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합의 도시, 스스로 낡다

베네치아 공화국 종말의 날 도제 궁전 대평의회 홀에서 홀로 서 있는 도제
1797년 5월 12일, 마지막 베네치아 도제 루도비코 마닌이 대평의회 홀에서 공화국 해산을 선언한 뒤 홀로 서 있는 모습. 천 년 역사의 베네치아 공화국은 그렇게 종말을 고했다.

담합의 도시, 스스로 낡다

가장 성공한 시스템은 왜 가장 늦게 바뀌는가

2026. 10. 01 · 바다


아무도 쳐들어오지 않은 날

1797년 5월 12일, 베네치아 대평의회가 마지막 표결을 열었다. 안건은 공화국의 해산이었다. 출석한 537명 가운데 512명이 찬성했고, 반대는 20명, 기권은 5명이었다.¹ 나폴레옹의 최후통첩이 도착해 있었지만, 프랑스군이 석호를 건너 들어온 날은 아니었다. 약 천 년을 이어온 국가는 적의 함선 앞이 아니라 자신의 투표함 앞에서 문을 닫았다.

그 통첩의 주인은 스물일곱 살의 프랑스 장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다. 1796년 3월 이탈리아 방면군 사령관에 오른 그는 1797년 봄까지 북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잇달아 격파하며 이름을 떨쳤다.¹ 이 전쟁 내내 베네치아는 어느 편에도 서지 않는 중립을 지켰다. 그러나 중립은 방패가 되어 주지 못했다. 프랑스군과 오스트리아군은 베네치아의 본토 영토를 전장으로 삼아 오갔고, 공화국의 군대는 어느 쪽도 막아 낼 힘이 없었다.

전환점은 1797년 4월이었다. 4월 18일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와 잠정 강화를 맺어 북쪽의 적을 정리했고, 이 협정에는 오스트리아가 잃은 땅의 대가로 베네치아 영토를 넘겨받는 조항이 비밀리에 담겨 있었다. 베네치아의 운명은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이미 흥정되고 있었던 셈이다. 같은 달 베로나에서 프랑스군을 겨냥한 봉기가 일어났고, 4월 20일에는 리도 앞바다에서 프랑스 배가 베네치아 요새의 포격을 받아 선장이 숨졌다. 프랑스는 이 사건들을 구실로 삼아 5월 초 귀족 정부의 해체를 사실상 요구하며 전쟁을 선포했다. 대평의회가 마지막 표결에 나선 것은 이 압박 속에서였고, 프랑스군이 도시에 들어온 것은 그로부터 나흘 뒤인 5월 16일이었다.¹

마지막 도제 루도비코 마닌은 5월 12일 그 자리에서 “우리는 이 집 안에서조차 안전하지 못하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표결이 끝난 뒤에는 도제모를 벗어 시종에게 건네며 이제 필요 없겠다고 말했다는 일화도 남아 있다. 몇 세기에 걸쳐 다듬어진 정교한 규칙들 가운데, 그날 도시를 지켜 준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 장면에서 가장 섬뜩한 것은 패배가 아니라 절차다. 500년 넘게 쿠데타 한 번 없이 굴러간 체제가, 살아남을 방법을 논의해야 할 바로 그 순간에 자신을 끝내는 방법에는 정확히 합의했다. 물론 나폴레옹이라는 외부의 폭풍이 없었다면 그날의 표결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폭풍을 만난 배가 모두 같은 방식으로 가라앉지는 않는다. 이 체제는 고장 난 것이 아니었다. 설계된 대로 작동했다. 문제는 설계 목표가 처음부터 하나였다는 점이다. 지키는 것이었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1516년 3월, 도시가 유대인 금융가를 필요로 하면서도 그들을 성벽 안 구역에 가두던 순간을 살펴보았다.² 필요하되 섞이지 않게 한다. 이 태도가 한 구역의 규칙이 아니라 국가 전체의 문법이 되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이번 글은 그 이야기다. 성공했다는 사실이 다음 판단의 눈을 가리는 경험을, 오늘의 독자도 자기 일터에서 한 번쯤 겪어 보았을 것이다.

개혁이 문이 되고, 문이 벽이 되기까지

베네치아 정치의 뼈대는 대평의회였다. 1297년의 세라타, 곧 ‘닫음’ 조치는 흔히 귀족의 문을 걸어 잠근 사건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당대에는 사정이 달랐다. 세라타는 누가 귀족인가를 명문화해 내부 갈등을 줄인 개혁이었고, 정원 제한이 풀리면서 평의회의 규모는 오히려 커졌다는 것이 역사가들의 유력한 평가로 꼽힌다.³ 그 시점의 세라타는 문을 잠그는 조치보다 문틀을 세우는 조치에 가까웠다.

