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적을 잡으러 간 선장의 교수대

윌리엄 키드의 처형 이후를 상징하는 틸버리 곶의 교수대와 빈 철제 형틀, 노을 진 템스강을 지나는 17세기 범선 세 척
해적을 잡으라는 허가장을 받았던 선장의 마지막 자리. 윌리엄 키드 사건을 모티프로 재구성한 틸버리 곶의 풍경.

해적을 잡으러 간 선장의 교수대

윌리엄 키드와 위임된 폭력의 청구서

2026. 11. 05. · 카테고리: 바다 · 해적의 황금시대 12편 · Watchman


밧줄이 끊어진 뒤, 그는 한 번 더 매달렸다

1701년 5월 23일, 런던 동부 와핑의 템스강변 처형장에서 윌리엄 키드의 형이 집행되었다. 해사 법원이 선고한 형이었고, 집행 시각은 물이 빠져 강바닥이 드러난 저조 때였다고 전한다.¹ 키드는 술기운이 남아 있었다고 하며, 군중 앞에서 모든 선장은 자신의 최후를 교훈으로 삼으라고 말했다.

형이 집행되는 순간 밧줄이 끊어졌고, 키드는 땅으로 떨어졌다.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집행은 곧 다시 이어졌다.

해적을 잡으라는 국왕의 위임장을 받고 출항했던 선장이 해적으로 처형당했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헨리 에버리가 1695년 9월 무굴 제국의 순례선 간지 이 사와이를 약탈하고 사라지는 장면을 살펴보았다. 이번 글은 그 반대편, 곧 해적을 쫓으라고 보낸 국가의 선장이 국가에 쫓기는 몸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다.

국가가 고용한 선장은 언제 국가의 범죄자가 되는가? 이 질문은 하나를 더 데려온다. 국가가 허가한 폭력은 어디까지 합법이며, 그 경계를 넘었을 때 책임은 누가 지는가.

해적 사냥은 어떻게 투자 상품이 되었는가

키드는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뉴욕에 터를 잡은 상선 선장이었다. 1695년 8월 무렵 런던에서 뉴욕 식민지의 정계와 긴밀히 연결된 상인 로버트 리빙스턴이, 새 식민지 총독으로 내정된 벨라몬트 백작과 인도양 해적 문제를 의논했고, 두 사람은 이 계획을 실행할 선장으로 키드를 택했다.² 왕립해군만으로 광대한 항로의 해적을 단속하기에는 선박과 인력이 부족했다. 민간 선박에 나포 권한을 부여하면 비용은 투자자가 내고 성과는 왕실과 투자자가 나눌 수 있었다.

1695년 10월 10일의 계약에서 총비용 6,000파운드 가운데 5분의 1은 키드와 리빙스턴이 맡았다. 나머지는 벨라몬트가 끌어들인 휘그 정치인들, 곧 당시 국새관리관이던 존 소머스, 해군 장관 에드워드 러셀(1697년에 오퍼드 백작이 된다), 로미니 백작, 슈루즈버리 공작이 댔다.³ 왕실에는 나포 수익의 10분의 1을 바치기로 했고, 선원은 성과가 없으면 급료도 없는 조건으로 고용되었다. 수익이 투자금에 못 미치면 부족분은 키드와 리빙스턴이 메워야 했다. 세부 배분 비율은 자료마다 다르게 전해지므로 여기서는 적지 않는다.

키드에게는 문서가 두 장 주어졌다. 하나는 프랑스 선박을 공격할 수 있는 통상의 사략 허가장이고, 다른 하나는 국새를 찍어 해적과 약탈자를 체포해 법정에 세울 권한을 담은 특별 위임장이었다. 후원자들의 이름은 일반에 공개되지 않도록 감춰졌다. 이 계약에서 문서에 이름이 남는 사람과 힘을 가진 사람은 일치하지 않았다.

1696년 봄 플리머스를 떠난 어드벤처 갤리호는 대포 34문을 싣고 노로도 움직이는 배였다. 출항 직후 해군이 선원 20여 명을 강제 징집해 갔고, 뉴욕에서 급히 채운 선원 중에는 형편이 절박한 사내들이 많았다. 급료가 보장되지 않은 배에서 선장이 선원들을 붙잡아 둘 수단은 나포 수익에 대한 기대였다. 성과가 늦어질수록 그 기대는 선장을 압박했다.

1696년 9월 뉴욕을 떠난 배는 마다가스카르를 거쳐 인도양에 들어섰지만 잡을 해적선이 보이지 않았다. 1697년 10월 30일, 키드는 포수 윌리엄 무어와 다투다 쇠를 두른 양동이로 그의 머리를 내리쳤고, 무어는 이튿날 숨졌다. 키드는 훗날 선원들의 반란을 막으려다 벌어진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주장이 무어의 죽음에 대한 형사책임까지 없애 주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선장에게 선상 규율을 이유로 상당한 강제력이 허용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살인은 허용되지 않았다.

1698년 1월 30일, 키드는 마침내 큰 배를 만났다. 퀘다 머천트호였다. 400톤급이었고, 아르메니아 상인들이 빌려 쓰던 배였으며, 선장은 영국인이었다. 배에는 값비싼 인도산 직물과 금은 등이 실려 있었다고 전한다.

