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핍이 끝난 뒤에도 줄은 남았다 — 오픈런, 증명을 위해 서는 줄
한국현대-줄-⑩ | 2010년대, 무엇을 기다렸는가로 읽는 한국 현대사
역사·철학 · 2026.09.29
2010년대 후반의 어느 목요일 새벽, 서울의 한 편집숍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모자를 눌러쓰고 접이식 의자에 앉아 휴대폰 불빛을 들여다보는 이십 대들이다. 이들이 기다리는 것은 쌀도 표도 입학 통지서도 아니다. 오전 열한 시에 한정 수량으로 풀리는 운동화 한 켤레다.
이 줄에는 굶주림이 없다. 신발이 없어서 맨발로 서 있는 사람도 없다. 대부분은 같은 브랜드의 신발을 이미 몇 켤레씩 갖고 있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2000년대 놀이공원과 극장 앞의 줄을 살펴보았다. 그 줄은 무엇을 소유하기 위한 줄이 아니라 무엇을 겪기 위한 줄이었다. 2010년대에 이르러 줄은 한 번 더 모습을 바꾼다. 이제 사람들은 경험조차 아니라 “그 줄에 섰다는 사실” 자체를 얻으려고 줄을 선다.
이 시리즈는 위대한 결단이 아니라 지극히 사소한 기다림으로 한국 현대사를 읽어 왔다. 이번 편의 기다림은 그중에서도 가장 사소해 보인다. 신발 한 켤레를 둘러싼 새벽의 기다림을 역사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 데에는 의구심이 따를 수 있다.
그러나 줄의 이유가 이만큼 뒤집혔다는 사실이 바로 역사다. 배급 줄에서 오픈런 줄까지 오는 데 한 세대 남짓이 걸렸고, 그동안 줄의 물리적 모양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변한 것은 줄이 서 있는 이유뿐이다.
과거의 줄은 대체로 참아내는 줄이었다. 배급을 받기 위해, 입학과 청약의 문을 통과하기 위해 사람들은 자기를 낮추고 견뎠다. 2010년대의 줄은 다르다. 사람들은 견디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에게 보일 자신을 스스로 짓기 위해 선다.
희소성의 건축: 획득에서 증명으로
한정판 스니커즈 문화의 뿌리는 미국 농구 코트에 있다. 1985년 나이키가 마이클 조던의 첫 시그니처 모델을 출시했을 때, NBA가 유니폼 규정 위반을 이유로 벌금을 물렸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어떤 모델이 정확히 문제였는지는 자료마다 엇갈린다.
그러나 나이키가 이 일화를 ‘금지된 신발’이라는 광고 서사로 바꿔 놓았다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다.¹ 금지는 마케팅 자산이 되었고, 신발은 기능을 넘어 서사를 입었다.
이 서사가 시장이 된 것은 1990년대다. 1994년 4월 뉴욕 라파예트 스트리트에 문을 연 슈프림은 물량을 일부러 적게 풀고 신제품을 정해진 날 한꺼번에 내놓는 방식을 정착시켰다.² 이른바 ‘드롭(drop)’이다. 살 수 있는 시간과 수량을 좁히면 사람들이 그 좁은 문 앞에 모인다는 것을 업계는 경험으로 배웠다.
2010년대는 여기에 두 개의 장치가 결합한 시대다. 하나는 2010년 10월에 출시된 사진 앱 인스타그램이고, 다른 하나는 2015~2016년 무렵 등장한 GOAT, 스톡엑스 같은 리셀 플랫폼이다.³ 앞의 것은 “나는 이 줄에 섰다”를 보여 주는 무대가 되었고, 뒤의 것은 그 줄의 값을 실시간 시세로 바꿔 놓았다. 2015년 2월 이지 부스트 350이 발매 직후 동난 뒤, 신발이 정가의 몇 배로 거래된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공개된 숫자가 되었다.