방향은 자격이 ‘가문’에 묶이는 순간 정해졌다. 이후 자격은 사실상 세습 원칙으로 굳어졌고, 귀족 가문을 장부에 등재해 관리하는 체계가 갖춰졌다.⁴ 포용을 위해 세운 문틀이 시간이 지나며 배제를 위한 벽이 된 것이다. 성공한 개혁이 훗날의 족쇄가 되는 첫 장면이다.

이 잠금은 오랫동안 결함이 아니라 성공의 비결이었다. 1268년에 정비된 도제 선출 절차는 제비뽑기와 투표를 번갈아 열 단계에 걸쳐 섞어, 어느 한 가문이나 인물이 국가를 통째로 차지하는 길을 막았다. 십인위원회와 국가 심문관이 서로를 견제했고, 도제조차 취임 서약으로 사적 권한이 묶여 있었다. 그 결과 다른 이탈리아 도시들이 참주와 쿠데타로 흔들리던 시대에도 베네치아는 조용했다. 이 정치적 정숙이 신용을 낳았고, 신용은 자본을 불러 모았다.

그러나 안정을 최우선 가치로 설계한 장치는 안정을 흔드는 모든 것을 위험으로 분류한다. 새 가문의 유입, 새로운 상업 방식, 새로운 인물의 부상이 모두 그렇다. 마키아벨리는 『로마사 논고』에서 베네치아를 스파르타와 함께 ‘유지를 위해 설계된 공화국’으로 보고, 확장을 목표로 삼은 로마와 대비했다.⁵ 지키는 데 최적화된 국가는 지킬 대상이 바뀌었을 때 가장 취약하다.

팔린 귀족, 굶는 귀족

문이 잠기면 안쪽에서 두 가지 일이 동시에 벌어진다. 자리가 희소해지고, 희소해진 자리에는 값이 붙는다.

1645년 오스만이 크레타에 상륙하며 시작된 전쟁은 공화국의 재정을 삼켰다. 1646년부터 1718년 사이 공화국은 전쟁 비용을 대는 조건으로 100여 개 가문을 귀족 명부에 새로 올렸다. 한 가문이 10만 두카트 안팎을 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⁶ 닫혀 있다던 명부가 돈만 내면 열린 셈이다. 폐쇄와 매관은 한 몸에서 나왔다. 새로 들어온 귀족들은 체제를 바꾸지 않았다. 값을 치르고 얻은 자리를 지키는 편에 섰다.

반대편 끝에는 바르나보티가 있었다. 산 바르나바 교구 일대에 모여 살아 붙은 이름으로, 신분은 귀족이나 재산이 없어 공적 보조에 기대던 하층 귀족이다. 이들도 대평의회에서 똑같이 한 표를 가졌다. 가난한 표는 부유한 표의 후원 대상이 되었다. 표가 후원으로 움직이는 구조에서 개혁안은 표 계산에서 이기기 어렵다. 개혁을 원하는 쪽에는 힘이 없었고, 힘을 가진 쪽에는 개혁할 이유가 없었다.

계산서는 바다에서 나왔다. 1669년 9월 칸디아(오늘의 헤라클리온)가 21년에 걸친 포위 끝에 오스만에 넘어갔다. 1718년 7월 파사로비츠 조약은 그 뒤 되찾았던 모레아를 다시 내주게 하며 베네치아의 동지중해 지배를 사실상 끝냈다.

바다가 옮겨 간 자리

시장은 기다려 주지 않았다. 17세기에 영국과 네덜란드 선박이 대서양에서 지중해로 밀고 들어왔고, 1719년 합스부르크가 트리에스테를 자유항으로 선포하면서 아드리아해의 독점은 안쪽에서 깨졌다. 17세기 초 수만 필을 헤아리던 베네치아 모직물 생산이 세기 말에 크게 쪼그라들었다는 연구도 있다.⁷

공화국의 대응은 새 위원회, 새 규제, 새 세금이었다. 판을 바꾸는 대신 판 위의 절차를 늘렸다. 그 사이 자본은 소리 없이 땅으로 옮겨 갔다. 15세기 초부터 본토 영토를 넓혀 온 베네치아 귀족들에게 농지는 안정된 수익원이었고, 바닷길의 위험이 커지는 시대에 땅을 택한 것은 가문 하나하나로 보면 합리적인 선택이었다.⁸ 이것을 도덕적 타락으로 읽는 것은 쉽지만 정확하지 않다. 문제는 합리적 선택의 총합이다. 파도를 넘어 이익을 좇던 상인 귀족이 임대료를 걷는 지주가 되면서, 도시의 엘리트는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에서 위험을 피하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한 가문에게 가장 안전한 선택이 국가에는 가장 위험한 선택이 되는 순간이다.

