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둔 자와 갇힌 자의 계산법

1516년 베니스 게토 누오보 다리 입구에서 해질녘 문을 잠그는 경비원과 운하 전경
1516년 3월, 해가 지면 외부와 완전히 격리되던 베니스 게토 누오보의 출입문. 뒷모습의 경비가 등불을 들고 문을 잠그고 있다.

베니스, 가둔 자와 갇힌 자의 계산법

배제의 경제학은 도시에 무엇을 남기는가

2026.09.29 · 바다 · 베니스 공화국 시리즈 6편


밤이 되면 잠기는 도시 안의 섬

1516년 3월 29일, 베니스 원로원은 도시 곳곳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을 카나레조 구역의 작은 섬 한 곳에 모아 살게 하라는 포고를 내렸다.[1] 그 섬의 이름이 게토 누오보였다. 섬으로 드나드는 다리에는 문이 달렸다. 문은 해가 지면 잠기고 해가 뜨면 열렸다. 문을 지키는 기독교인 경비의 삯은 갇히는 쪽이 냈다. 운하에는 순찰선이 오갔다.

이 장면은 오늘의 눈으로 보면 배제의 시작으로 읽힌다. 그런데 같은 해 베니스의 장부를 펼치면 다른 사실이 보인다. 이 도시는 유대인을 쫓아내지 않았다. 세금을 받았고, 돈을 빌렸고, 병을 고치게 했고, 동방으로 이어지는 길로 썼다. 그러면서 동시에 가두었다.

쫓아내는 일과 가두는 일 사이에는 계산이 있다. 이 글은 그 계산을 따라간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1498년 바스쿠 다 가마가 인도에 닿으며 베니스의 향신료 독점이 흔들리기 시작한 과정을 살펴보았다. (앞선 글: 베니스, 항로 하나가 지운 부(富)) 바깥 바다의 지도가 바뀔 때 도시가 안쪽에 어떤 선을 긋는가. 게토는 그 질문의 가장 오래 남은 답이다.

안쪽으로 그은 선 — 1492년에서 1516년까지

1492년 스페인이 유대인을 추방하고 1497년 포르투갈이 강제 개종을 명하자, 이베리아를 떠난 세파르디 유대인들이 지중해 전역으로 흩어졌다. 이 가운데 일부는 베니스와 동방을 잇는 상인이 되어 라구나로 들어왔다. 독일 지역과 이탈리아 본토에서 온 이들도 있었다.

1509년 5월, 캉브레 동맹 전쟁의 아냐델로 전투에서 베니스군이 크게 패했다. 본토 영토가 무너지면서 시골과 소도시에 살던 유대인들이 난민이 되어 석호 안으로 밀려들었다. 도시 안에는 갑자기 낯선 사람이 늘었고, 전쟁에서 진 도시의 불안은 그 낯선 이웃을 향했던 것으로 읽힌다. 설교단에서는 유대인이 기독교인 사이에 섞여 사는 것을 문제 삼는 목소리가 커졌다.

원로원의 처지는 이랬다. 내쫓으면 돈과 신용이 사라진다. 그대로 두면 신앙의 경계가 흐려진다는 압력이 거세진다. 그래서 택한 해법이 모아서 가두되, 쓸모는 그대로 취하는 것이었다.

이 체제의 뼈대는 계약이었다. 유대인 대금업자는 일정 기간을 정한 조건부 계약을 맺어야 대부업을 할 수 있었고, 이 계약은 몇 해마다 갱신되었다. 체류의 허가가 계약 갱신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1] 게토에 들어간 사람은 처음에 700명 안팎으로 추정되며, 집세는 일반 시세보다 3분의 1 높게 매겨졌다. 유대인에게는 토지 소유가 허용되지 않았고 길드 가입도 막혀 있었다. 남은 길은 대부업, 중고품 거래, 의술, 동방 무역의 중개였다.

‘게토’라는 이름의 유력한 설명은 이 섬에 있던 옛 주조소에서 왔다는 것이다. 쇳물을 붓는다는 뜻의 베니스 말에서 나온 이름으로 본다. 그러나 이 설명에도 풀리지 않은 문제가 있다. 주조를 뜻하는 이탈리아어 geto는 부드러운 g로 읽히는데, 베니스 문헌의 이 지명은 기록이 남은 15세기 중반부터 단단한 g로 발음되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그 이유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다고 밝힌다.[2] 어원은 지금도 논쟁 중이다. 1541년에는 이웃한 옛 주조소 자리가 게토 베키오로 덧붙었고, 1633년에는 게토 누오비시모가 더해졌다. 1555년 로마 교황이 유대인 격리를 명하는 칙서를 내리자 로마에도 같은 구역이 세워졌다.[5] 한 도시의 지명이 유럽 전역의 보통명사가 되기까지, 채 사십 년이 걸리지 않았다.