여기서 줄의 성격이 바뀐다. 줄은 물건에 닿는 통로가 아니라 물건에 값을 붙이는 공정이 된다. 줄이 길수록 신발은 귀해 보이고, 귀해 보일수록 줄은 더 길어진다.
이 줄에서 사는 것은 신발이 아니라 신발을 가질 자격이다. 시세를 읽고 발매 정보를 먼저 아는 능력, 새벽을 견딜 수 있는 시간이 그 자격의 내용이다. 신발은 소유물이기 전에 ‘나는 이 문화의 문법을 안다’는 신호가 된다.
한국도 이 흐름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서울의 편집숍과 백화점 앞에는 발매일마다 밤샘 줄이 생겼고, 브랜드들은 곧 온라인 추첨, 이른바 ‘드로우’를 도입했다. 줄을 서지 않고도 확률로 서는 줄이 생긴 것이다. 2020년 전후에는 국내 대형 플랫폼 기업 계열의 리셀 플랫폼까지 등장해 이 시장을 제도권으로 끌어들였다.⁴
이 줄에서 가장 서늘한 대목은 시간의 환율이다. 앞쪽에는 자기가 신을 신발이 아니라 되팔 신발을 사려는 사람들이 있었고, 어떤 이들은 돈을 받고 대신 서 주었다.
노동시장에서 낮게 매겨진 청년의 시급이, 줄 위에서는 밤샘 한 번이 리셀 차익으로 환산되는 시간으로 바뀐다. 시간이 남는 세대의 시간이 가장 값싸게 팔리고, 그 시간이 만든 희소성은 브랜드가 가져간다.
줄을 선 사람들이 올리는 사진은 브랜드가 따로 광고비를 들이지 않고도 얻는 광고가 된다. 미디어 연구가 오래전 ‘시청자가 곧 상품’이라 불렀던 구조가, 이 줄에서는 줄 선 자가 곧 광고판이 되는 방식으로 되풀이된다. 소비자이면서 동시에 무대의 부품이 되는 것이다.
베르사유에서 인스타그램까지
과시를 위한 줄이 2010년대의 발명품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세계사는 이 장면을 여러 번 보여 준다.
루이 14세의 베르사유 궁정이 대표적이다. 왕이 잠에서 깨어 옷을 입는 아침 의식에 누가 몇 번째로 입실하는지가 곧 귀족의 지위였다.
“달력과 시계만 있으면 삼백 리 밖에서도 왕이 지금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 생시몽, 『회상록』⁵
귀족들은 왕의 방문 앞에서 기다렸다. 필요해서가 아니라, 기다리는 순서가 자신의 위계를 증명했기 때문이다.
로마 공화정의 오피우스 법(기원전 215년)은 반대편에서 같은 패턴을 보여 준다. 한니발과의 전쟁 중 여성의 금 장신구와 자줏빛 옷을 제한했던 이 법은, 전쟁이 끝난 뒤 기원전 195년에 폐지되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여성들이 광장에 몰려나와 폐지를 요구했고, 대(大)카토가 이에 격렬히 반대했다.⁶
과시를 억누르는 규칙은 위기 때는 설득력이 있지만 위기가 끝나면 가장 먼저 흔들린다. 사람들은 결핍이 가시는 순간 자신을 드러낼 방법을 찾는다.
1899년 미국의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은 『유한계급론』에서 도금시대 부유층의 소비를 ‘과시적 소비’라는 말로 붙잡았다.⁷ 철도와 철강으로 하룻밤에 돈을 번 신흥 부자들이 능력이 아니라 낭비의 크기로 지위를 증명하던 시대였다.
1637년 2월 네덜란드 튤립 시장도 자주 인용된다. 다만 역사가 앤 골드가는 이 광풍의 규모와 파장이 후대에 과장되었을 가능성을 지적하며, 당대의 도덕주의적 팸플릿이 그 이야기를 키웠다고 본다.⁸ 튤립 이야기가 오래 살아남은 것은 그 서사가 사치에 대한 사회의 불안을 편리하게 담아 주었기 때문일 수 있다.