도시는 상업의 수도에서 무대로 변했다. 카니발이 반년 가까이 이어졌고, 1638년 문을 연 공공 도박장 리도토는 귀족들의 도박 파산이 문제가 되어 1774년에 폐쇄되었다. 같은 시기 지오르지오 피사니와 카를로 콘타리니 같은 인물들이 하층 귀족을 등에 업고 체제의 개혁을 시도했으나, 국가 심문관들의 감시와 탄압 앞에서 꺾였다.⁹ 개혁은 체제 안에서 제안되었고, 체제 안에서 봉쇄되었다.

굳은 것은 죽음의 편이다

한비자는 『오두』 편에서 한 송나라 농부의 이야기를 든다. 밭을 갈다가 토끼가 제 발로 그루터기에 부딪혀 죽는 것을 본 농부는 쟁기를 내려놓고 그루터기만 지켜보았다. 이 농부는 어리석었다기보다, 한 번 성공을 경험한 사람이었다. 한비자의 결론은 이렇다.

時移而治不易者亂。(시이이치불역자란。)

“시대가 옮겨 갔는데도 다스림을 바꾸지 않는 자는 어지러워진다.”

위기는 법이 나빠서 오지 않는다. 법이 시대와 어긋난 시차에서 온다.

노자는 굳음을 다르게 읽었다.

人之生也柔弱,其死也堅強。(인지생야유약,기사야견강。)

“사람이 살아 있을 때는 부드럽고 약하나, 죽으면 단단하고 뻣뻣해진다.”

굳음은 강함의 표지가 아니라 생명이 빠져나간 흔적이다. 18세기 베네치아의 통치 기구는 그 어느 때보다 정교하고 견고했다. 그 견고함이 어느 쪽의 징후였는지는 1797년이 답한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 25장에서 같은 방식으로 승승장구하던 군주가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이유를 성정의 변화에서 찾지 않았다. 시대가 달라졌는데 자기 방식을 바꾸지 못한 데서 찾았다.¹⁰

철학은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베네치아의 쇠퇴에는 오스만, 항로의 이동, 대서양 세력의 부상, 나폴레옹이 겹쳐 있다. 제도 경화가 유일한 원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같은 충격이 오는 동안 베네치아가 스스로 방식을 바꾸지 못했고, 그 공통 조건이 개정 권한을 이해당사자가 쥔 구조였다는 점은 짚어 둘 만하다.

성공이 이해당사자를 낳을 때

한비자는 시차를, 노자는 유연성의 상실을, 마키아벨리는 적응의 실패를 말한다. 언어는 다르지만 관찰은 같다. 살아 있는 제도는 시대와 함께 변하고, 변하지 않는 순간 유기체에서 유물로 넘어간다. 그렇다면 왜 제도는 변하지 않게 되는가. 이 질문에는 경제학자 맨커 올슨이 구조로 답했다. 그는 1982년 저서에서 오래 안정된 사회일수록 특수 이익 연합이 쌓여 활력이 떨어진다고 논증했다.¹¹ 베네치아는 그 이론보다 수백 년 앞선 실험이었다.

이 실험의 패턴은 네 단계로 압축된다.

첫째, 성공한 규칙은 그 규칙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을 만들고, 그들이 결국 규칙의 주인이 된다. 둘째, 규칙의 주인은 규칙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규칙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사실상의 거부권이다. 셋째, 개혁의 이익은 넓게 흩어져 있고 손실은 소수에게 뭉쳐 있어, 개혁안은 언제나 위험한 제안으로 분류된다. 넷째, 외부 충격이 오면 이런 시스템은 적응이 아니라 소멸로 답한다.