낯선 자를 들이고 가두는 도시의 논리

無恒産者,無恒心。(무항산자,무항심。) “일정한 생업이 없는 자는 일정한 마음이 없다.”[3]

맹자는 이 말을 통치자에게 했다. 백성의 생업을 보장하라는 요구였다. 그런데 베니스는 정반대로 생업의 문을 좁게 깎아 주었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그다음이다. 생업을 막으면 사람이 사라지지 않는다. 생업이 좁은 문으로 몰리며 오히려 두꺼워진다. 대부업의 신용, 의술의 지식, 동방 상인들의 연락망이 좁은 섬 안에서 더 촘촘해졌다.

독일의 사회학자 게오르크 지멜은 1908년 ‘낯선 자’에 관한 글에서, 낯선 자를 오늘 왔다가 내일 떠나는 방랑자가 아니라 오늘 와서 내일도 머무는 사람으로 정의했다.[4] 공동체 안에 있으면서 공동체 바깥에서 온 사람이라는 것이다. 지멜은 이 거리 덕분에 낯선 자가 거래에서 객관적일 수 있고, 그래서 유럽의 도시에서 낯선 자의 전형적 직업이 상인이었다고 보았다.

이 개념을 베니스의 지도 위에 놓으면 게토가 무엇이었는지 선명해진다. 게토는 낯선 자의 낯섦을 제도로 고정한 자리였다. 도시는 낯선 자의 쓸모를 원했고, 낯섦은 유지해야 했다. 쓸모가 커질수록 벽은 더 필요해졌다는 역설이 이 구조 안에 있다.

철학은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벽은 무엇을 지켰고, 무엇을 낳았는가

게토 안에서는 일이 벌어졌다. 독일계, 이탈리아계, 레반트계, 스페인·포르투갈계 공동체가 각자의 회당을 세웠다. 다섯 개의 회당이 한 울타리 안에서 서로 다른 언어와 예배 전통을 지켰다. 땅은 넓어지지 않았고 사람은 늘었다. 건물은 위로 올라갔고, 당시 베니스에서 보기 드문 고층이 게토에 들어섰다. 좁은 땅이 수직의 도시를 낳았다.

이 압축은 문화에도 작용했다. 보통 그 시대 유대인은 기독교인을 진료할 수 없었다. 그런데 베니스는 유대인 의사에게만 예외를 열어 주었다. 실력이 있으면 환자의 종교를 가리지 않고 부를 수 있게 한 것이다. 갇혀 사는 사람이 도시의 건강을 책임지는 역설이 여기서 시작되었다.

인쇄업에서는 더 뚜렷한 장면이 있다. 1520년대 베니스에서는 다니엘 봄베르크라는 기독교인 사업가가 인쇄소를 차렸는데, 실제로 글자를 짜고 교정을 보는 일은 게토의 유대인 학자와 식자공들이 맡았다.[8] 이곳에서 사상 최초로 바빌로니아 탈무드 전질이 활자로 찍혀 나왔다. 그전까지 필사본으로만 돌던 방대한 학문이, 이제는 유럽 어느 도시의 서재에서도 똑같은 판형으로 펼쳐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베니스는 순식간에 유럽 유대 학문의 출판 중심지가 되었다.

이 두 장면은 같은 그림의 다른 조각이다. 도시는 벽 안의 사람들에게 전문성을 발휘할 좁은 문을 열어 주었고, 그 문으로 나온 지식과 신뢰는 결국 도시 전체의 자산이 되었다. 베니스는 이 흐름을 세금과 대부와 무역의 형태로 거두어들였다.

이 거래의 계산서를 정직하게 적으면 이렇다. 도시가 얻은 것은 세수, 신용, 통제였다. 공동체가 얻은 것은 자치와 예배의 안전이었고, 잃은 것은 이동과 소유의 자유였다. 그리고 쓸모의 그물이 모두를 부유하게 하지는 않았다. 1797년 9월의 조사에서 게토의 주민은 1,626명이었고, 다수가 하인과 넝마장수와 소상인으로 살았다.[6] 몇몇 큰 가문의 성공 곁에서 공동체 대부분은 가난했다.

