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울리면 멈추던 몸

1970년대 말 한국 초등학교의 낡은 종 너머로 운동장에 줄을 맞춘 아이들이 일제히 팔을 벌려 국민체조를 하는 재현 장면
하나의 신호에 맞춰 움직이던 몸들. 학교 종과 국민체조가 나누던 1970년대 말의 시간을 재현했다.

종이 울리면 멈추던 몸

학교 종과 국민체조의 시간표

2026. 11. 07. · 역사 · 한국현대사 · 【한국현대-소리】 시끄러운 세상에서 살아남기 ⑤ · 1960~90년대


해 질 무렵, 걸음이 멈추던 나라

해 질 무렵, 어디선가 애국가가 흘러나오면 걸음을 멈추곤 했다고 한다. 걷던 사람도, 놀던 아이도, 도로 곁을 지나던 행인도 그랬다. 1970~80년대를 통과한 사람들에게 이 장면은 머릿속의 풍경으로만 남아 있지 않다. 그 노래의 첫 소절이 들리면 지금도 자세를 고쳐 잡게 된다는 이가 있다. 몸의 습관도 기억의 한 형태다.

이 글은 그 장면을 회고하려는 글이 아니다. 질문은 하나다. 소리가 사람을 멈추게 할 때, 그렇게 멈춘 시간은 누구에게 속하는가.

학교 종, 국민체조의 구령, 국기하강식의 애국가, 자정의 통행금지 사이렌. 이 소리들은 생겨난 배경과 목적이 달랐다. 그러나 정해진 신호에 따라 여러 사람의 행동을 한 박자로 맞춘다는 점에서 같은 구조를 갖고 있었다. 소리가 나면 몸이 반응하고, 반응은 같은 순간에 일어나며, 그 일치가 ‘우리’라는 감각의 재료가 되었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지하철 안내방송이 출근길의 리듬을 맞춰 온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그보다 앞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학교 종과 구령이 몸에 새긴 시간표를 따라간다.

종소리는 시간과 함께, 시간을 정하는 권한도 알린다

시간의 규율은 한국의 발명이 아니다. 미국의 도시사학자 루이스 멈퍼드는 『기술과 문명』(1934)에서 근대 산업 시대의 핵심 기계는 증기기관이 아니라 시계라고 썼다. 시계의 뿌리는 수도원이다. 기도 시간을 지키기 위해 종을 쳤고, 종소리는 마을 전체의 일과로 번졌다. 영국의 역사가 E. P. 톰슨은 「시간, 노동 규율, 그리고 산업자본주의」(1967)에서 이 변화가 공장의 종과 시계로 이어지는 과정을 추적했다.¹

농사일이 계절과 작업의 흐름에 크게 좌우되었다면, 공장 노동에서는 종과 시계가 정한 시간이 더욱 중요해졌다. 시간은 ‘지나가는 것’에서 ‘사고팔 수 있는 것’으로 옮겨 갔다. 푸코 역시 『감시와 처벌』(1975)에서 시간표를 신체 규율의 중요한 장치로 살폈다. 수도원에서 쓰이던 시간 배분 방식이 학교와 병영, 병원과 공장에서 어떻게 쓰였는지에 주목했다.² 세 사람의 논의는 서로 다른 질문에서 출발했지만, 시간표가 몸을 조율하는 도구가 되는 장면을 함께 비춘다.

한반도에도 종은 있었다. 조선의 도성은 인정(人定)의 종으로 문을 닫고 파루(罷漏)의 종으로 문을 열었다. 밤의 통행을 금하고 푸는 신호가 소리였다. 근대 학교가 들어서면서 종소리의 성격은 바뀐다. 1895년 갑오개혁기에 학교 설치령과 함께 체조가 교과에 들어왔고, 이후 체조는 근대 교육의 기본 과목이 되었다.³ 도성의 종이 ‘밤을 닫는 소리’였다면, 학교 종은 ‘하루를 조각내는 소리’였다. 수업, 쉬는 시간, 점심, 조회. 아이들은 교과 지식과 함께, 종이 나눈 시간에 맞춰 움직이는 법을 먼저 배웠다.