여기에는 부패한 악당이 없다. 시스템을 지킨 힘과 시스템을 죽인 힘은 같은 힘이었다. 닫힌 문 안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지켜 주는 데 능숙해진다. 그 능숙함이 바깥을 보는 눈을 대신하는 순간부터 쇠퇴는 시작된다. 베네치아는 외부의 충격 때문에만 쓰러진 것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성실하게, 스스로를 위해 일한 끝에 낡았다. 가장 성공한 시스템이 가장 늦게 바뀌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구조다. 바꿔야 할 사람들이 바꾸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지표는 끝까지 초록불이었다

베네치아의 마지막 200년 동안 성공의 지표는 거의 붉게 켜지지 않았다. 정치는 조용했고, 화폐는 안정적이었고, 제도는 정교했다. 지표는 끝까지 성실하게 작동했다. 다만 그 지표가 재고 있던 것은 어제의 승리 조건이었다. 평시의 효율을 극대화한 체제는 예비와 여유를 깎아 낸 체제이기도 하고, 그런 체제는 충격이 왔을 때 무너지기 쉽다. 성공의 지표가 유효기간을 넘겼을 때, 그것은 경고등이 아니라 안심 장치가 된다.

같은 시기 조선에도 낯익은 장면이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재정이 바닥나자 조정은 곡식이나 재물을 바치는 이에게 이름을 비워 둔 임명장, 곧 공명첩을 주어 명예직과 신분 상승의 길을 열어 주었다. 이 제도는 영조와 순조 대에도 거듭 발행되며 매관매직을 굳혔다는 평가를 받는다.¹² 베네치아가 전쟁 비용을 대는 가문에 귀족 명부를 열어 준 것과 같은 계산이다. 값을 치르고 들어온 사람들은 그 신분의 특권을 고치는 편이 아니라 지키는 편에 섰다. 대구 지역 호적에서 양반으로 기재된 호가 1690년 9.2퍼센트에서 1858년 70.3퍼센트로 늘었다는 연구는 그 결과를 보여 주는 숫자로 자주 인용된다.¹³ 다만 이 수치에는 양반을 자칭한 호가 섞여 있어 실제 신분의 이동을 그대로 읽기는 어렵다. 명부가 넓어질수록 희소성은 값을 잃었고, 특권이 남아 있는 한 그 부담은 명부 바깥으로 밀려났다.

개혁이 막힌 방식도 닮았다. 공납을 쌀로 통일하는 대동법은 1608년 경기도에서 시작해 1708년 황해도에 이르기까지 100년이 걸렸고, 토지를 많이 가진 양반 지주들의 반대가 그 걸림돌로 꼽힌다.¹⁴ 1750년 영조는 군포를 2필에서 1필로 줄이는 균역법을 시행했지만 양반은 여전히 군포를 내지 않았고, 양반에게도 호 단위로 군포를 거두는 호포제는 1871년에야 시행되었다.¹⁵

그러나 두 나라의 마지막은 같지 않았다. 조선은 1797년에 무너지지 않았다. 규장각을 세워 개혁을 이끌던 정조가 1800년에 세상을 떠난 뒤로는 소수 가문이 권력을 나누는 세도정치가 이어졌다는 평가가 많다. 조선이 닫힌 문을 연 것은 1876년 강화도 조약을 통해서였고, 베네치아가 스스로 표결해 문을 닫은 지 80년 가까이 지난 뒤였다. 충격이 온 시각과 방향은 달랐지만, 충격 이전의 풍경은 닮아 있었다. 안정이 길수록 개혁의 비용은 커지고, 그 비용을 치를 사람은 줄어든다.

마닌이 “집 안에서조차 안전하지 못하다”고 말했을 때, 문제는 이미 문밖에 있지 않았다. 안쪽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은 문이 잠겨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안에서는 그것이 그냥 벽이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옛일로만 끝나지 않는다. 10월 2일 대한민국에서는 검찰청이 폐지되고 형사사법 체계가 바뀐다. 1954년 형사소송법이 제정된 뒤 72년 만에 검사의 수사권이 사라지고, 수사는 중대범죄수사청과 경찰이, 기소와 공소 유지는 공소청이 맡는 구조가 된다.¹⁶ 규칙은 정교하게 다시 짜였다. 그런데 그 규칙을 움직일 자리는 아직 비어 있다.