가두는 도시는 가둔 자들의 쓸모에 의존하는 도시가 된다. 의존이 깊어질수록 벽을 허물기는 더 어려워진다. 벽이 곧 경제 구조가 되기 때문이다.

또 하나. 선은 한 번 그어지면 그은 자의 의도를 떠나 스스로 제도가 되어 살아간다. 전쟁의 불안과 종교적 압력이 낳은 임시 조치처럼 보였던 것이 281년을 이어졌다. 끝은 바깥에서 왔다. 1797년 5월 공화국이 스스로 해산했고 프랑스군이 들어왔다. 그해 7월 문이 내려졌다. 뜯겨 나간 문은 광장 한가운데서 불탔다. 그 자리에 자유의 나무가 심겼고, 광장은 ‘재결합’이라는 뜻의 새 이름을 얻었다고 전한다.[6] 밤마다 잠기던 문이 낮의 광장에서 재가 된 것이다. 도시가 지키려던 질서와 그 질서 안에 갇힌 사람들이 같은 해에 풀려났다는 사실은, 이 구조가 도시 자신의 존립과 얼마나 깊이 얽혀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 다만 이 해방이 곧 끝이 아니었다는 점도 적어 두어야 한다. 베니스는 곧 오스트리아의 지배 아래로 넘어갔고, 제한은 이후에도 오르내렸다.

‘게토’라는 단어가 이후 어디에 쓰였는지도 짚어야 한다. 베니스의 게토는 계약과 세금과 통제로 짜인 체제였다. 그 안에는 자치와 예배와 쓸모의 거래가 있었다. 훗날 나치가 20세기 유럽에 세운 구역들은 같은 이름을 썼지만 구조가 달랐다. 브랜다이스대 라비드 교수는 그 구역들을 주거 지역이 아니라 총체적 청산으로 가는 계획된 길의 임시 단계라고 썼다.[7] 하나는 쓸모를 지속하려는 격리였고, 다른 하나는 쓸모를 소멸시키기 위한 절차였다. 두 공간을 같은 것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다만 하나의 지명이 기억을 실어 나르는 방식은 기억해 둘 만하다. 이름은 지은 자의 손을 떠나 전혀 다른 목적 위에서도 살아남는다.

문이 열린 뒤에도 남는 것

오늘 게토 누오보는 그대로 베니스에 있다. 회당은 열려 있고, 작은 박물관이 있고, 사람들은 다리를 건넌다. 문은 없다.

그러나 도시는 지금도 다른 이름으로 선을 긋는다. 학군, 소득, 지역, 언어, 세대. 담장을 두른 주거 단지는 그 선이 눈에 보이는 가장 물리적인 형태일 것이다. 일은 맡기되 자리는 내주지 않는 선, 쓸모는 취하되 경계는 유지하려는 선이 우리 곁에는 어디에 있는가. 그 선을 그은 사람은 누구이고, 그 선 때문에 두꺼워진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선이 사라질 때 함께 사라지는 것은 무엇인가.

바라보는 자의 기록은 멀리서 이 선들의 모양을 계속 바라본다.


* 참고할 말씀: ‘너희와 함께 있는 타국인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같이 사랑하라’ — 레위기 19:34

[1] 1516년 3월 29일 포고, 계약·집세·직업 제한: Riccardo Calimani, The Ghetto of Venice (1987); Robert C. Davis & Benjamin Ravid 편, The Jews of Early Modern Venice (2001); Ghetto Venezia(ghettovenezia.com) 역사 자료

[2] ‘게토’ 어원 논쟁: Oxford English Dictionary, “ghetto, n.”; Benjamin Ravid의 게토 어휘사 연구; Anatoly Liberman의 어원 논의

[3] 맹자, 「양혜왕 상」

[4] Georg Simmel, 「낯선 자에 관한 excursus」, Soziologie (1908)

[5] 1555년 로마 교황 칙서: Cum nimis absurdum

[6] 1797년 게토 문 철거·광장 명칭·1797년 9월 인구조사: SeeVenice(seevenice.it) 「The Campo of the Ghetto Novo」; Ghetto Venezia(ghettovenezia.com) 역사 자료

[7] 나치 게토에 대한 라비드의 규정: Moment Magazine, 「Jewish Word: Ghetto」

[8] 다니엘 봄베르크의 히브리어 인쇄소와 바빌로니아 탈무드 초판 인쇄(1519/20~1523, 1525~1539): History of Information(historyofinformation.com); Wikipedia, “Daniel Bombe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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