까지 몰렸다가 가까스로 귀양으로 마무리되었다. 이후 이들은 전주·남원·순천 등지로 뿔뿔이 흩어져 잡역을 전전하게 됐고, 그 기술은 조선 안에서 더 이어지지 못했다. 유럽이 법으로 바다의 지도를 다시 그리는 동안, 조선은 그 지도를 그릴 기술이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순간을 붙잡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다만 한 가지는 여전히 신중하게 말해야 한다. 미국의 이번 301조 조치가 실제로 해운·조선 패권을 되돌려줄 것인지는 아직 그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려운 수준일 뿐, 확정된 결론은 아니다. 항해법도 통과 직후에는 그 효과를 아무도 장담하지 못했다.
우리는 이미 법정에 있다
370년 전 런던의 의회는 배 한 척 만들지 않고 해상 질서를 바꾸는 법을 만들었다. 그 법이 만든 항구의 문턱은 지금도 형태를 바꿔가며 세계 곳곳에 서 있다.
우리는 이미 그 법정 안에 들어와 있는지도 모른다. 다음에 문턱을 넘지 못하는 쪽은 함대가 약한 나라가 아니라, 규칙을 먼저 읽지 못한 나라일 수 있다. 그 규칙의 칼날이 다음에는 누구를 향할 것인지 묻는 지점에서, 바라보는 자의 기록은 다시 시작된다.
* 참고할 말씀: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 전도서 1:9
각주
1. 항해법(Navigation Act), 1651년 10월 잉글랜드 의회(Rump Parliament) 통과. 1660년 찰스 2세 재위 시 강화(열거 품목 지정), 1663년 스테이플법(Staple Act)으로 유럽산 수입품의 잉글랜드 경유 의무화
2. 제1~3차 영란전쟁(Anglo-Dutch War), 1652~1654 / 1665~1667 / 1672~1674. 제1차 전쟁은 1654년 4월 15일 웨스트민스터 조약으로 종결, 네덜란드는 항해법 수용에 합의
3. 한비자, 『한비자』 – 法·勢·術 개념 중 법(法)·세(勢) 관련 구절
4. 토머스 홉스, 『리바이어던』(1651) – 사회계약과 국가권력론
5. 미국 무역대표부(USTR), 무역법 제301조에 근거한 중국 해운·조선 견제 조치, 2025.2.21. 제안 / 2025.4.17. 확정 발표 / 2025.10.14. 시행
6. KOTRA 자료, 중국 선박 건조 점유율 변화(1999년 5% 미만 → 2023년 51%)
7. 대동법, 충청도(호서) 시행 1651년(효종 2년) 7월, 영의정 김육 주도
8. 헨드릭 하멜, 스페르베르호 표류, 1653년 8월 16일 대정현(제주) 표착 — 대만에서 나가사키로 향하던 동인도회사 무역선, 태풍으로 좌초
9. 얀 얀스 벨테브레(박연), 1627년 제주 표착·조선 귀화, 훈련도감에서 홍이포 등 화포 주조법 전수. 1653년 하멜 일행 표착 시 통역으로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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