종소리는 시간을 알려 주는 장치이면서, 시간을 정하는 권한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알려 주는 장치다. 종을 칠 수 있는 쪽이 다른 사람의 일과를 정한다.

몸을 단체로 움직이는 기술은 한 나라의 문화에 갇혀 있지 않다. 근대 국가가 위기를 겪을 때마다 되풀이해 꺼내 든 도구에 가깝다. 체조가 곧 국가의 도구였다는 말이 낯설게 들릴 수 있지만, 근대 유럽에서는 꽤 익숙한 풍경이었다. 1806년 프로이센은 예나 전투에서 나폴레옹에게 크게 패했다. 이때 독일의 교육자 프리드리히 얀은 나라를 다시 세우려면 국민의 몸부터 단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1811년 베를린 교외에 야외 체조장을 열어, 청년들이 함께 뛰고 매달리며 몸과 민족의식을 같이 키우도록 했다. 얀은 ‘체조의 아버지’로 불리지만, 그의 체조에는 강한 민족주의가 깔려 있었다는 점도 함께 기억할 필요가 있다.

비슷한 시기 스웨덴에서는 페르 헨리크 링이 체조를 교육과 건강의 체계로 정리했고, 1813년 스톡홀름에 왕립 체조 중앙기관이 세워졌다. 1862년 프라하에서는 미로슬라프 티르시가 ‘소콜(Sokol)’이라는 체조 단체를 만들어, 합스부르크 제국 아래 놓인 체코인들이 몸으로 함께 모이는 자리를 열었다. 세 나라의 사정은 서로 달랐다. 다만 몸의 훈련을 개인의 건강에만 맡겨 두지 않고 공동체를 단단하게 하는 수단으로 삼았다는 점은 같았다.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이 메이지 시기에 유럽의 체조를 수입했고, 1928년에 새로운 형식을 내놓았다. 쇼와 천황 즉위 기념 사업으로 시작된 라디오체조다. 라디오체조의 특징은 멀리 떨어진 사람들에게 같은 시각에 같은 구령을 전달할 수 있었다는 데 있다. 공간은 흩어져 있어도 시간은 하나로 맞춰진다. 소련은 1920년대부터 노동 중 체조를 제도화했고, 중국은 건국 직후인 1951년 말 광파(廣播)체조 방송을 시작했다. 시행 방식과 범위는 달랐지만, 매체와 조직을 통해 체조를 널리 보급하려 했다는 점에서 맥락이 겹친다.

전쟁과 식민, 정변 같은 체제의 충격 이후에 국가는 반복해서 몸을 호출했다. 사람들의 몸이 같은 시각에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광경은, 말로 설득하는 것보다 빠르게 ‘하나의 나라’를 보여 주기 때문이다.

한국의 체조사는 이 이주의 경로 위에 있다. 국가기록원의 해설에 따르면, 식민지기에 보급된 라디오체조는 황국신민체조라 불리기도 했다. 해방 후에도 이 형식은 끊어지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3년 12월 30일 서울 시공관에서 새 국민보건체조 발표회가 열렸고, 이 체조는 이른 아침 라디오의 음악과 구령에 맞춰 하는 방식이었다. 동작은 달라졌지만 시행 방식이 일제기의 것과 비슷하다는 지적이 당시에도 있었다고 기록은 전한다.³