분명한 것은 튤립이 먹을 수도 입을 수도 없는 물건이었다는 점이다. 값을 정한 것은 효용이 아니라 남이 그것을 원한다는 사실이었다.
20세기 후반의 명품 산업은 이 원리를 산업으로 만들었다. 1984년 에르메스가 내놓은 버킨백은 구매의 어려움이라는 경험 자체를 브랜드 자산으로 바꾼 대표적 사례다.⁹ 결핍이 사라진 세계에서 결핍은 설계되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베르사유와 오픈런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베르사유의 서열은 신분제가 강제한 것이었고, 귀족은 그 줄에 서지 않을 자유가 없었다. 오픈런의 서열은 아무도 강제하지 않는다.
자본주의가 무대를 차려 놓고 초대장 없이도 입장을 허락할 뿐이다. 강제된 서열은 저항의 대상이 되지만, 자발적으로 참여한 서열은 불만을 품을 곳조차 남기지 않는다. 그래서 이 줄은 더 조용하고 더 길다.
여기에 2010년대 세계의 배경이 겹친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각국은 저금리와 양적완화로 위기를 넘겼고, 그 과정에서 자산을 가진 쪽과 갖지 못한 쪽의 격차가 더 벌어졌다는 분석이 많다. 2011년 9월 뉴욕에서 ‘월가를 점령하라’가 시작되며 “우리는 99%다”라는 구호가 퍼진 것은 그 격차가 정치적 언어가 된 순간이었다.¹⁰
집도 안정적 일자리도 사기 어려워진 세대에게 남은 것은 손이 닿는 가격의 작은 사치였다. 운동화 한 켤레는 그 세대가 살 수 있는 가장 가시적인 지위 표식이었다.
베르사유의 복도에서도 오픈런의 새벽에서도, 사람들은 결핍이 끝난 자리에서 서열을 새로 만들어 냈다.
줄이 서 있는 이유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이 시리즈를 관통하는 구조를 다시 요약해 보자. 한국의 줄은 처음에는 생존을 위한 줄이었다. 그 뒤에는 기회의 줄, 곧 입학과 취업과 청약의 줄이 되었고, 그다음에는 경험의 줄, 곧 놀이공원과 극장 앞의 줄이 되었다. 그리고 2010년대에 이르러 인정을 위한 줄이 되었다.
이 네 단계는 하나의 방향을 갖는다. 줄의 이유가 물질에서 관계로, 필요에서 시선으로 이동한다. 굶주림은 배를 채우면 끝나지만 인정은 채워지지 않는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는 끝이 없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2010년대는 이 이동을 유난히 가파르게 겪었다. 2011년 ‘삼포세대’라는 말이 나왔고, 2015년에는 ‘N포 세대’와 ‘수저계급론’이 일상어가 되었다. 노력으로 계층 이동이 가능하다는 믿음에 금이 가던 시기다.
사회의 반응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2018년에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 ‘소확행’이 유행했고, 2019년에는 ‘플렉스’가 유행어가 되었다.
이 두 유행어는 서로 반대처럼 보이지만 같은 뿌리를 갖는다. 큰 사다리가 막혔다고 느낀 사람이 손에 닿는 범위 안에서 자신의 값을 확인하려 한다는 점이다. 오픈런은 그 확인의 가장 정직한 형식이었다. 시간과 체력을 들이면 누구나 살 수 있다는, 몇 안 남은 공정한 경쟁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공정함에는 함정이 있다. 줄이 길어질수록 대리 줄과 리셀러가 늘고 진짜 원하는 사람은 뒤로 밀린다. 인정을 위해 서던 줄은 어느새 누군가의 수익을 위해 서는 줄이 되어 버린다.
