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계자 없는 죽음이 왕조를 바꾸다

새벽 빛이 들어오는 신라 궁궐의 빈 나무 왕좌 팔걸이에 놓인 화려한 신라 금관
후계자 없는 공백의 순간 | 새벽 빛을 받으며 빈 왕좌에 홀로 놓여 있는 신라의 금관.

후계자 없는 죽음이 왕조를 바꾸다

흘해왕에서 내물왕으로 — 왕계 교체의 전야, 356년

2026.09.25 · 역사·철학 · 한국사 시리즈 4-신라-①


다음 차례를 묻는 순간

한 조직의 최고 자리가 갑자기 비면, 사람들은 보통 “누가 다음이냐”를 묻는다. 그런데 가끔은 그 질문 자체가 조직을 바꿔버린다. 정해진 순번대로 다음 사람이 올라가는 게 아니라, 순번이라는 규칙 자체가 통째로 교체되는 순간이 있다. 최근 한국의 여러 정당과 기업에서 반복되는 후계 구도 잡음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누가 이길 것인가”보다 “애초에 이걸 어떤 규칙으로 정할 것인가”를 둘러싼 싸움인 경우가 많다. 규칙이 흔들리는 순간이야말로 권력의 진짜 성격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1,700년 전 신라에서도 똑같은 일이 있었다. 다만 그때는 한 명의 죽음이 그 질문을 던졌다.

흘해왕의 마지막 봄

신라 16대 흘해 이사금은 석씨 왕실 출신이었다. 그가 왕위에 있던 4세기 초중반의 신라 왕실은 박씨·석씨·김씨 세 성씨가 번갈아 왕위를 이어온 특이한 구조였다¹ — 세습이 아니라 순환이었다. 왕이 죽으면 언제나 같은 집안의 아들이 잇는 게 아니라, 근친 관계와 정치적 역학에 따라 다른 성씨의 인물이 올라서기도 했다.

356년 음력 4월, 흘해 이사금이 후계자 없이 세상을 떠난다.² 뒤를 이은 것은 김씨인 내물이었다. 그는 미추 이사금의 조카이자 사위였고, 아버지 말구는 미추왕의 동생이었다. 혈연상 가장 가까운 근친이 왕좌에 오른 셈이었지만,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내물 이후로 박씨도, 석씨도 다시는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그는 재위 중 처음으로 ‘마립간’이라는 칭호를 사용했고, 낙동강 동쪽 진한 지역 대부분을 복속시키며 신라를 중앙집권 국가의 틀로 밀어 넣었다.³ 후계자가 없던 하루의 공백이, 이후 556년 동안 이어질 김씨 단독 세습의 시작점이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전환이 어느 날 선포된 개혁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삼국사기도 삼국유사도 “오늘부로 세습제로 바꾼다”는 문장을 남기지 않았다. 그저 흘해왕이 후계자 없이 죽었고, 가장 가까운 근친이 김씨였고, 그 김씨가 이후 강한 왕권을 쌓아 올렸을 뿐이다. 제도는 선언되지 않고, 사실로 굳어졌다.

지중해 반대편의 실험

같은 4세기, 지구 반대편 로마에서도 구조적으로 닮은 실험이 벌어지고 있었다. 293년,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한 사람이 감당하기엔 너무 커진 제국을 넷으로 나눠 두 명의 정제와 두 명의 부제가 나눠 다스리는 사분통치체제를 설계했다.⁴ 핵심은 혈통이 아니라 능력이었다 — 정제는 뛰어난 부제를 후계자로 지명해 자리를 물려주고, 그 부제는 또 다른 부제를 지명한다. 아들이 아니라 적임자에게 권력을 넘기려는, 세습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체제였다.

그런데 이 체제는 설계자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흔들리기 시작했다.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가 동시에 퇴위했을 때, 실제로 후계 다툼에 뛰어든 이들은 지명받은 부제들이 아니라 전임 정제들의 친아들 —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였다. 능력주의로 설계된 체제 안으로 혈통의 논리가 이미 비집고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자신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직 리키니우스와 제국을 나눠 다스리던 317년, 그는 자신의 두 아들 크리스푸스와 콘스탄티누스 2세를 나란히 부제에 앉혔다.⁴ 단독 통치자가 되기도 전에, 이미 다음 세대를 자기 혈통으로 채우고 있었던 셈이다.