1961년에는 재건국민운동의 일환으로 10개 동작의 재건체조가 만들어졌다. 이후 공무원을 위한 체조와 1974년 새마을체조를 거쳐, 1977년 3월에는 12개 동작으로 구성된 국민체조가 학교와 각급 기관에 보급되었다. 귀에 익은 구령은 경희대 체육대학 교수였던 유근림의 목소리였고, 배경 음악은 김희조가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음악과 숫자에 맞춰 몸을 움직이는 이 짧은 순서는 학교와 일터의 하루에 공통의 리듬을 더했다. 누군가에게는 아침을 여는 준비 운동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운동장 흙먼지와 함께 남은 학창 시절의 기억일 것이다. 1999년에는 이를 대체하려는 취지로 새천년 건강체조가 개발되었다. 체조의 이름과 동작은 바뀌어도, 익숙한 구령을 들으면 다음 동작이 먼저 떠오르는 경험은 여러 세대가 공유하는 생활문화의 한 자락으로 남아 있을 듯하다.³

국민체조를 다시 들어 보면 구조가 선명하다. “국민체조 시~작” 하는 구령이 먼저 오고, 그 뒤에 음악이 깔린다. 목소리가 동작을 열고 닫는다. 구령은 개인의 감정보다 동작의 순서와 속도를 전달한다. 참여자가 동작을 고르거나 속도를 바꾸기는 어려운 형식이었다. 하나, 둘, 셋, 넷. 숫자는 동작을 세는 도구이면서, 이견이 끼어들 틈을 줄이는 장치이기도 했다. 다만 같은 숫자에 맞춰 움직였다고 해서 생각까지 같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학교에서는 이 목소리가 종소리와 겹쳤다. 종이 울리면 운동장에 모이고, 줄을 맞추고, 구령에 따라 팔을 벌려 옆 사람과 간격을 맞췄다. 앞뒤 줄도 가지런히 정돈했다. 몸은 자기 몸이면서 동시에 대열의 한 칸이 되었다. 여러 세대에 걸쳐 이런 훈련이 반복되었고, 그 경험은 학교 밖에서도 지시를 기다리거나 집단의 속도에 자신을 맞추는 습관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체조가 움직임의 동기화였다면, 국기하강식과 통행금지는 멈춤의 동기화였다. 이쪽의 작동 범위가 더 넓었다. 국가기록원의 설명을 따르면, 1966년의 한 지침은 국기에 대한 경례와 애국가 제창이 진행될 때 그 주변을 지나는 모든 사람과 차량도 일단 정지하여 예를 표하도록 규정했다. 정부기관 등의 국기하강식은 1976년부터 시행되었고, 주요 방송이 애국가를 내보내는 관행이 1980년대 후반까지 이어졌다. 1989년 1월에는 문공부가 20일 발표를 통해 23일부터 방송사의 애국가 방송과 영화관의 애국가 상영을 중단하도록 했다.⁴ 일상의 움직임을 멈추게 하던 저녁 애국가 방송이 이때 사라졌다.

밤에는 다른 소리가 있었다. 1945년 9월 미군정 아래서 시작된 야간통행금지는 1954년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1982년 1월 5일 밤 12시, 즉 6일 0시를 기해 대부분 지역에서 해제될 때까지 36년 4개월 동안 유지되었다. 해제된 곳은 국토 면적의 약 82%였고, 접적지역과 해안 일부 등은 1988년 1월 1일에야 풀렸다.⁵ 조선의 인정과 파루도 소리로 야간 통행의 허용과 금지를 알렸다. 두 제도의 성립 배경은 달랐지만, 소리가 밤의 문을 여닫았다는 점에서는 닮아 있었다.

이 소리들은 사람들의 하루에 공통의 경계를 그었다. 애국가가 들리면 잠시 걸음을 멈췄고, 통행금지 시각이 다가오면 귀가를 서둘렀다. 두 제도의 목적과 강제성은 달랐지만, 시계를 들여다보지 않아도 소리로 하루의 흐름을 가늠했다는 점에서는 닮아 있었다. 반복된 신호는 차츰 몸의 습관이 되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 순간을 함께 지키던 예절로, 누군가는 번거로운 제약으로 기억할 수 있다. 같은 소리를 들었다고 해서 같은 마음으로 멈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소리들이 남긴 것은 제도의 흔적과 더불어, 저마다 다르게 간직한 한 시대의 생활 감각이기도 하다.

