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이 흔들릴 때, 사람들은 왜 한 핏줄에 기대는가

4세기 신라 내물왕이 북쪽 고구려를 상징하는 거대한 산맥을 응시하는 뒷모습. 발치에는 박, 석, 김 씨 세 성씨의 교대를 상징하는 세 개의 옥새 중 '김'씨 옥새만 빛나고, 배경에는 신기루 같은 황금 마립간 왕관이 투명하게 떠 있다. 역사 에세이용 초현실적 시네마틱 스틸.
홀로 선 내물왕의 시선이 머무는 곳: 북쪽의 거대한 그림자(고구려)와 발치에 흩어진 세 성씨의 옥새. 권력이 하나의 핏줄로 묶이던 전야의 풍경.

권력이 흔들릴 때, 사람들은 왜 한 핏줄에 기대는가

역사·철학 · 한국사 역사 시리즈 · 신라 4-②

356년, 신라의 왕좌에 김씨가 앉았다. 그리고 그는 다시 내려오지 않았다.

이사금이 사라진 자리

앞선 글에서 우리는 흘해왕의 죽음과 함께 박·석·김 세 성씨가 번갈아 왕위를 채우던 체제가 마지막 숨을 고르는 장면을 살펴보았다. 그 전야의 불안 뒤로 내물이라는 이름의 김씨 왕이 등장한다. 이 시기부터 신라의 왕좌는 김씨의 몫으로 고정되어 갔다. 흥미로운 점은 이 교체가 단순한 왕위 계승을 넘어 호칭 자체의 교체를 동반했다는 사실이다. 연장자나 현자를 뜻하던 오래된 호칭 “이사금(尼師今)”이 사라지고 “마립간(麻立干)”이라는 새로운 호칭이 등장한다. 학계에서는 이를 대군장, 즉 여러 우두머리 중 으뜸가는 자리를 뜻하는 말로 해석하곤 한다.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은 그 이름이 가리키는 권력의 성격 자체가 변했음을 암시하는 대목으로 읽을 여지가 있다.

같은 세기, 흔들리던 세 대륙

그러나 이 권력이 순전히 신라 내부의 힘만으로 지켜진 것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399년 왜(倭)와 백제의 연합 세력이 신라를 압박해오자, 내물왕은 북쪽의 고구려에 구원을 청했다. 이에 400년 광개토대왕은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이들을 격퇴했다. 이 사건은 신라를 위기에서 구했지만, 동시에 신라의 왕위 계승을 고구려의 영향권 안에 끌어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신라의 왕위는 단지 김씨 내부의 순수한 정통성만이 아니라 고구려와의 관계 속에서 결정되는 국면으로 넘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내부의 혈통을 하나로 결집하는 일과, 그 결집된 혈통이 외부 세력의 그늘 아래 놓이게 되는 현상은 어쩌면 동전의 양면이었을지 모른다.

같은 시기, 세계 또한 정확히 동일한 질문 앞에 서 있었다. 통일왕조 서진(西晉)은 291년부터 팔왕의 난(八王의 亂)이라는 황족들의 내전에 휩싸여 국력을 스스로 갈아 없앤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흉노족 출신 유연(劉淵)이 304년 한(漢, 훗날의 전조前趙)을 세우며 반란을 일으켰고, 311년에는 그의 아들 유총(劉聰)이 수도 낙양을 함락시켰다(영가의 난永嘉之亂). 서진의 마지막 황제 민제(愍帝)는 장안으로 옮겨가 저항했지만 316년 결국 항복했고, 이로써 서진은 완전히 멸망한다. 이후 화북 전역은 흉노·선비·갈·강·저, 다섯 이민족 세력이 저마다 왕조를 세우고 지우기를 반복하는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의 혼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서쪽의 로마 역시 비슷한 압박에 놓여 있었다. 훈족(Huns)에게 밀려난 서고트족이 376년 도나우강 국경에 몰려와 로마 영내로의 이주를 청했고, 로마는 이들을 받아들였지만 관리들의 부당한 대우와 기근이 겹치며 반란으로 번졌다. 378년 8월, 로마 황제 발렌스(Valens)는 이 반란을 진압하러 나섰다가 아드리아노플(Adrianople) 전투에서 대패했고, 그 자신도 전사하는 충격적인 결과를 맞는다. 이 패배 이후 로마는 밀려드는 게르만족을 무력으로 축출하는 대신 다른 길을 택했다. 382년, 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는 서고트족과 조약을 맺어 그들에게 ‘동맹군(포에데라티, Federati)’ 신분을 부여하고 제국 영토 안에 집단으로 정착시켰다. 대륙의 동쪽 끝과 서쪽 끝에서, 같은 4세기 안에 오래된 질서가 동시에 흔들리고 있었던 셈이다.

이 흔들림 앞에서 각 사회가 택한 해법은 갈렸다. 화북의 여러 정권은 짧은 기간에 왕조를 세웠다가 무너뜨리기를 반복했다. 정통성의 기반이 얇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로마는 이질적인 외부 세력을 제국의 틀 안으로 끌어들여 외연을 넓히려 했으나, 바로 그 틀 속에서 제국 자체가 조금씩 해체되어 갔다고 볼 수 있다. 신라는 세 성씨의 교대라는 오래된 균형 장치를 버리고 하나의 혈통에 왕좌를 묶었으나, 그 대가로 더 강한 이웃의 그늘을 받아들여야 했다. 세 갈래 길 모두 같은 질문에서 갈라져 나온 셈이다. 정통성이 흔들릴 때, 그 흔들림을 무엇으로 멈출 것인가.