9월 말 현재 새 체계의 핵심 보직인 법무부 장관, 공소청장, 중수청장이 모두 채워지지 않았다. 법무부 장관이 없어 공소청장 후보를 추천할 위원회를 꾸리지 못하고 있고, 9월 8일 지명된 중수청장 후보자는 추가 검증으로 임명 절차가 멈춰 있다.¹⁷ 고소·고발 접수까지 경찰서 중심으로 옮겨 가며 수사의 무게가 더 실리는 경찰의 수장 자리는 2024년 12월 직무가 정지된 뒤 21개월째 대행 체제다.¹⁸ 해양경찰청장은 약 9개월의 공석 끝에 9월 16일에야 새 청장이 내정되었고, 검찰총장 자리도 1년 넘게 직무대행으로 이어지다 검찰청과 함께 사라진다.¹⁹

이 공백의 원인을 여기서 가리지는 않는다. 탄핵과 사퇴, 검증과 지명, 정치권의 계산이 저마다 얽혀 있어 어느 하나로 환원하기 어렵다. 다만 구조로 보면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규칙을 바꾸는 속도와 그 규칙을 운영할 사람을 채우는 속도가 어긋날 때, 제도는 조직도 위에서만 작동한다. 간판은 10월 2일에 걸린다. 그러나 결정을 내려야 할 자리가 대행의 대행으로 이어지는 동안 어떤 판단이 미뤄지고 있는지는 어떤 지표에도 잡히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속한 조직과 제도 가운데 가장 잘 돌아간다고 믿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잘 돌아간다는 증거는 무엇을 측정한 것인가. 그 잘 돌아감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규칙을 바꿀 이유가 있는가. 그리고 그 규칙이 바뀌는 날, 규칙을 운영해야 할 자리는 채워져 있는가. 국가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가. 이 질문은 역사가 대신 답해 주지 않는다.

멀리서 보아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안에서는 벽이던 것이 사실은 문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도 그중 하나다. 바라보는 자의 기록은 그 거리를 잃지 않으려는 기록이다.


* 참고할 말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존되느니라’ — 마태복음 9:17

¹ 1797년 5월 12일 대평의회 해산 표결 수치, 마닌 발언 및 도제모 일화(전승) — Frederic C. Lane, Venice: A Maritime Republic (Johns Hopkins UP, 1973).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과 1797년 4~5월의 경과 — David G. Chandler, The Campaigns of Napoleon (Macmillan, 1966)

² 직전 편: 베네치아 유대인 게토(1516년 3월) — bara.watchmaninsight.com/venice-jewish-ghetto-1516/

³ 세라타(1297년 2월)의 초기 확장 효과 — Lane (1973); Donald E. Queller, The Venetian Patriciate: Reality versus Myth (Univ. of Illinois Press, 1986)

⁴ 세습 원칙의 확정과 귀족 등재 체계 — Queller (1986)

⁵ 마키아벨리, 『로마사 논고』 1권 5~6장

⁶ 1646~1718년 귀족 신규 편입과 그 대가 — Queller (1986)

⁷ 17세기 베네치아 모직 산업의 쇠퇴 — Lane (1973); Brian Pullan 편, Crisis and Change in the Venetian Economy (Methuen, 1968)

⁸ 본토 농지 투자로의 자본 이동 — Pullan 편 (1968)

⁹ 18세기 후반 하층 귀족을 등에 업은 개혁 시도와 국가 심문관의 진압 — Queller (1986) 등 베네치아 귀족제 연구

¹⁰ 마키아벨리, 『군주론』 25장

¹¹ Mancur Olson, The Rise and Decline of Nations (Yale UP, 1982)

¹² 임진왜란 이후의 납속책과 공명첩 발행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공명첩’ 항목

¹³ 대구부 호적대장의 양반호 비율(1690년 9.2%, 1858년 70.3%)과 신분 혼효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四方博 1938, 李俊九 등의 연구를 인용)

¹⁴ 대동법의 확대 과정(1608년 경기도~1708년 황해도)과 양반 지주층의 반대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대동법’ 항목

¹⁵ 균역법(1750~51년)과 양반층의 군포 면제 지속, 호포제(1871년)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균역법’·’호포제 실시’ 항목

¹⁶ 형사사법 체계 개편(검찰청 폐지, 공소청·중대범죄수사청 출범, 2026년 10월 2일 시행) — 파이낸셜뉴스, 2026년 9월 28일자 보도

¹⁷ 법무부 장관·공소청장·중수청장 공석, 중수청장 후보자 임명 절차 중단 — 서울신문, 2026년 9월 28일자·29일자 보도; 서울신문 사설, 2026년 9월 23일자

¹⁸ 경찰청장 공석(2024년 12월 직무 정지 이후 21개월, 대행 체제) — 서울신문, 2026년 9월 3일자·28일자 보도

¹⁹ 해양경찰청장 공석(약 9개월)과 신임 청장 내정(2026년 9월 16일) — 서울신문, 2026년 9월 17일자 보도; 검찰총장 직무대행 체제 — 매일신문, 2026년 8월 26일자 보도

※ 한비자 『오두』, 노자 『도덕경』 7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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