함께 멈추는 일의 두 얼굴

이 소리들을 전부 ‘억압’으로만 보면 절반을 놓친다. 역사가 윌리엄 맥닐은 『Keeping Together in Time』(1995)에서, 인류가 오랜 시간 춤과 군사 훈련으로 집단의 결속을 만들어 왔다고 주장했다. 리듬에 맞춰 함께 움직이는 경험, 그가 ‘근육의 결속(muscular bonding)’이라 부른 이 경험이 개인의 경계를 느슨하게 하고 집단에 대한 소속감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는 에밀 뒤르켐이 『종교생활의 원초적 형태』(1912)에서 설명한 집합적 열광과 함께 살펴볼 만하다. 두 논의 모두 함께하는 경험이 개인의 감정과 소속감을 바꿀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⁶

한국전쟁과 분단 이후의 불안, 가난, 급속한 도시화 속에서 같은 박자는 어떤 이에게 소속감과 안정을 주었을 것이다. 다만 앞서 보았듯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박자를 맞춘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문제는 감각의 진위보다 박자의 소유권에 가깝다. 같은 동시성이 어떤 방법으로 주어졌느냐에 따라 연대가 되기도 하고 동원이 되기도 한다. 공자는 이 갈림길을 2,500년 전에 이렇게 짚었다.

道之以政,齊之以刑,民免而無恥;道之以德,齊之以禮,有恥且格。
(도지이정,제지이형,민면이무치;도지이덕,제지이례,유치차격。)
“법령으로 이끌고 형벌로 가지런히 하면 백성은 처벌을 면하려 할 뿐 부끄러움을 모르고, 덕으로 이끌고 예로 가지런히 하면 부끄러움을 알고 스스로 바로잡는다.”⁷

같은 대열이라도 형벌에 기댄 대열과 예에 기댄 대열은 다르다. 앞의 대열에서 사람들은 처벌을 면하려고 박자를 맞추고, 뒤의 대열에서는 박자의 이유를 알고 맞춘다. 한비자는 같은 문제를 권력의 쪽에서 보았다.

明主之所導制其臣者,二柄而已矣。二柄者,刑德也。
(명주지소도제기신자,이병이이의。이병자,형덕야。)
“현명한 군주가 신하를 이끌고 제어하는 수단은 두 자루의 칼자루일 뿐이다. 두 자루란 형(벌)과 덕(상)이다.”⁸

신호는 여러 사람이 함께 생활하기 위해 시간을 맞추는 약속이 될 수 있다. 학교 종은 수업의 시작과 끝을 알리고, 경보는 위험을 피할 시간을 마련해 준다. 같은 신호도 그 목적과 운영 방식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이유를 이해하고 따르는 사람도 있고, 오랜 습관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살펴볼 것은 신호의 존재 자체보다 그것이 공동생활에 어떤 도움을 주며, 사람들의 사정을 얼마나 헤아리는가일 것이다.

철학은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소리는 사라지지 않고 주인을 바꿨다

1961년 8월 베를린 장벽이 세워졌고, 1966년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다. 소련에는 노동 중 체조가 있었고, 동유럽에는 대규모 집단 체조 행사가 있었다. 냉전기 여러 나라에서 국가는 ‘일치된 몸’을 정치의 언어로 썼다. 서쪽에는 다른 형태의 시간 규율이 있었다. 미국과 서유럽의 공장은 테일러의 시간 연구와 포드의 컨베이어 속에서 노동자의 움직임을 분 단위로 쪼갰고, 학교는 종소리로 하루를 나눴다. 동기화의 문법은 이념의 경계를 넘어 산업 사회가 공유한 기술이었다.

그리고 1989년이 온다. 그해 1월 한국에서는 저녁 애국가 방송과 영화관의 애국가 상영이 중단되었고, 1월 1일부터 해외여행이 전면 자유화되었다. 같은 해 최초의 24시간 편의점이 문을 열었고, 11월에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⁹ 서로 다른 배경에서 일어난 이 사건들을 하나의 원인으로 묶기는 어렵다. 다만 나란히 놓고 보면, 국가가 일상을 통제하던 방식이 느슨해지고 소비와 서비스의 시간이 넓어지는 변화를 함께 살펴볼 수 있다. 밤이 열리자 새로운 시간표, 곧 영업시간이 들어섰다.