세(勢)를 묻다

한비자는 「난세(難勢)」편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아무리 지혜로운 자라도 세(勢) — 즉 지위와 권세 — 가 없으면 어리석은 자조차 제압하지 못하지만, 평범한 자라도 세를 쥐면 뛰어난 자를 능가할 수 있다고 말이다. 세 성씨가 돌아가며 왕이 되던 이전의 체제는, 어느 누구도 이 ‘세’를 완전히 손에 쥐지 못했다는 정황으로 해석할 수 있다. 왕이 바뀔 때마다 신하들의 충성과 지방 세력의 복속을 처음부터 다시 구축해야 했을 가능성이 크다. 홉스는 이보다 천 년도 더 지난 뒤, 전혀 다른 대륙에서 비슷한 결론에 다다랐다. 그는 『리바이어던』에서 단일하고 절대적인 주권이 부재할 때, 사회는 각 세력이 생존을 다투는 사실상의 내전 상태로 분해될 수 있음을 경고했다. 확정되지 않은 권력은 권력이 아니라, 권력을 둘러싼 영구적인 다툼의 상태일지도 모른다.

철학은 모든 사건을 단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유사한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물을 뿐이다.

핏줄에 기대는 이유

내물왕이 택한 해법은 결국 권력을 나누어 갖는 방식에서 하나의 핏줄에 귀속시키는 방식으로의 전환이었다. 한 핏줄에 권력을 묶으면 계승의 규칙은 단순해진다. 다음 왕이 누구인가를 두고 세 성씨가 매번 경합할 필요도 사라진다. 이것이 안정처럼 보이는 이유는 실제로 어느 정도의 안정을 창출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안정에는 대가가 뒤따른다. 권력이 한 혈통에 귀속되는 순간, 그 혈통 바깥의 모든 이는 원천적으로 왕좌에서 배제된다. 귀족 연합체의 우두머리로 출발한 마립간의 권력은, 먼 훗날 혈통의 순수성으로 신분을 나누는 ‘골품’이라는 단단한 성벽의 기초가 되었을지 모른다. 안정과 배제는 결국 같은 결정이 지닌 양면성이었다.

여기서 패턴이 하나 드러난다. 질서가 흔들릴 때 사람들은 새로운 원리를 발명하기보다 이미 신뢰가 축적된 단위 — 즉 핏줄, 가문, 혈연 — 에 권력을 다시 묶으려 한다. 이는 단지 게으름 때문이 아니다. 완전히 새로운 정통성을 처음부터 설득해내는 비용보다, 이미 존재하는 신뢰의 단위를 확장하는 비용이 훨씬 낮기 때문이다. 오호십육국의 여러 정권이 짧은 흥망을 거듭한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새로 세운 나라에는 아직 그런 핏줄의 신뢰가 쌓여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라는 그 신뢰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아 결국 더 강한 이웃의 무력에 의존해야 했다. 흔들림의 폭이 클수록 사회는 낯선 새 원리보다 이미 검증된 핏줄을 택한다. 그리고 그 핏줄조차 버거워질 때는, 더 큰 힘에 기댄다.

이 패턴은 1,600여 년 전 신라에만 머물지 않는다. 위기 국면마다 유력 가문이나 특정 계보의 이름이 다시 호출되는 현상은, 새로운 능력보다 이미 검증된 이름에 대한 신뢰가 더 값싸게 거래되기 때문이라는 구조로 설명할 수 있다. 그 신뢰가 실제 능력을 반영하는지, 아니면 단지 익숙함이 만든 착시에 불과한지는 매번 다시 물어야 할 질문으로 남는다.

우리는 어떤 이름을 다시 부르는가

내물왕은 세 성씨의 균형이라는 오래된 장치를 걷어내고 하나의 혈통을 세웠다. 그 선택이 신라를 다음 세기의 도약으로 이끈 발판이었는지, 아니면 이후 골품제라는 더 단단한 벽을 세우는 첫 벽돌이었는지 역사는 아직 그 답을 확정해 주지 않는 듯하다.

이 질문은 1,600년 전의 경주에만 머물지 않는다. 지금 한국에서도 위기의 계절마다 낯익은 이름이 다시 호출되는 장면은 낯설지 않다. 대기업 오너 3세·4세의 경영권이 흔들릴 때 이사회가 결국 같은 혈족의 다음 세대를 찾아내는 장면, 정치권이 지지율의 위기 앞에서 신선한 얼굴보다 익숙한 계보·진영의 이름을 다시 꺼내드는 장면은 같은 구조 위에 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검증된 이름이 주는 안도감과, 그 이름이 가로막는 새로운 가능성 — 이 둘 사이의 저울질은 신라의 내물왕도, 오늘의 우리도 피해가지 못한 질문이다. 다만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분명하다. 지금 우리 사회가 흔들릴 때, 우리는 과연 어떤 이름을 다시 불러내고 있는가.


* 참고할 말씀: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 전도서 1장 4절
1. 이사금에서 마립간으로의 호칭 교체 시기와 그 정치적 의미는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 신라본기 관련 기록에 근거한다.
2. 399년 왜·백제 연합의 압박과 400년 광개토대왕의 신라 구원, 그리고 이것이 신라 왕위에 미친 영향은 광개토왕릉비문 및 관련 사료를 바탕으로 추론한 것이다.
3. 316년 서진의 멸망(민제의 항복)과 화북의 오호십육국 시대 전개는 위진남북조사 통사를 참조했다.
4. 378년 아드리아노플 전투 및 382년 테오도시우스 1세의 포에데라티 조약은 로마 후기사 통사를 근거로 한다.
5. 한비자의 세(勢) 개념은 『한비자』 「난세(難勢)」편의 논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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