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시는 정복되지 않고 양도되었다
천 년을 버틴 체제는 왜 대규모 전투 없이 끝났는가
2026. 10. 04 · 바다
표결 다음 날의 도시
앞선 글에서 우리는 1797년 5월 12일 대평의회의 마지막 표결을 살펴보았다.¹ 이번 글은 그 표결이 끝난 뒤의 시간을 따라간다. 국가가 문을 닫는 데는 하루가 걸렸지만, 사라지는 데는 다섯 달이 걸렸다.
표결이 끝난 날 도시는 조용하지 않았다. 군중이 “산마르코 만세”를 외치며 프랑스에 호의적이던 사람들의 집을 습격했다는 기록이 있다. 달마티아 출신 병사들은 해산되어 배를 타고 떠났다고 전해진다. 지키려는 사람들은 있었으나, 그들에게 명령을 내릴 자리는 비어 있었다.
마닌은 이틀 뒤인 5월 14일 도제궁을 떠났다.² 표결 당시 그는 일흔한 살이었다. 1789년 3월 도제로 뽑혔을 때 충격으로 쓰러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부유하고 온화하며 누구에게도 위협이 되지 않는 인물이어서 선택되었다는 평가가 따라붙는다. 도제의 자리는 그런 사람이 앉아야 안전하도록 짜여 있었다.
그가 한 일을 문서로 정리하면 한 줄도 남지 않는다. 해산을 막지도, 이끌지도 않았다. 국가를 대표했으나 국가를 대신해 결정하지는 못했다. 결정하는 사람이 없는 나라는 어떻게 사라지는가. 이 글은 그 질문에서 시작한다.
참주를 두려워한 도시
이 공백은 우연이 아니었다. 베네치아는 오랜 세월 한 사람에게 힘이 쏠리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1310년 바자몬테 티에폴로가 이끈 반란이 진압된 직후 십인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임시 기구였다고 알려져 있다. 1355년 4월에는 도제 마린 팔리에로가 권력을 쥐려 했다는 혐의로 처형되었다. 대평의회장의 도제 초상 줄에서 그의 자리는 초상 대신 검은 휘장으로 가려져 있다고 알려져 있다. 공화국은 도제조차 참주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배웠다.³
이 교훈은 이후 4세기가 넘도록 제도로 쌓였다. 취임 서약, 위원회, 감시, 추첨은 모두 한 사람이 국가를 쥐지 못하게 하는 장치였다. 다른 이탈리아 도시들이 참주의 손에 넘어갈 때 베네치아는 끝내 공화정을 지켰다.
베네치아는 한 사람의 폭군을 막으려고 결단하는 자를 없앴고, 그 결과 평시에는 완벽하고 비상시에는 스스로를 닫는 체제가 되었다. 참주를 막는 장치와 위기에 결정하는 자리는 같은 곳에서 나올 수 없었다.
다섯 달에 걸친 장례
도시 밖의 상황도 귀족들의 계산을 바꾸었다. 1797년 3월 본토의 베르가모와 브레시아가 베네치아의 지배를 벗어났다. 본토 영지의 수입에 기대던 귀족 가문이 적지 않았으므로, 질서의 붕괴는 곧 재산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었다. 프랑스군의 위협에 더해 소요가 재산과 집을 덮치리라는 공포가 표결장에 작용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⁴
5월 16일 프랑스와 임시 시정부가 맺은 협정은 정복의 조건이라기보다 청구서에 가까웠다. 금 300만 프랑과 같은 액수의 해군 물자, 군함 5척, 그림 20점, 필사본 500점이 목록에 올랐다고 알려져 있다.⁵ 점령군이 들어온 도시가 스스로 값을 치르고 목록을 넘기는 방식이었다.
6월 4일에는 산마르코 광장에서 ‘자유의 축제’가 열렸다. 광장에 자유의 나무가 세워졌고, 귀족 가문을 등재해 온 황금의 책이 불태워졌다고 한다. 가문의 자격을 증명하던 장부가 광장에서 재가 된 순간, 그 자격은 종이 한 장의 값으로 내려앉았다.
10월 17일, 베네치아의 운명은 캄포포르미오라는 작은 마을에서 다시 한 번 흥정에 올랐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오랜 전쟁을 끝내는 조약을 맺는 자리였고, 두 나라는 서로 내줄 것과 받을 것을 맞추고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오늘의 벨기에에 해당하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포기하고, 프랑스가 북이탈리아에 세운 새 공화국을 인정했다. 그 대신 프랑스가 내민 보상이 베네치아의 본토 영토와 이스트라, 달마티아, 그리고 도시 자체였다. 코르푸를 비롯한 이오니아 제도는 프랑스가 가져갔다. 베네치아가 주인 없는 물건처럼 오간 셈이라고 읽을 수 있다.