문이 하나뿐인 무대
이 시대를 정리하면 하나의 패턴이 남는다. 결핍의 줄은 충족되면 끝나지만, 인정의 줄은 충족될수록 길어진다. 신발을 손에 넣는 순간 기준은 다음 신발로 옮겨 가기 때문이다.
과시의 줄은 구조상 끝나지 않는다. 이 패턴은 신발에서 끝나지 않았다. 코로나19 이후 백화점 개점 전 줄과 가격 인상 예고 때마다 되풀이된 명품 오픈런은 같은 문법의 확장판이었다. 대상이 신발에서 가방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는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문제는 개인의 허영이 아니라 인정의 문이 하나뿐이라는 데 있다. 사회가 청년에게 내어 주는 인정의 무대가 소비 하나로 좁아질 때, 사람들은 그 하나의 문 앞에 모인다.
따라서 해법은 절제를 설교하는 데 있지 않고 문을 늘리는 데 있다. 일자리, 주거, 전문성, 공동체 같은 영역에서 노력이 실제 지위로 이어진다는 믿음이 복원되어야 오픈런의 절박함은 줄어든다.
동시에 시간이 흩어지는 곳이 아니라 쌓이는 곳으로 흘러가도록 사회가 길을 내야 한다. 밤샘의 시간은 사라지지만 기술과 관계와 지식에 들인 시간은 남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사진 한 장으로 서열을 매기는 플랫폼과 희소성을 설계하는 산업이 무엇을 부추기는지를 구조의 문제로 직시해야 한다. 개인에게 절제를 요구하기 전에, 구조가 무엇을 팔고 있는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2026년 9월 오늘도 백화점 개점 전 줄과 중고거래 앱의 시세창은 여전히 켜져 있다.
베르사유의 귀족들은 왕의 침실 앞에서 자신의 서열을 확인했다. 그 서열을 확인해 줄 문은 하나뿐이었다. 우리가 서 있는 줄의 끝에도 같은 질문이 놓여 있다. 이 줄은 무엇을 기다리는 줄이며, 그 문 뒤에는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이 있는가. 그리고 이 사회는 그 문 말고 어떤 문을 열어 두었는가.
그 질문은 줄 안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바라보는 자의 기록이 줄의 맨 앞이 아니라 줄 바깥에서 쓰이는 까닭이다.
¹ 나이키 ‘금지된(Banned)’ 광고 서사와 NBA 벌금 일화는 스니커 문화사 서술마다 세부가 다르다. 스포츠 마케팅 사례 연구·언론 보도 참조.
² 슈프림(Supreme) 창립: 1994년 4월 뉴욕 라파예트 스트리트 개점. 브랜드 공식 연혁 및 언론 보도.
³ 인스타그램 출시 2010년 10월. GOAT(2015)·StockX(2016) 등 리셀 플랫폼 등장 시기는 각 사 연혁 및 언론 보도 참조.
⁴ 국내 리셀 플랫폼 출범 시기 및 발매 방식(드로우)은 각 사 공개 자료·언론 보도 참조.
⁵ 생시몽, 『회상록』(Louis de Rouvroy, duc de Saint-Simon, Mémoires). 루이 14세 궁정 일과에 관한 서술.
⁶ 리비우스, 『로마 건국사』(Titus Livius, Ab Urbe Condita) 34권. 오피우스 법 제정(기원전 215년)·폐지(기원전 195년).
⁷ Thorstein Veblen, The Theory of the Leisure Class (1899).
⁸ Anne Goldgar, Tulipmania: Money, Honor, and Knowledge in the Dutch Golden Ag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7).
⁹ 에르메스 버킨백 1984년 출시. 브랜드 공식 연혁 및 언론 보도 참조.
¹⁰ 월가 점령(Occupy Wall Street) 시위: 2011년 9월 뉴욕 주코티 공원에서 시작. 언론 보도 참조.
* 참고할 말씀: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 마태복음 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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