1999년 새천년건강체조가 개발될 때의 취지는 군대식·정형화된 동원형 체조에서 벗어나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기존 체조에 담긴 군대식·획일적 요소를 바꾸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³ 일상에서 국가가 정하던 박자가 줄어들자, 그 자리는 비어 있지 않고 다른 박자들이 채워 갔다.

2002년 6월의 거리 응원이 이 지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수백만 명이 같은 구호, 같은 박수 리듬으로 같은 시간에 움직였다. 형식은 단체 체조와 닮았지만 결정적으로 달랐다. 박자를 정한 쪽이 시민이었다. 자발적으로 참여한 공동의 리듬은 강요된 의식과 다르게 기억될 수 있다. 다만 축제 안에서도 참여의 압박이나 소외를 느낀 사람이 있었을 가능성은 남는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가 몸의 일치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두 번 겪었다는 사실은 드문 경험 자산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새로운 종소리 아래에 있다. 스마트폰의 진동과 알림음이다. 학교 종은 모두가 같은 시각에 들었지만, 알림음은 각자 다른 시각에 각자에게만 울린다. 동시성은 해체되었고, 멈춤의 신호는 개인화되었다. 플랫폼의 알림은 누가 어떤 기준으로 설계했는지 파악하기 어렵고, 그 기준을 바꾸라고 요구하는 절차도 이용자에게 충분히 열려 있지 않을 수 있다. 국가의 종은 항의할 대상이라도 있었다. 지금의 종은 책임을 묻는 길부터 찾아야 한다.

참여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받는 동시성은, 연대의 모양을 하고 있어도 동원에 가깝다. 국가의 종에서 플랫폼의 알림으로 주인이 바뀌어도 이 기준은 그대로 적용된다. 소리는 사라지지 않았고, 신호를 쥔 손만 눈에 덜 띄게 되었다.

함께 맞추던 시간, 앞으로 돌보아야 할 삶

종소리는 한국인에게 함께 멈추고 함께 움직이는 법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 경험을 이해하려면 종이 울리던 시대의 형편부터 돌아볼 필요가 있다.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었고, 끼니를 채우는 일과 고른 영양을 섭취하는 일 사이에는 적지 않은 거리가 있었다. 학교와 보건시설이 충분하지 않던 시절, 많은 사람의 건강을 어떻게 돌볼 것인가는 개인의 선택에만 맡겨 두기 어려운 과제였을 것이다.

그런 여건에서 특별한 기구 없이 운동장이나 일터에서 함께 할 수 있는 체조는 현실적인 선택이었을 법하다. 짧은 음악과 구령만으로 많은 사람에게 기본 동작을 전할 수 있었고, 따로 운동할 시간과 여유가 부족한 일상에 몸을 움직이는 틈을 마련할 수도 있었다. 가지런한 대열에는 획일적인 면이 있었지만, 그 안에서 몸을 펴고 숨을 고르던 사람들의 경험까지 하나의 의미로 묶기는 어려울 것이다.

학교 종 역시 수업과 휴식을 나누고, 많은 아이가 함께 배우는 하루를 운영하는 장치였다. 누군가는 종소리에 쫓겼겠지만, 누군가는 그 소리를 기다리며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을 맞았을 것이다. 같은 종 아래에서도 삶은 서로 달랐다. 당시의 시간표가 무엇을 요구했는지와 함께, 무엇을 제공했는지도 살펴야 하는 이유다.