이 협상장에는 베네치아의 대표가 없었다. 값을 치르는 쪽이면서도 값을 정하는 자리에는 앉지 못했다. 1798년 1월 프랑스군이 물러나고 오스트리아군이 도시에 들어왔다. 프랑스가 점령한 도시를 오스트리아가 인수한 것이다. 도시의 주인은 몇 달 사이 두 번 바뀌었지만, 주인을 정하는 자리에 베네치아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 사이 바다의 흔적이 차례로 지워졌다. 1797년 12월 산마르코 대성당의 청동 말이 파리로 가기 위해 내려졌고, 이듬해에는 도제의 의전선 부첸토로가 금박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해체되어 불태워졌다. 조선소와 남은 선박도 프랑스의 손으로 넘어갔다고 전해진다. 바다로 세운 나라는 바다부터 빼앗겼다.
이 순서를 따라가면 베네치아는 정복된 것이 아니라 처분되었다는 사실이 보인다. 나폴레옹에게 이 도시는 싸울 상대가 아니라 오스트리아와의 거래에 쓸 값이었다. 4월 18일 레오벤 잠정 강화의 비밀 조항에서 이미 그 결말이 정해져 있었다고 읽을 수 있다.
싸우지 않고 이긴 자, 싸우지 않고 진 자
손자는 병법의 최선을 이렇게 말한다.
百戰百勝,非善之善者也;不戰而屈人之兵,善之善者也。(백전백승,비선지선자야;부전이굴인지병,선지선자야。)
“백 번 싸워 백 번 이기는 것은 최선이 아니다. 싸우지 않고 남의 군대를 굴복시키는 것이 최선 중의 최선이다.” (『손자병법』 모공)
1797년 나폴레옹은 이 문장을 베네치아에서 실현했다. 그러나 병법의 최선은 이긴 쪽의 문장일 뿐이다. 진 쪽에는 다른 문장이 필요하다.
장 자크 루소는 1743년부터 이듬해까지 베네치아에서 프랑스 대사의 비서로 일했다. 훗날 그는 『사회계약론』에서 이렇게 썼다.
“영속하는 국가를 세우고자 한다면, 그것을 영원하게 만들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 (『사회계약론』 3권 11장)
소멸은 막을 수 없고, 주어진 수명을 어떻게 쓸지가 정치의 과제라는 뜻으로 읽힌다. 바다에 영원한 지배를 선언하던 도시에는 낯선 충고였을 것이다.
헤겔은 『법철학』 서문에서 이해가 오는 시점을 짚는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깃든 뒤에야 날기 시작한다.” (『법철학』 서문)
한 삶의 형태는 늙어 간 뒤에야 이해된다. 1797년의 베네치아를 이해하려면 바로 그 황혼의 거리가 필요하다.⁶
철학은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결정하지 않은 결정
국가는 한 번에 죽지 않는다. 결정으로, 상징으로, 문서로 세 번에 걸쳐 죽는다. 5월 12일의 표결이 결정이었고, 황금의 책과 청동 말과 부첸토로가 상징이었고, 캄포포르미오 조약이 문서였다. 이 가운데 어느 단계에서도 누가 베네치아의 최후를 선택했는지는 선명하게 남지 않는다.
512명의 찬성을 비겁함으로만 읽는 것은 쉽지만 정확하지 않다. 저항하면 도시와 재산과 가족이 위험해지고, 협상하면 적어도 목숨과 도시는 남는다는 계산이 개인에게는 합리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에게 합리적인 항복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항복이다. 각자가 가장 안전한 선택을 했는데, 그 총합이 국가의 소멸이 되었다.
대표는 있었으나 책임자는 없었다. 주권을 상징하는 자리와 결정하는 자리가 분리된 체제에서는 위기에 상징은 서 있고 결정은 비어 있다. 위협이 되지 않는 사람을 가장 높은 자리에 앉히는 일은 이 체제에서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그 안전장치는 위기에 그 자리를 빈 의자로 만들었다.
이 구조는 옛이야기로만 끝나지 않는다. 오늘의 조직에서도 위원회가 결정을 대신하고, 아무도 비난받지 않으려고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는 리더십이 가장 안전한 선택이 된다. 책임을 나눈다는 말은 어느 순간부터 책임을 흩는다는 말이 된다.
