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천왕 즉위

청와대 본관 전경과 북악산 배경 - 고국천왕의 고구려 중앙집권화와 권력의 중심을 상징하는 대표 이미지
흩어진 힘을 모으는 권력의 중심, 대한민국 청와대 본관. 1,800여 년 전 고구려 고국천왕이 마주했던 중앙집권의 질문과 이어집니다.

고국천왕 즉위 — 연맹은 왜 국가가 되지 않으면 무너지는가

[3부] 삼국 경쟁기 · 고구려 ③

2026.07.31 · 역사·철학


지금, 권력은 다시 중앙으로 모이고 있다

2026년, 세계 곳곳에서 같은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
행정부의 권한은 커지고, 개별 세력들은 하나의 중심으로 흡수되길 요구받는다.

이 흐름을 두고 누군가는 “효율”이라 부르고, 누군가는 “위험”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 질문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1,847년 전, 압록강 유역의 작은 왕국도 똑같은 질문 앞에 서 있었다.
다섯 개의 부족이 느슨하게 묶인 나라, 고구려였다.

179년 12월, 신대왕이 죽고 그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고국천왕이었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신대왕이 역모의 생존자로서 어떻게 왕위에 올랐는지를 살펴본 바 있다. → 신대왕 즉위 — 역모의 생존자가 왕이 되는 방식)

그리고 그가 왕좌에 앉아 마주한 것은, 왕관이 아니라 다섯 개로 쪼개진 권력이었다.

179년, 다섯 부족의 나라에서 하나의 국가로

당시 고구려는 계루부·소노부·절노부·순노부·관노부, 다섯 부족의 연맹체였다.
왕실인 계루부조차 다른 네 부족의 협조 없이는 군사도, 세금도, 심지어 왕위 계승조차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었다.

왕은 있었지만, 국가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 유라시아 대륙 반대편에서는 정반대 방향의 균열이 진행되고 있었다.

180년 3월, 로마에서는 오현제의 마지막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숨을 거두었다.
앞선 네 황제는 친아들이 없어 능력을 기준으로 양자를 들여 후계로 삼았으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는 친아들 콤모두스가 있었다.

능력 중심의 양자 상속은 확고한 원칙이라기보다 우연의 산물이었을지 모른다.
그 우연이 멈추자, 로마를 지탱하던 승계의 축도 함께 흔들렸던 것으로 보인다.

184년 3월에는 후한에서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다.
“창천이사, 황천당립(蒼天已死, 黃天當立)” — 푸른 하늘은 이미 죽었고 누런 하늘이 서리라는 구호 아래, 지방의 군웅들이 각자의 무력을 앞세워 중앙의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는 훗날 삼국 분열로 이어지는 긴 균열의 시작이었다.

같은 시대, 로마와 한(漢)이라는 두 거대 제국이 중앙 권력의 이완을 겪고 있을 때, 고구려는 정반대의 실험을 시작한 셈이다.
작고 취약한 왕국이 오히려 권력을 하나로 모으는 방향으로 움직인 것이다.

이 대비는 우연의 일치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세 나라 모두 “누가 최종 결정권을 쥐는가”라는 동일한 질문 앞에 서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고국천왕의 통치는 이후 뚜렷한 방향성을 보인다.
190년 9월, 왕비의 친족 세력이자 연나부(절노부)의 좌가려 등이 반란을 계획했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진압되었다.
이 사건은 부족 귀족의 사병(私兵)과 지역 기반이 왕권에 얼마나 위협적일 수 있는지를 드러낸 계기가 되었고, 이후 왕은 부족장 대신 능력을 기준으로 인재를 등용하는 방향으로 국정을 재편하기 시작한다. (이 이야기는 다음 편, 191년 을파소 등용과 194년 진대법에서 이어진다.)

권세는 빌려줄 수 없다 — 동서양이 함께 던진 질문

한비자는 이렇게 말했다.

勢不可以借人 (세불가이차인) — “권세는 남에게 빌려줄 수 없다.”

