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혼으로 시작해 포도주로 끝난 정복
정복자가 놓은 덫은 결국 누구를 향하는가
2026.10.04 · 세계사 · 영화로 떠나는 세계사 · Watchman
청혼서가 도착한 날, 전쟁은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기원전 530년 무렵,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의 왕이 중앙아시아 초원의 한 여왕에게 사신을 보낸다. 용건은 청혼이었다. 남편을 잃고 마사게타이 부족을 이끌던 토미리스는 그 청혼이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땅을 향한 것임을 알아채고 거절했다.¹
키루스 2세는 물러서지 않았다. 청혼이 막히자 그는 강 위에 다리를 놓기 시작했다. 외교의 문장이 공학의 문장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협상의 형식을 빌린 접근은 거절당하는 순간 압박의 형식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이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갈지는 이 장면에서 이미 드러나 있다.
2019년 카자흐스탄에서 개봉한 영화 <토미리스>(아칸 사타예프 감독)는 이 이야기를 중심 뼈대로 삼아 초원의 여왕을 스크린에 세웠다.² 영화는 그녀를 정복자의 덫을 깨뜨린 승리자로 그린다. 그런데 질문이 하나 남는다. 우리가 아는 이 승리의 서사는 누가, 어디서, 누구의 목소리로 처음 적었는가.
이 글은 영화 리뷰가 아니다. 영화가 그린 사건에서 사료가 확인해 주는 대목과 한 사람의 기록에만 남은 대목, 영화가 새로 만들어 붙인 대목을 갈라 보고, 그 틈에서 반복되는 패턴을 읽으려 한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헬레네를 앞세운 트로이 전쟁의 명분을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청혼이라는 명분이 어떻게 함정으로 바뀌는지를 따라간다.
헤로도토스만 말하는 이야기, 그리고 사료가 침묵하는 곳
비교적 단단한 바닥부터 보자. 키루스 2세가 기원전 530년 무렵 중앙아시아 원정 중에 죽었다는 점은 바빌로니아 문서로 보아 그해 12월 이전으로 좁혀진다. 아들 캄비세스 2세가 왕위를 이었고 제국은 무너지지 않았다.³
문제는 그가 어떻게 죽었는가다. 우리가 아는 토미리스의 이야기는 사실상 헤로도토스 한 사람의 기록에 기대고 있다. 페르시아 쪽에는 키루스의 죽음을 기록한 문헌이 남아 있지 않다. 헤로도토스 자신도 여러 이야기를 들었고 그중 가장 믿을 만하다고 판단한 것을 적는다고 밝혔다.⁴
크테시아스는 키루스가 데르비케스인과의 싸움에서 입은 상처로 사흘 뒤 숨졌다고 전한다. 베로소스는 다헤인과의 전쟁 중에 죽었다고 하고, 크세노폰은 침상에서의 평온한 죽음을 전한다. 크테시아스의 기록에는 토미리스가 등장하지 않는다.⁵
그럼에도 헤로도토스의 서사는 정교하다. 다리를 놓는 키루스에게 여왕은 사자를 보낸다. 강의 이쪽이든 저쪽이든 한쪽이 사흘 거리를 물러나 상대가 들어올 공간을 내주고, 정정당당히 싸우자는 제안이었다.
키루스가 회의를 열었을 때 대부분의 페르시아 대신은 적이 건너오게 하자고 했다. 이에 맞서 나선 이가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다. 키루스에게 나라를 잃고 그의 조언자가 된 사람이다.⁶
크로이소스의 계책은 이랬다. 마사게타이는 페르시아의 사치를 모르는 이들이니, 진영에 잔치 음식과 포도주를 차려 두고 가장 약한 병력만 남긴 채 물러나라는 것이다.