오늘 한국의 풍경에서도 같은 모양의 빈 의자가 눈에 띈다. 이재명 정부가 출범한 지 열여섯 달이 지난 지금, 10월 2일 문을 연 공소청과 중대범죄수사청은 수장 없이 출발했다. 법무부 장관 자리는 비어 있고, 검찰총장은 직무대행 체제로 이어져 왔으며, 초대 중수청장 후보자의 인사청문 요청안은 10월에 들어서야 국회에 접수되었다. 경찰청장 자리는 21개월째 대행 체제이고, 대행만 세 번째라는 지적이 나온다. 공공기관장도 6월 기준 342곳 가운데 36곳이 비어 있었다.⁷
이 공백의 원인을 여기서 가리지는 않는다. 사퇴와 검증, 지명과 청문, 정치권의 계산이 저마다 얽혀 있어 어느 하나로 환원하기 어렵다. 다만 규칙을 바꾸는 속도와 그 규칙을 운영할 사람을 채우는 속도가 어긋나면, 제도는 간판만 걸린 채 조직도 위에서만 움직인다. 정부가 바뀌어도, 기관이 새로 생겨도 이 구조는 같은 방식으로 되풀이된다.
회의록에는 모두의 동의가 남고, 한 사람의 책임은 남지 않는다. 그런 기록이 쌓인 조직일수록 마지막 날에도 같은 모양의 회의록을 남긴다.
모자와 반지와 배
해마다 승천절이면 도제는 부첸토로를 타고 아드리아해로 나가 바다에 반지를 던졌다. 그때 외치던 라틴어 선언은 “참되고 영원한 지배의 표지로 우리는 그대, 바다와 혼인한다”는 뜻이었다.⁸ 공화국이 사라지면서 이 의식도 끊겼다.
바다에 반지를 던져 바다와 혼인했던 도시는, 그 서약을 싣고 나가던 배를 한 줌의 금박 때문에 불태웠다. 그리고 권위의 상징이던 모자는 하인의 손으로 넘어갔다. 마닌은 그 뒤 오스트리아의 지배 아래서 5년을 더 살다 1802년 10월에 눈을 감았다. 반지와 배와 모자는 모두 같은 질문의 다른 모양이었다. 영원을 선언한 자는 그 선언을 끝낼 결정도 쥐고 있는가.
바다는 그 뒤에도 같은 자리에서 일렁였다. 바다는 베네치아에 한 번도 약속한 적이 없었다. 약속은 언제나 도시 혼자 했고, 그 문장에 ‘영원’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었다.
우리가 지금 지키려는 것의 수명은 얼마인가. 그리고 그 수명이 다하는 날, 그것을 끝낼 결정은 누구의 손에 있는가.
멀리서 보아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바라보는 자의 기록은 그 거리를 잃지 않으려는 기록이다.
* 참고할 말씀: ‘칼이 임함을 파수꾼이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여 백성에게 경고하지 아니하므로 … 그 죄는 내가 파수꾼의 손에서 찾으리라’ — 에스겔 33:6
¹ 직전 편: 「담합의 도시, 스스로 낡다」(베네치아 대평의회 1797) — bara.watchmaninsight.com/venice-great-council-1797/
² 마닌의 생애(1725~1802)와 1797년 5월 14일 도제궁 퇴거 — 베네치아 공화국 도제 열전; 1789년 도제 선출 일화(전승)
³ 1310년 티에폴로 반란과 십인위원회 설치, 1355년 팔리에로 처형 — Frederic C. Lane, Venice: A Maritime Republic (Johns Hopkins UP, 1973); John Julius Norwich, A History of Venice
⁴ 1797년 3월 본토 이탈, 6월 황금의 책 소각, 10월 캄포포르미오 조약, 12월 청동 말 반출, 부첸토로 해체 — Thomas F. Madden, Venice: A New History (Viking, 2012); Norwich
⁵ 1797년 5월 협정 조건 — The Napoleon Series, “Venice: Napoleon’s Italian Thorn” (napoleon-series.org)
⁶ 『손자병법』 모공 / 루소, 『사회계약론』 3권 11장(필자 번역) / 헤겔, 『법철학』 서문
⁷ 공소청·중수청의 수장 공백과 출범(2026년 10월 2일), 법무부 장관·검찰총장 공석 — 파이낸셜뉴스, 2026년 9월 22일자 보도; 미국의소리(VOA) 한국어, 「78년 만에 문 닫는 검찰…공소청·중수청 출범 속 ‘수장 공백·준비 미흡’ 진통」. 중수청장 후보자 인사청문 요청안 접수 — 머니투데이, 2026년 10월 2일자 보도. 경찰청장 21개월째 공석과 세 번째 대행 체제 — 머니투데이, 2026년 9월 3일자 보도. 공공기관장 공석 36곳(342개 기관 중, 2026년 6월 9일 기준) — 경향신문, 2026년 6월 9일자 보도
⁸ 승천절 ‘바다와의 혼인’ 의식과 라틴어 선언문 — Lane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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