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대왕 즉위 — 역모의 생존자가 왕이 되는 방식
165년, 왕을 죽인 자들이 왕좌에 앉히려 한 사람은 도망자였다
역사·철학 · 한국사 시리즈 · 2026.07.29
살아남았기 때문에, 왕이 되었다
165년 10월, 고구려의 사냥터에서 왕이 살해되었다.
차대왕이었다. 그는 공포 정치로 종실과 신하들을 숙청해 왔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자신이 가장 신뢰했던 신하 명림답부(明臨答夫)의 손에 목숨을 잃은 것으로 전해진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차대왕의 공포 정치가 왜 오래가지 못했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왕을 죽인 자들이 그다음으로 한 일은 뜻밖이었다. 새로운 권력을 스스로 차지하지 않고, 산속으로 도망쳐 숨어 있던 왕족을 찾아 나선 것이다.
그 도망자의 이름은 백고(伯固), 훗날의 신대왕이다. 차대왕의 숙청을 피해 일흔일곱의 나이까지 산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그는, 형을 죽인 사람들이 자신을 왕으로 세우겠다고 찾아왔을 때 선뜻 나서지 않았다. 사서는 그가 세 번 사양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그 사양 끝에, 그는 왕이 되었다.
단순히 살아남았기 때문이라기보다, 살아남은 방식 자체가 권력을 정당화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차대왕 시대, 세계는 무엇을 겪고 있었나
165년은 고구려만의 위기가 아니었다. 같은 시기 지구 반대편에서도 권력은 흔들리고 있었다.
로마에서는 루키우스 베루스가 파르티아 원정에서 돌아오는 군대와 함께 정체불명의 역병을 데려왔다. 훗날 안토니누스 역병으로 불리게 될 이 재앙은 165년 말부터 제국 전역으로 번지기 시작했고, 이는 곧 “팍스 로마나”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안정의 신화에 처음으로 균열이 생긴 시기였다. 이 역병으로 로마 제국 전역에서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되며, 군대와 재정 기반을 뒤흔들어 이후 로마가 겪게 될 장기적 쇠퇴의 한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같은 무렵 후한에서는 환제 치하의 조정이 환관 세력과 사대부 세력 간의 격렬한 충돌로 치닫고 있었다. 166년, 이른바 ‘당고의 화’로 불리는 첫 번째 정치 숙청이 시작되어, 권력을 견제하려던 학자 관료들이 대거 투옥되고 축출당했다. 왕을 견제하려는 시도가 오히려 권력을 쥔 자들에 의해 뿌리 뽑힌 사례였다. 이 사건 이후 환관 세력의 전횡은 오히려 굳어졌고, 정계의 자정 능력은 크게 흔들렸다는 평가가 뒤따른다. 훗날 184년의 황건적의 난과 후한의 쇠퇴로 이어지는 흐름의 한 갈래로 읽히기도 한다.
같은 시기, 세 개의 문명은 같은 질문을 맞닥뜨렸다. 폭주한 권력 뒤에 무엇을 세울 것인가. 로마는 재앙 앞에서 답을 찾지 못한 채 흔들렸고, 후한은 권력 견제 세력이 오히려 숙청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반면 고구려는 이들과 다소 다른 길을 모색했던 것으로 보인다.
국상이라는 발명 — 사람이 아니라 자리를 세우다
신대왕이 즉위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을 왕좌에 앉힌 명림답부를 처형하지도, 권력을 독점하지도 않는 것이었다. 그는 166년, 국상이라는 새로운 관직을 만들어 명림답부를 그 자리에 앉혔다. 왕의 아래에서 국정 전반을 총괄하는 이 자리는,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권력 배분의 실험이었다.
차대왕이 무너진 이유가 권력을 한 사람에게 집중시켰기 때문이라면, 신대왕이 택한 답은 권력을 한 사람에게서 다시 분리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논공행상이 아니었다. 정변의 주역에게 자리를 내어준 것이 아니라, 왕권 자체의 구조를 바꾼 것이었다. 왕은 상징과 정통성을 쥐고, 국상은 실무와 견제를 쥐는 이 구조는, 이후 고구려 정치 체제의 뼈대로 오래도록 이어진다.
그 구조의 실효성은 말로 끝나지 않았다. 172년, 명림답부가 이끄는 고구려군은 침입한 후한의 대군을 좌원에서 격퇴했다 — 훗날 좌원대첩(坐原大捷)으로 불리는 이 승리는, 권력을 분배한 시스템이 국가를 지켜내는 힘으로 작용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는다.
세 번 사양한 왕, 그리고 지금 우리가 묻는 것
신대왕이 세 번 사양했다는 기록을 단순한 겸양의 수사로만 읽기는 어렵다. 그것은 어쩌면, 권력이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해 거쳐야 했던 최소한의 절차였을 수도 있다. 도망자였던 사람이 왕이 되기 위해서는, 그 권력이 강탈이 아니라 요청이었음을 증명해야 했다.
지금 한국의 정치와 경제 환경에서도 비슷한 질문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부동산·노동시장 같은 구조적 과제들은 새로운 인물과 함께 다시 도마 위에 오르지만, 정작 문제의 뿌리가 된 틀 자체는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는다. 권력이 정당성을 얻고 위기를 극복하는 방식은 단지 ‘사람의 교체’여야 하는가, 아니면 ‘시스템의 재설계’여야 하는가. 국상이라는 관직이 200년 가까이 지속될 수 있었던 핵심이 ‘누가 앉았는가’보다 ‘어떤 구조였는가’에 있었을 수 있듯이,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 역시 일회성 정권 교체가 아닌 구조적 틀의 전환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아직 묻지 않은 질문
환난의 날, 산속 은밀한 곳에 몸을 숨겨 생존을 도모했던 한 노인의 삶은, 역설적으로 폭주하던 고구려를 건져 올리는 새로운 제도의 씨앗이 되었다. 명림답부는 훗날 신대왕의 신임 속에서 오랫동안 국상 자리를 지키며 고구려의 안정을 이끌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 안정이 한 신하의 충성심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왕이 만든 구조 자체의 힘이었는지는, 역사가 명확히 답을 주지 않는다.
* 참고할 말씀: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 — 잠언 29:2
1. 신대왕 백고의 즉위 연령은 『삼국사기』 기록상 77세이며, 태조·차대왕·신대왕 3대에 걸친 재위·수명 기록에 대해서는 후대 재구성 가능성을 지적하는 학계 견해가 있어 신중한 해석이 필요하다.
2. 안토니누스 역병의 시작 시점은 학계에서 165~166년으로 다소 유동적으로 다뤄진다.
3. 당고의 화는 166년을 1차 발생 시점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4. 좌원대첩은 172년 명림답부가 고구려군을 이끌고 후한군을 격퇴한 전투로 기록되어 있다.
© Watchman, 바라보는 자의 기록 (bara.watchmaninsight.com). 무단 전재 및 2차 창작 시 사전 동의 필요.
📢 새 글 알림 받기
💬 카카오톡 채널 추가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