마사게타이의 첫 부대가 남은 병사들을 베고 처음 맛보는 포도주에 취해 잠들었을 때, 돌아온 페르시아군이 그들을 쳤다. 이 부대를 이끈 이가 토미리스의 아들 스파르가피세스였다. 사로잡힌 그는 술이 깬 뒤 결박을 풀어 달라 청했고, 풀려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⁷
토미리스의 전언은 단호했다. 속임수로 거둔 승리를 자랑하지 말고 아들을 돌려주고 물러나라, 그러지 않으면 해에게 맹세코 피에 굶주린 너에게 피를 실컷 마시게 하겠다는 것이다. 키루스는 듣지 않았다. 헤로도토스는 이어진 전투를 이방인들이 치른 싸움 중 가장 격렬했다고 적는다. 키루스는 전사했고, 여왕은 시신을 찾아 그 머리를 피로 채운 가죽 부대에 담갔다.⁸
이제 영화가 만든 것을 가르자. 영화는 이 줄기를 따르되 앞에 긴 전사(前史)를 붙인다. 소녀 토미리스가 전사로 자라고, 남편과 아들이 키루스의 책략에 휘말려 죽고, 흩어진 사카 부족들이 그녀 아래로 모이는 이야기다.
헤로도토스는 토미리스의 어린 시절을 한 줄도 쓰지 않았다. 청혼 당시 그녀는 이미 과부였고, 부족 통합이라는 서사도 사료에 없다.⁹ 영화 속 마사게타이는 고대 튀르크어를 쓰고 페르시아인은 신(新)페르시아어를 쓴다. 현대 학계는 마사게타이를 이란계 유목민으로 본다.¹⁰
사료가 확인해 주는 것은 뼈대의 일부이고, 살은 대부분 영화가 붙였다.
여기서 이름을 하나 정리해 두어야 한다. 헤로도토스는 이 초원 사람들을 마사게타이라 불렀다. 같은 책에서 그는 페르시아인들이 스키타이인 전체를 사카라 부른다고도 적었다.¹¹
다리우스 1세의 베히스툰 비문에도 사카가 여러 갈래로 나뉘어 등장한다. 마사게타이를 이 넓은 사카 세계의 한 갈래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경계는 분명하지 않다. 영화가 “사카 부족들의 통합”을 말할 때 그 뒤에 놓인 사람들은 그리스의 언어로는 마사게타이이고 페르시아의 언어로는 사카다. 같은 사람들이 그리스와 페르시아 양쪽의 언어에서 서로 다른 이름을 얻었다.
덫은 되돌아오고, 기록하는 자의 자리는 기록을 닮는다
노자는 무력으로 일을 이루려는 자들에게 이런 문장을 남겼다.
“以道佐人主者,不以兵強天下,其事好還。”
(이도좌인주자,불이병강천하,기사호환。)
“도로써 군주를 보좌하는 자는 무력으로 천하를 강하게 하려 하지 않는다. 그 일은 되돌아오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¹²
다리, 잔치, 포도주는 모두 상대의 약점을 정확히 읽은 설계였다. 그 설계는 한 번 성공했고, 이내 피의 잔으로 되돌아왔다. 이 인과를 역사적 사실로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함정으로 얻은 승리는 상대에게서 타협의 이유를 지운다. 아들이 죽는 순간 “아들을 돌려 달라”는 마지막 협상안이 사라졌고, 그와 함께 전쟁의 출구도 닫혔다.
헤로도토스는 키루스에게 이 계책을 권한 크로이소스의 입을 빌려 인간사의 바퀴를 말하게 한다. 한 사람이 영원히 번영하도록 허락하지 않는 바퀴다.⁶ 바퀴를 말한 사람의 계책이 바퀴를 굴려 키루스를 떨어뜨린다.
이야기는 지나치게 완결되어 있다. 일부 연구자는 헤로도토스가 강자는 몰락한다는 그리스적 역사관에 맞추어 이 서사를 짰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오만한 왕이 경고를 무시하고 강을 건너 몰락하는 구도는 그리스 비극의 전형적 모티프이기도 하다. 서사의 완결성은 사료의 신뢰도와 별개의 문제다.
함정의 본질은 힘의 비대칭을 지식의 비대칭으로 바꾸는 데 있다. 포도주를 모르는 이들에게 포도주를 내미는 일이 그것이다.
