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탕 한 스푼의 값 — 삼각무역이 지운 얼굴들

18세기 말 카리브해 부두에서 사탕수수를 짊어지고 이동하는 아프리카인 노예들과 대서양 삼각무역 범선의 일출 풍경
18세기 말 카리브해의 한 부두, 대서양 너머로 떠날 설탕 범선과 사탕수수를 나르는 이들의 아침.

설탕 한 스푼의 값 — 삼각무역이 지운 얼굴들

찻잔 속의 단맛은 누구의 시간을 타고 건너왔는가

2026.10.07 · 세계사 · 세계사-물자-⑤ · Watchman


가벼워진 설탕, 가벼워지지 않은 값

오늘 한국의 식탁에서 설탕은 줄여야 할 대상이 되었다. 제로 슈가라는 말이 건강한 소비의 상징이 된 지 오래고, 당 함량 표시는 음료 라벨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자리를 차지한다. 설탕이 너무 흔해져서 문제가 된 시대다.

그러나 설탕이 흔했던 시간은 길지 않다. 중세 유럽에서 설탕은 향신료·약재와 함께 상자에 담겨 팔리던 귀한 물건이었고, 왕실 연회에서는 설탕으로 빚은 조각품이 부의 크기를 과시했다. 그 귀한 결정이 노동자의 찻잔에 들어와 일상의 소비재로 자리 잡기까지, 대서양에는 인류가 이전에 본 적 없는 규모의 항로가 열렸다.

영국인의 1인당 연간 설탕 소비량은 1700년경 약 4파운드(약 1.8kg)에서 1800년경 약 18파운드(약 8kg)로 늘어난 것으로 추산된다.¹ 한 세기 만에 네 배 넘게 늘어난 것이다. 이 숫자 뒤에서 단맛 말고 무엇이 함께 늘어났는지를 묻는 것이 이 글의 질문이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감자 한 가지 작물에 기댄 체제가 1845년 아일랜드 대기근 앞에서 무너지는 장면을 살펴보았다. 작물 하나가 한 사회의 운명을 쥐는 구조는 대서양 건너편의 사탕수수 밭에서 더 이른 시기에, 더 가혹한 형태로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흰 황금이 바다를 건너는 법

사탕수수는 본래 열대의 풀이다. 뉴기니와 남아시아에서 길러져 이슬람 세계를 거쳐 지중해로 들어왔고, 포르투갈인이 아프리카 서해안의 상투메 섬에서 아프리카인 노예를 투입하는 농장 방식을 본격적으로 굳혔다. 1493년 콜럼버스는 두 번째 항해에서 사탕수수 줄기를 히스파니올라 섬에 가져갔다.

그 뒤 브라질 북동부가 포르투갈의 설탕 기지가 되었고, 17세기 중반에는 브라질에서 제당 기술을 익힌 네덜란드 상인들의 자본과 노하우가 카리브해로 옮겨 갔다. 영국령 바베이도스에서는 1640년대를 거치며 사탕수수가 섬의 경제를 통째로 뒤집었다. 수십 년 사이에 섬의 인구 구성은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노예 중심으로 바뀌었다.²

사탕수수는 베어낸 뒤 하루 이틀 안에 즙을 짜고 끓이지 않으면 당분이 상한다. 그래서 농장은 밭과 제당소와 가마가 하나의 공정으로 묶인 거대한 작업장이 되었다. 인류학자 시드니 민츠는 이 설탕 농장을 산업혁명보다 앞선 일종의 공장으로 보았다.³ 시계에 맞춘 노동, 분업, 감독이 방직 공장보다 먼저 사탕수수 밭에서 완성되었다고 본 것이다.

공장의 원리는 소비의 자리에서도 작동했다. 18~19세기 영국 도시 노동자들은 설탕을 탄 따뜻한 홍차와 빵에 의존해 하루의 열량을 채우곤 했다. 민츠는 값싼 설탕을 이 식단을 떠받친 핵심 고리로 해석했다.³ 카리브해 농장에서 베어낸 사탕수수가 런던과 맨체스터 노동자의 열량으로 바뀌면서, 대서양 양쪽의 노동이 하나의 체제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 연결이 산업화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지금도 학계의 논쟁거리지만, 구조적 연결 자체는 부인하기 어렵다.

여기서 삼각무역이 돌아가기 시작한다. 영국과 프랑스의 항구에서 총, 직물, 금속제품을 실은 배가 서아프리카로 떠났다. 그 상품은 아프리카 해안에서 사람과 교환되었고, 그렇게 얻은 사람들은 대서양을 건너 카리브해와 브라질로 실려 갔다. 세 번째 구간에서 배는 설탕과 당밀, 럼을 싣고 리버풀과 브리스틀, 낭트와 보르도로 돌아왔다. 항로는 삼각형을 그렸고, 어느 꼭짓점에서도 배는 빈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규모는 통계로도 가늠하기 어렵다. 노예 항해 데이터베이스는 16세기부터 19세기 중반까지 대서양을 건너도록 배에 실린 아프리카인을 1,250만 명 안팎으로 추산한다.