물론 학교 종과 국민체조, 국기하강식과 통행금지를 같은 기준으로 평가할 수는 없겠다. 교육과 건강을 위한 신호, 공동체의 예절을 위한 의식, 이동을 제한하는 제도는 목적과 부담이 달랐다. 각각이 당시 어떤 필요에서 마련되었고, 그 필요에 비해 개인에게 얼마나 큰 제약을 주었는지 구체적으로 따져 보는 편이 역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시대의 사정을 헤아리는 일과 제도의 한계를 살피는 일은 함께 이루어질 수 있다.

오늘의 시간표에는 다른 과제가 놓여 있다. 먹거리의 부족을 걱정하던 사회는 영양의 불균형과 운동 부족도 함께 염려하게 되었고, 정해진 장소에 사람을 모으던 신호에 더해 어디서든 개인을 호출하는 알림이 일상에 들어왔다. 편리해진 만큼 충분히 쉬고 움직이며 한 가지 일에 집중할 시간을 확보하기는 오히려 어려워졌을 수도 있다. 이제 공동의 시간표가 돌보아야 할 것은 이런 삶의 조건까지 포함할 것이다.

앞으로 필요한 신호는 함께 배울 시간을 지키고, 위험을 알리며, 일과 휴식의 경계를 분명하게 해 주는 신호일 것이다. 같은 일정이 필요한 자리에서도 나이와 건강, 장애와 돌봄의 사정을 헤아릴 여지는 있어야 하겠다. 공동의 질서는 서로 다른 사람이 함께 살아갈 수 있을 때 더 오래 신뢰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난하던 시절의 시간표에는 함께 살아갈 기초를 서둘러 마련하려는 과제가 담겨 있었다. 오늘의 시간표에는 그렇게 넓어진 삶의 기회를 누구나 충분히 누리도록 돌보는 과제가 더해져야 할 것이다. 종이 울릴 때 모두가 얼마나 똑같이 움직이는가와 함께, 그 종소리 덕분에 사람들의 하루가 얼마나 나아지는가를 물을 수 있겠다.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시간의 품격도 그 대답 속에서 드러날 것이다.

종은 없어지지 않는다. 다만 지금은 누가 치는지 보이지 않을 뿐이다. 한 사회의 성숙은 종을 없애는 데서 오기보다, 누가 언제 종을 울릴지 함께 정하고 그 결정이 부당할 때 바꿀 수 있도록 하는 데서 드러난다.

그 종의 주인은 지금 누구인가. 바라보는 자의 기록은 그 물음이 놓인 자리를 멀리서 계속 적어 간다.


* 참고할 말씀: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 전도서 3:1

¹ Lewis Mumford, 『Technics and Civilization』(1934); E. P. Thompson, 「Time, Work-Discipline, and Industrial Capitalism」, 『Past & Present』 38호(1967).

² Michel Foucault, 『Surveiller et punir』(1975).

³ 국가기록원 기획 특집 「전 국민의 맨손체조 <국민체조>」 및 「국민체조」 주제 해설(theme.archives.go.kr); 연합뉴스 「’국민체조 시~작!’ 그 목소리…유근림 경희대 명예교수 별세」(2025. 3. 11.); 매일신문 「[권영재의 대구음악유사] 국민체조 시작」(2019. 4. 3.).

⁴ 국가기록원 「애국가의 내력」 및 「국기에 대한 맹세·애국가 방송 폐지」 해설(theme.archives.go.kr).

⁵ 국가기록원 「야간 통행금지 해제」 해설(theme.archives.go.kr).

⁶ William H. McNeill, 『Keeping Together in Time: Dance and Drill in Human History』(1995); Émile Durkheim, 『Les formes élémentaires de la vie religieuse』(1912).

⁷ 『論語』 爲政篇.

⁸ 『韓非子』 二柄篇.

⁹ 해외여행 자유화(1989. 1. 1.): The Korea Herald 1989. 1. 1.자 보도 및 후속 회고 기사; 24시간 편의점 도입(1989): 국가기록원 「야간 통행금지 해제」 해설.

© Watchman, 바라보는 자의 기록 (bara.watchmaninsight.com). 무단 전재 및 2차 창작 시 사전 동의 필요.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위로 스크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