그 흐름 속에서 324년, 콘스탄티누스는 마지막 경쟁자 리키니우스를 꺾고 로마의 유일한 통치자로 올라선다. 사분통치의 능력주의 원칙은 이제 완전히 걷혔다. 그는 337년 죽을 때까지 제국을 세 아들에게 나누어 물려주는 작업을 계속했고, 그 결과는 훗날 ‘콘스탄티누스 왕조’라는 이름으로 남았다.⁵

철학은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신라와 로마는 출발점이 달랐다. 흘해왕의 경우는 후계자가 없던 우연한 공백이었고, 로마의 경우는 능력주의를 표방한 제도가 설계자의 부재 앞에서 서서히 무너진 것이었다. 하지만 두 사례가 도착한 지점은 같다. 나눠 갖거나 돌아가며 갖던 권력이, 위기라는 계기를 통해 결국 한 혈통으로 수렴했다는 사실이다.

“抱法处势则治,背法去势则乱”
(포법처세즉치, 배법거세즉란)
“법을 지키며 권세를 유지하면 다스려지고, 법을 저버리고 권세를 버리면 어지러워진다.”
— 한비자, 難勢(난세)

한비자가 두려워한 것은 권세(勢) 그 자체가 아니라, 권세가 법 없이 방치되는 순간이었다. 신라와 로마가 같은 세기에 보여준 것도 다르지 않다. 문제는 빈자리를 채우는 방식이 사전에 준비된 설계도가 아니라, 위기의 순간에 가장 가까이 있던 혈연과 실력이라는 점이다.

위기가 규칙을 다시 쓴다

두 사례를 겹쳐 놓고 보면 하나의 패턴이 보인다. 순환이든 능력주의든, 권력을 나누거나 돌리는 체제는 평상시엔 안정적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후계자가 없는 공백이 발생하는 순간, 그 체제는 스스로를 지키지 못한다. 공백을 메우는 것은 애초의 설계 원칙이 아니라, 그 순간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혈연과 세력이다. 그리고 한번 그렇게 메워진 공백은 좀처럼 원래 형태로 돌아가지 않는다. 신라는 이후 556년간, 로마는 이후 제국이 끝날 때까지 각자의 방식으로 혈통 중심 체제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건 고대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날에도 정당이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리는 국면이나, 기업이 승계를 앞두고 지배구조를 개편하는 시점, 당헌·당규를 손보는 논쟁이 격화될 때마다, 실제로 싸우는 대상은 “누가 다음 자리에 앉느냐”가 아니라 “이걸 어떤 규칙으로 정할 것인가” 자체인 경우가 많다. 규칙이 흔들리는 시기에 우연히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나 세력이, 이후 오랫동안 그 조직의 기본값을 결정짓는다. 위기 속에서 만들어진 임시방편이 다음 세대에는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자리 잡는 것이다.

다음 차례는 누가 정하는가

흘해왕은 자신의 죽음이 300년 넘게 이어질 왕실 구조를 바꾸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도 자신이 사분통치의 이상을 끝낸 사람으로 기록되리라 계산하며 리키니우스와 싸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두 사건 모두 설계된 개혁이 아니라, 공백이 남긴 결과였다.

지금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후계 구도 다툼들도 언젠가는 “그때 그 규칙이 지금의 기본값이 되었다”는 문장으로 요약될지 모른다. 다음 차례를 정하는 규칙은, 어쩌면 늘 위기의 한복판에서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들에 의해 조용히 다시 쓰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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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이 사라진 그 짧은 공백 속에서, 다음 몇백 년의 규칙이 결정된다. 그것이 신라의 왕좌든, 로마의 옥좌든, 혹은 오늘 우리 곁의 어느 조직이든 — 멀리서 보아야 비로소 그 패턴이 보인다.

* 참고할 말씀: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 전도서 1:4

¹ 박·석·김 왕위 교대 체제와 내물 이후 김씨 세습 확립: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삼국사기·삼국유사 기반 통설

² 흘해 이사금의 사망과 내물 마립간의 즉위(356년 4월) 및 근친 관계: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³ 마립간 칭호 최초 사용 및 진한 지역 복속: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⁴ 디오클레티아누스 사분통치체제(293년 설계, 305년 퇴위 후 균열) 및 콘스탄티누스의 317년 아들 부제 임명, 324년 단독통치 확립: 위키백과 ‘콘스탄티누스 1세’, ‘리키니우스 2세’ 항목

⁵ 콘스탄티누스 사후 세 아들에게의 제국 분할 상속: 위키백과 ‘콘스탄티누스 1세’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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