투키디데스는 멜로스 대화에서 아테네 사절의 입을 빌려 힘의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을 적었다. 정의에 관한 논의는 힘이 대등한 자들 사이에서만 성립하고, 강자는 할 수 있는 것을 행한다는 논리다.¹³ 토미리스가 요구한 것은 사흘 거리를 사이에 둔 대등한 싸움이었고, 키루스가 택한 것은 상대의 무지라는 비대칭이었다. 아테네 사절의 논리가 키루스의 선택을 설명한다면, 노자의 문장은 그 선택의 대가를 설명한다. 이긴 방식 때문에 승리의 정당성은 그 자리에서 이미 의심받을 여지를 안고 있었다.
이제 영화를 만든 자리를 보자. 이 영화는 카자흐필름과 사타이필름이 제작했고 제작비는 약 650만 달러였다. 카자흐스탄 문화체육부의 지원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기획은 초대 대통령의 딸 알리야 나자르바예바에게서 나왔다고 전해진다.² 감독은 2011년 독립 20주년 기념 영화 <뮌 발라>도 연출했고, <토미리스>는 “역사를 되살리기 위해” 만들었다고 밝혔다. 한 연구는 이런 영화들이 국가 건설 서사의 일부로 작동하며, 이 작품이 토미리스의 내면보다 정치적 권력의 이미지를 앞세웠다고 분석한다.¹⁴
여기서 던질 질문은 비난이 아니라 구조다. 독립 30여 년을 맞은 국가가 자기 뿌리를 2,500년 전 초원에서 찾을 때, 무엇을 가져오고 무엇을 두고 오는가. 카자흐스탄만의 일은 아니다.
헤로도토스도 페르시아 지배 아래 있던 할리카르낫소스에서 태어나, 페르시아 전쟁 이후 그리스의 눈으로 페르시아를 썼다. 기록하는 자는 늘 어딘가에 서 있다.
영화가 지운 목소리들
영화가 지운 첫 번째 목소리는 이란계 초원이다. 마사게타이의 언어를 튀르크어로 바꾸는 순간 그들은 이란계 유목민에서 오늘 카자흐인의 선조로 옮겨 앉는다. 그리스와 페르시아가 각자 붙인 이름을 오늘의 국가가 자기 기원으로 받아들이는 일이기도 하다.
영화의 내레이션은 카스피해에서 알타이산맥 사이, 곧 오늘날 카자흐스탄의 영토를 그 땅으로 못 박지만, 스키타이계 유목 세계의 범위는 그보다 넓었다는 것이 학계의 지적이다.¹⁴ 카자흐 칸국이 성립한 것은 15세기다. 영화는 과거를 복원하는 동시에 현재의 필요를 투사한다. 이 영화가 보여 주는 것은 기원전 6세기이면서 동시에 2019년이다.
두 번째로 지워진 목소리는 페르시아 쪽이다. 영화에서 키루스는 침략자의 얼굴로 선다. 그러나 같은 키루스가 이란에서는 제국의 건설자로 기억되고, 성경에서는 바빌론에 끌려간 유대인의 귀환을 허락한 왕으로 기억된다.
그리스 쪽의 기억도 한결같지 않았다. 키루스가 죽고 200년 넘게 지난 기원전 324년 초, 페르시아 제국을 무너뜨린 알렉산더가 옛 수도 파사르가다의 키루스 무덤을 찾았다. 아리아노스가 아리스토불로스의 증언을 인용해 전하는 바로는 무덤은 이미 도굴되어 있었다.¹⁵
알렉산더는 흩어진 유해를 관에 되돌려 놓고 입구를 돌로 막아 왕의 인장을 찍게 했다. 무덤을 지키던 페르시아 사제 마기들을 붙잡아 심문했으나 도굴에 가담했다는 단서를 얻지 못했고, 결국 풀어 주었다.
무덤에는 페르시아 문자로 새긴 비문이 있었다. 페르시아 제국을 세우고 아시아의 왕이었던 키루스가 자신의 무덤을 아까워하지 말라고 청하는 내용이다. 아리아노스는 알렉산더가 이 훼손에 마음 아파했다고 적는다.¹⁵
이 무덤은 헤로도토스가 그린 마지막 장면과 쉽게 맞물리지 않는다. 키루스의 머리가 피의 가죽 부대에 담겼다면, 파사르가다 무덤 안의 유해는 무엇이었는가. 일부 학자는 페르시아인들이 시신을 되찾아 왔을 가능성을 제기한다.¹⁶
사건은 기억하는 자리에 따라 이름이 바뀐다. 침략자, 건국자, 그리고 정복자가 예를 갖춘 선왕은 모두 같은 사람의 다른 이름이다.