그중 1,000만 명 남짓이 살아서 아메리카에 닿았고, 대부분이 브라질과 카리브해로 향했다. 두 지역의 중심 산업이 사탕수수였다. 북아메리카 본토로 간 사람은 전체의 5퍼센트에도 못 미쳤다.⁴

18세기 말 프랑스령 생도맹그(오늘날의 아이티)는 유럽에서 소비되는 설탕의 상당 부분을 홀로 공급하는 섬이 되어 있었다.⁵ 그 번영은 수십만 명의 노예 노동에 의존하고 있었고, 가혹한 노동 환경 때문에 농장은 끊임없이 새 노예를 사들여야 유지되었다.

1781년 11월 말, 노예선 종(Zong)호에서 벌어진 일은 이 체제의 논리가 어디까지 가는지를 보여준다. 항해가 길어져 식수가 부족해지자 선장은 병들고 쇠약한 아프리카인 130여 명을 바다에 던지도록 지시했다. 선주들은 이를 화물 손실로 보고 보험금을 청구했고, 1783년 영국 법정은 이 일을 살인이 아닌 재산 손실의 문제로 다루었다.⁶ 사람이 보험 장부의 항목이 되는 순간, 살인은 회계 문제가 되었다.

몬테스키외의 반어, 맹자의 푸줏간, 장자의 문

몬테스키외는 1748년 《법의 정신》에서 노예제를 변호하는 듯한 문장들을 일부러 늘어놓았다. 그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다. “설탕을 생산하는 식물을 노예에게 경작시키지 않는다면, 설탕은 너무 비싸질 것이다.”⁷ 같은 장에서 그는 노예가 된 사람들을 인간으로 인정하는 순간 우리 스스로가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의심을 받게 될 것이라고 비꼬았다.

이 문장들은 단순한 옹호가 아니라 반어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노예제를 정당화하는 논리를 그대로 적어 그 빈약함을 드러내려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반어를 걷어내면 한 문장이 남는다. 노예제를 떠받친 가장 강력한 논거는 인간론이 아니라 가격표였다. 트리니다드 출신의 역사가 에릭 윌리엄스는 1944년 《자본주의와 노예제》에서 인종주의가 노예제의 원인이라기보다 결과였다고 주장했다.⁸ 이 주장은 지금도 논쟁 중이지만, 싼 설탕에 대한 수요가 먼저 있었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뒤따랐다는 순서는 되새길 만하다.

이 가격표가 작동하려면 두 가지가 필요했다. 하나는 고통을 눈앞에서 치우는 거리이고, 다른 하나는 그 치움에 윤리의 옷을 입히는 제도다. 먼저 거리부터 보자. 맹자는 양혜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庖有肥肉,廐有肥馬,民有飢色,野有餓莩,此率獸而食人也。
(포유비육,구유비마,민유기색,야유아표,차솔수이식인야。)
“푸줏간에는 살찐 고기가 있고 마구간에는 살찐 말이 있는데, 백성의 얼굴에는 굶주린 빛이 있고 들에는 굶어 죽은 시체가 있다면, 이는 짐승을 몰아 사람을 잡아먹게 하는 것이다.”⁹

이 문장은 굶주린 얼굴이 군주의 눈앞에 있다는 전제 위에 서 있다. 맹자의 시대에 불인(不仁)은 눈을 감는 일이었다. 삼각무역은 눈을 감을 필요조차 없게 만들었다. 얼굴을 수천 킬로미터 밖으로 옮겨 놓았기 때문이다.

거리가 얼굴을 지웠다면, 제도는 그 지움을 정당한 질서로 바꾸었다. 장자는 그 기능을 법과 권력의 자리에서 짚었다.

竊鉤者誅,竊國者為諸侯,諸侯之門而仁義存焉。
(절구자주,절국자위제후,제후지문이인의존언。)
“허리띠 고리를 훔친 자는 처형되고, 나라를 훔친 자는 제후가 되며, 그 제후의 문 안에 인의가 있다고 한다.”¹⁰

《거협》 편은 법과 인의라는 제도가 큰 도둑을 막는 장치가 아니라 오히려 약탈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쓰이는 구조적 모순을 비판한 구절로 해석되곤 한다. 큰 도둑은 처벌받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법을 앞세워 약탈을 질서로 바꾼다. 사람의 죽음을 재산 손실로 처리한 종호 사건의 법정, 그리고 뒤에서 볼 해방 보상금의 논리가 이 구조와 겹쳐 읽힌다.