한비자에게 권력이란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군주가 신하에게, 왕이 부족장에게 권력의 일부를 내어주는 순간, 그 권력은 결국 원래의 주인에게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다섯 부족에게 나뉘어 있던 고구려의 권력 구조는, 한비자의 시선으로 보면 애초에 지속 가능하지 않은 형태였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서양에서는 토머스 홉스가 비슷한 결론에 다른 경로로 도달했다.
다만 홉스가 말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은 원래 국가 성립 이전의 완전한 자연상태, 즉 어떤 통치 질서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 179년의 고구려는 이미 왕실과 부족장 체제가 존재했다는 점에서 그 자연상태와 완전히 같다고 보기는 어렵다.

홉스 통찰의 핵심은 단순한 무정부 상태 그 자체보다 권력 분산이 초래하는 본질적 불안정성에 있다.
이런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다섯 부족으로 주권이 나뉘어 있던 고구려 역시 평화가 아닌 잠재적 내전 상태에 놓여 있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한비자는 권력의 본질에서, 홉스는 권력 분산이 낳는 결과에서 각각 출발했지만, 두 사람은 결국 같은 지점에서 만난다.
권력이 나뉘어 있는 상태는 안정이 아니라 유예된 충돌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논리에는 반론의 여지가 있다. 권력의 집중이 늘 안정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견제 장치의 소멸이 새로운 폭주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실제로 고국천왕 이후의 고구려 역사도, 왕위를 둘러싼 또 다른 형태의 충돌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

철학은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흩어진 힘은 반드시 하나로 모이거나, 무너진다

179년의 고구려, 180년의 로마, 184년의 한(漢).
세 나라가 같은 시대에 마주한 질문은 결국 하나였다.
“흩어진 권력을 누가, 어떻게 다시 하나로 모을 것인가.”

로마는 그 답을 내지 못한 채 서서히 균열을 키웠고, 한(漢)은 지방의 무력이 중앙의 통제를 이겨버리는 방식으로 답을 강요당했다.

반면 고구려는, 비록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왕이 스스로 그 질문에 답하려 한 드문 사례로 읽힐 수 있다.
좌가려의 난을 진압하고, 부족의 혈통이 아닌 능력을 기준으로 인재를 발탁하려 한 시도는 그 답변의 초안이었다.

역사는 이 지점에서 질문을 던진다.
권력은 자연스럽게 흩어지려는 힘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자연스럽게 모이려는 힘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그 힘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제도인가, 인물인가.

고국천왕의 즉위는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실험이었다. 그 실험이 성공이었는지, 아니면 또 다른 문제의 씨앗이었는지는, 그의 통치가 계속되는 다음 국면들 속에서 조금씩 드러난다.

우리가 회피해 온 질문

179년의 고구려는 권력의 단일화라는 과제를 완수했다.
그러나 모인 힘이 과연 시스템으로서 안정되게 세습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고국천왕의 답안은 미완성으로 남았다.
권력의 결집이 기술의 영역이라면, 그 권력의 안전한 이행은 제도와 통찰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효율성을 명분으로 한 집권과 안전성을 명분으로 한 분권 사이의 긴장은, 체제의 성격과 시대를 불문하고 반복되어 온 정치사의 오랜 패턴으로 읽힐 수 있다.

2026년의 대한민국이 겪고 있는 권력 구조의 균열 역시, 1,800여 년 전 고구려가 마주했던 ‘주권의 최종 소재’에 관한 오래된 질문의 현대적 변주다.

인류는 동일한 권력의 구조적 딜레마 앞에서 얼마나 자주 같은 방식으로 선회하고 무너졌는가 — 그것을 객관적이고 냉혹한 시선으로 포착해 기록하는 것, 그것이 바라보는 자의 기록이 하는 일이다.


* 참고할 말씀: “왕의 말은 권능이 있나니 누가 그에게 이르기를 왕은 무엇을 하시나이까 할 수 있으랴” — 전도서 8:4


각주

1. 신대왕의 죽음과 고국천왕의 즉위(179년 12월)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2. 좌가려의 난(190년 9월)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3.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죽음과 콤모두스의 즉위(180년 3월), 오현제 양자 상속 관행 — 로마사 관련 통설

4. 황건적의 난 발발(184년 3월) — 『후한서』

5. 한비자의 “勢不可以借人” — 『한비자』 내저설(하)

6. 토머스 홉스의 자연상태·주권 개념 — 『리바이어던』(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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