세 번째는 승리의 크기다. 키루스가 죽어도 제국은 이어졌다. 십여 년 뒤 다리우스 1세 시기에도 페르시아는 초원의 사카를 겨냥한 원정을 이어 갔다고 전해진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은 토미리스의 승리 직후에 끝난다. 그 뒤 그녀의 삶은 사료에 없다. 승리의 장면은 남았고 승리 이후의 시간은 지워졌다.
이 연쇄에는 공통점이 있다. 청혼, 다리, 포도주, 아들, 피의 잔. 상대의 약점을 읽어 낸 자가 그것을 쓰는 순간 자기 퇴로도 함께 닫는다.
청혼이 덫의 일부였다면 이후 어떤 제안도 미끼로 읽힌다. 상대는 더 이상 내민 손을 손으로 보지 못한다. 덫은 상대를 향해 놓이지만, 덫이 신뢰를 소진하는 순간 그 끝은 설계한 쪽을 향한다.
이 영화를 다시 본다면, 무엇이 다르게 보일까
영화가 향해 가는 절정은 키루스의 패배, 곧 여왕의 복수다. 관객은 그 장면에서 통쾌함을 느끼기 쉽다. 그러나 다시 본다면 눈이 가야 할 곳은 그 장면이 아니라 훨씬 앞의 한 장면, 청혼이 오가던 순간일지 모른다. 전쟁은 칼이 부딪친 날이 아니라 제안이 제안으로 읽히지 않게 된 날 시작되기 때문이다.
영화가 역사를 다루는 방식은 사료의 두께에 따라 달라진다. 토미리스의 이야기는 사료가 헤로도토스 한 사람뿐이었다. 비어 있는 곳을 영화가 채웠고, 채우는 손에는 오늘의 국가가 가진 필요가 묻어 있었다.
미국에서는 올리버 스톤의 영화 <JFK>(1991)가 다른 길을 보여 주었다. 케네디 암살을 두고 1964년 9월 워런 위원회는 오즈월드의 단독 범행으로 결론지었고, 1979년 하원 암살특별위원회는 음모의 가능성이 높다고 보면서도 다른 가담자를 특정하지 못했다.¹⁷ 영화는 정부 기관이 연루되었다는 대안 서사를 대중에게 퍼뜨렸다.
이 영화는 1992년 암살 기록 공개법 제정에 일부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고, 이후 암살기록검토위원회는 1998년 9월까지 수백만 쪽에 이르는 기록의 공개 여부를 심사했다.¹⁸ 다만 위원회는 범인이 누구인지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영화는 증거가 되지 못했지만, 증거를 열어 보라는 압력은 되었다.
2026년 9월 한국 극장에 걸린 <암살자(들)>는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의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을 소재로 삼아 개봉 나흘 만에 관객 100만 명을 넘겼다.¹⁹ 이 사건이 수사 기록, 일본 쪽 기록, 현장에 있던 이들의 증언이 겹치며 정리되었다고 보는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닫힌 사건을 음모의 형식으로 다시 연 일이다.
제작진은 기록에 상상력을 더한 극영화이며 특정 인물을 배후로 규정하지 않았다고 밝혔고,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은 사과와 상영 중단을 요구했다.
제목의 괄호가 눈에 띈다. 암살자는 한 명인가, 여럿인가. 케네디 사건에서 갈렸던 물음이 다른 나라, 다른 시대의 사건에서 다시 불려 나온다. 키루스를 쓰러뜨린 손이 한 사람인지 한 부족인지를 사료가 정하지 못하는 것과도 닮은 물음이다.
영화는 사료가 빈 곳에서는 빈칸을 채우고, 기록이 두꺼운 곳에서는 의혹을 극화한다. 어느 쪽이든 영화는 증거가 아니라 형식이다.