철학은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청구서는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 간다

런던의 찻잔 앞에 앉은 사람은 사탕수수 밭을 보지 못한다. 밭은 대서양 너머에 있었고, 그곳의 노동은 부두에서 상자가 되는 순간 이름과 얼굴을 잃었다. 설탕이 판 것은 단맛이 아니라 거리였다. 소비하는 자리와 생산하는 자리가 멀어질수록, 그 사이에 놓인 비용은 계산서에서 사라진다.

그 거리가 좁혀지는 순간 무엇이 일어나는지도 기록되어 있다. 1788~1789년 영국의 폐지 운동가들은 리버풀 노예선 브룩스호의 단면도를 퍼뜨렸다. 454명의 사람이 선창에 빼곡히 눕혀진 그림이었다.

1791년 의회가 폐지 법안을 부결시키자, 이듬해까지 약 30만 명이 서인도산 설탕을 끊었다고 추산된다.¹¹ 달라진 것은 설탕의 맛이 아니라 설탕과 사람 사이의 거리였다.

두 번째 패턴은 종호 사건에서 드러난다. 노예제는 노동을 싸게 만들었지만 비용을 없애지는 않았다. 죽음은 보험 장부로, 고통은 선적 손실로 옮겨졌다. 제도는 비용을 없애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옮길 뿐이다.

세 번째는 끝나는 순간의 청구서다. 영국은 1807년 노예무역을 금지했고, 1833년 노예제 폐지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노예주들에게 약 2천만 파운드를 보상금으로 지급했는데, 당시 국가 연간 지출의 대략 40퍼센트에 이르는 규모였다.¹² 해방된 사람들은 보상 없이 수년의 도제 기간을 더 거쳐야 했다. 노예제가 끝나는 순간에도 보상받은 쪽은 노예가 아니라 노예주였다.

아이티의 경우는 더 선명하다. 1791년 8월 봉기를 시작으로 스스로 쇠사슬을 끊고 1804년 독립한 이 나라에, 프랑스는 1825년 군함을 앞세워 독립 승인의 대가를 요구했다. 옛 노예주의 재산 손실을 보상하라는 것이었고, 액수는 1억 5천만 프랑(후에 9천만 프랑으로 감액)이었다.

아이티는 첫 회분을 마련하려고 프랑스 은행들에서 돈을 빌려야 했다. 배상금 위에 대출 이자가 얹히는 이중의 부채가 이 나라의 재정을 20세기 중반까지 짓눌렀다고 알려져 있다.¹³ 쇠사슬을 끊은 쪽이 쇠사슬의 값을 치르게 된 것이다.

가격표에 적히지 않은 것

설탕의 시대가 끝났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노예제는 법적으로 사라졌지만, 값싼 편안함이 보이지 않는 노동 위에 놓이는 구조가 모양을 바꿔 반복되는지 묻는 일은 끝나지 않았다. 지금 한국에서도 새벽에 문 앞에 도착하는 상자가 있고, 몇 분 만에 배달되는 음식이 있고, 계절마다 비닐하우스와 어선과 공장을 채우는 이주노동자의 손이 있다.

이것이 노예제와 같다는 뜻은 아니다. 이들에게는 법적 지위와 계약이라는 결정적 차이가 있고, 그 차이를 지우는 비유는 사실을 해친다. 다만 비용을 멀리 외주화하고 고통을 소비자의 시야 밖에 두는 구조의 논리는, 가격표 앞에 선 우리의 자리를 삼각무역 시대 런던의 찻잔 앞과 같은 위치에 놓는다.

값이 싸다는 것은 누군가 그 값을 대신 치르고 있다는 뜻이다. 편리함의 단가가 계속 낮아지는 사회에서, 그 낮은 단가를 몸으로 받아내는 사람은 누구인가.

멀리서 보아야 보이는 것이 있다. 설탕 한 스푼의 값은 찻잔 안에서는 보이지 않았고, 대서양 건너편에서야 비로소 보였다.

당신이 오늘 지불한 값 가운데, 누구의 시간이 섞여 있었는가.


* 참고할 말씀: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어갔느니라’ — 야고보서 5:4

¹ Sidney W. Mintz, Sweetness and Power (1985)
² Richard S. Dunn, Sugar and Slaves (1972)
³ Mintz, 앞의 책
⁴ Slave Voyages 데이터베이스 (slavevoyages.org)
⁵ Laurent Dubois, Avengers of the New World (2004)
⁶ James Walvin, The Zong (2011); Gregson v. Gilbert (1783)
⁷ Montesquieu, De l’esprit des lois (1748), 15편 5장
⁸ Eric Williams, Capitalism and Slavery (1944)
⁹ 《孟子》梁惠王上
¹⁰ 《莊子》胠篋
¹¹ Adam Hochschild, Bury the Chains (2005)
¹² Nicholas Draper, The Price of Emancipation (2010); UCL Legacies of British Slavery 데이터베이스
¹³ Laurent Dubois, Haiti: The Aftershocks of History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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