사건이 닫혔다는 것은 기록이 정리되었다는 뜻만이 아니다. 그 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에게 정리는 상처를 딛고 서는 바닥이다. 증거 없이 그 바닥을 다시 파는 일이 있다면, 비용을 치르는 쪽은 의혹을 만든 이가 아니라 유족이다. 창작이라는 말도 관객이 그것을 역사로 받아들이는 순간 주장과의 경계를 잃는다.
사건이 닫혔는지는 영화가 아니라 기록이 가린다. 이 사건에서 확인되는 사실부터 적어 둔다. 1974년 8월 15일 서울 국립극장의 광복절 기념식에서 재일교포 문세광이 대통령 내외를 향해 총을 쏘았고, 육영수 여사는 총탄에 맞아 숨졌다. 문세광은 현장에서 붙잡혔다.²⁰
재판은 10월 19일 1심에서 사형을 선고했고, 12월 17일 대법원이 상고를 기각해 형이 확정되었다. 사흘 뒤인 12월 20일 오전 서울구치소에서 형이 집행되었다.
그는 집행 직전 일본어로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에게 사죄하며 조총련에 속은 자신이 바보였다고 말했다. 이 진술은 당시 수사본부장이 보관하던 녹음을 통해 2005년 1월에 처음 공개되었고, 같은 달 사건 관련 외교문서 15권도 공개되었다.²¹
의혹에는 증거가 필요하고, 증거 없는 의혹은 가장 먼저 유족에게 닿는다.
멀리서 보아야 보이는 것들 속에는 덫을 놓는 손과 덫에 걸리는 발 사이의 거리가 있다. 바라보는 자의 기록은 그 거리를 재는 일이다.
* 참고할 말씀: ‘함정을 파는 자는 그것에 빠질 것이요 돌을 굴리는 자는 도리어 그것에 치이리라’ — 잠언 26:27
각주
1. 헤로도토스, 『역사』 1.205–206.
2. 영화 <토미리스>(2019, 아칸 사타예프). 제작사·제작비·기획 경위는 Wikipedia “Tomiris (film)”와 Kazinform(2017.4.10) 보도 참조.
3. World History Encyclopedia, “Cyrus the Great” (바빌로니아 서신).
4. 헤로도토스, 『역사』 1.214.
5. 크테시아스 『페르시카』(포티오스 발췌본), 베로소스, 크세노폰 『키로파이디아』 8.7.
6. 헤로도토스, 『역사』 1.207.
7. 헤로도토스, 『역사』 1.207–213.
8. 헤로도토스, 『역사』 1.212–214.
9. 영화 줄거리: IMDb·Wikipedia 요약 기준.
10. 마사게타이의 이란계 유목민 성격은 학계 통설. 영화 속 언어 설정은 Wikipedia “Tomiris (film)” 참조.
11. 헤로도토스, 『역사』 7.64; 다리우스 1세 베히스툰 비문(사카 갈래 표기).
12. 『노자』 30장.
13.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5.89.
14. “Women’s agency in Kazakh and Sakha cultures: Tomiris (2019) and Beyberikeen (2019)”, Taylor & Francis (2026).
15. 아리아노스, 『알렉산드로스 원정기』 6.29(아리스토불로스 인용); 스트라본, 『지리지』 15.3.7. 파사르가다의 무덤을 키루스의 것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견해다.
16. 무함마드 단다마예프(M. Dandamayev)의 견해로 소개된다. Wikipedia “Cyrus the Great” 참조.
17. 워런 위원회 보고서(1964년 9월); 미 하원 암살특별위원회 최종보고서(1979).
18. 「대통령 존 F. 케네디 암살 기록 수집법」(1992); 암살기록검토위원회(ARRB) 최종 보고서(1998).
19. 한국일보, 파이낸셜뉴스 2026.9.28 보도 (영화 <암살자(들)> 개봉 및 논란).
20. 머니투데이, 「”바보였다” 문세광, 육영수 여사 저격 127일 만 사형」(2023.12.20).
21. 한국일보, 「문세광 형장진술 첫 공개」(2005.1.22); 경향신문, 「문세광 사건 외교문서 공개」(2005.1.20).
© Watchman, 바라보는 자의 기록 (bara.watchmaninsight.com). 무단 전재 및 2차 창작 시 사전 동의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