이 배에는 프랑스 동인도회사가 발행한 통행증이 있었다. 통행증은 이 배가 프랑스의 보호 아래 항해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증명서였다. 키드는 프랑스 깃발을 올려 상대를 안심시킨 뒤 접근해 나포했다.⁴

키드의 논리는 이랬다. 그의 사략 허가장은 전시에 프랑스 선박을 나포할 수 있도록 국가가 내준 허가였다. 그런데 이 배가 프랑스의 통행증을 지니고 있으니, 프랑스 쪽 배로 보고 나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통행증은 훗날 그의 재판에서도 가장 중요한 방어 논거가 된다.

다만 통행증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 나포가 적법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배를 빌린 사람들은 아르메니아 상인이었고, 선장은 영국인이었다. 화물의 이해관계는 인도 무굴 궁정과도 닿아 있었다.

게다가 시점이 나빴다. 몇 해 전 에버리가 무굴의 순례선을 약탈한 뒤, 인도에서 장사하던 영국 동인도회사는 무굴 측의 분노가 자신들에게 향할까 불안해하고 있었다. 키드의 나포는 그 민감한 사정과 정면으로 부딪혔다.

그해 4월 마다가스카르에서 선원 다수가 다른 해적 로버트 컬리포드 쪽으로 넘어갔고, 키드는 낡은 어드벤처 갤리호를 버리고 나포한 배로 갈아탔다. 해적을 단속하러 떠난 원정대는 선원 다수를 잃고 기존 선박마저 포기했다. 해체된 것은 배만이 아니라 원정대를 지탱하던 지휘 체계이기도 했다.

런던의 분위기는 그사이 달라져 있었다. 1698년 8월 무렵, 런던에는 키드가 해적질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닿았다. 해적을 잡으라고 보낸 배가 오히려 인도양의 상선을 습격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키드의 허가장은 프랑스 선박과 해적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으므로, 그가 이 범위를 넘어섰다는 의심이 나온 것이다.

게다가 이 배를 보낸 후원자들은 정부 요직에 있던 휘그당 정치인들이었다. 키드가 정말 해적이 되었다면, 그를 보낸 사람들도 정치적 곤경에 빠질 수 있었다. 이런 사정들이 겹치면서 정부는 키드와 거리를 두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어느 한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1698년 12월 8일, 윌리엄 3세는 희망봉 동쪽의 해적들에게 투항하면 사면해 주겠다는 포고를 냈다. 해적을 줄이려는 일종의 회유책이었다. 그런데 이 사면에서 이름이 적힌 채 제외된 사람이 둘 있었다. 헨리 에버리와 윌리엄 키드였다.⁵ 국가가 키드를 사실상 ‘용서받을 수 없는 해적’의 자리에 올려놓은 셈이다.

키드는 카리브해에 도착해서야 이 사실을 알았다. 자신이 수배자가 되어 있었다. 그는 후원자 벨라몬트가 총독으로 있는 뉴잉글랜드로 향했다. 자신을 보낸 사람들이 사정을 이해해 줄 것이라 기대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1699년 보스턴에서 그를 기다린 것은 벨라몬트의 체포였다.

키드는 런던으로 이송되어 뉴게이트 감옥에서 한 해를 넘겼다. 그사이 영국 의회에서는 휘그당의 라이벌인 토리당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토리당은 키드를 법정에 세우는 일보다, 그를 보낸 휘그 귀족들을 공격할 재료로 삼는 일에 더 관심이 있었다고 전한다.

재판은 1701년 5월 8일과 9일에 열렸다. 혐의는 무어 살인, 그리고 해적 행위 다섯 건이었다. 키드가 프랑스 통행증을 근거로 합법을 주장한 해적 혐의에서, 정작 그 통행증은 증거로 제시되지 않았다. 그는 서류를 벨라몬트에게 보냈고, 서류는 정부 문서 속에 남아 있다가 200년이 넘게 지난 뒤 다시 확인되어 1911년 달튼의 저서 부록에 실렸다.⁶ 왜 법정에 오르지 못했는지는 기록만으로 단정하기 어렵다. 증인석에는 이해관계가 얽힌 전 선원 두 사람이 섰다. 많은 역사가가 이 재판의 공정성에 의문을 제기하지만, 이것이 키드의 결백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인도 연안에서 현지 상선을 나포한 행적과 약탈품 분배의 문제도 기록에 남아 있다.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선원 다비 멀린스의 변론이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그는 국왕의 허가장 아래에서 복무했으므로 선장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약탈품을 나누고 선원들이 거듭 반란을 일으킨 사실을 들어, 이 항해가 허가장의 규율 아래 있지 않았다고 판단했다고 전한다.⁷ 함께 유죄를 받은 선원 대다수가 집행 직전 사면을 받았지만 멀린스는 그러지 못했다.

빌려준 칼, 거둬들이는 칼 — 베버와 한비자와 사마천

1695년 10월의 계약서는 국가가 폭력의 일부를 민간에 맡기되 허가라는 틀을 씌운 문서였다. 베버는 1919년 뮌헨 강연에서 국가를 이렇게 정의했다.

“국가란 일정한 영토 안에서 정당한 물리적 폭력 행사의 독점을 (성공적으로) 요구하는 인간 공동체이다.”
— 막스 베버, 「직업으로서의 정치」(1919)⁸

베버의 정의를 빌리면, 쟁점은 민간인이 폭력을 행사했느냐보다 그 권한을 누가 부여하고 통제했느냐에 있다. 사략 허가장은 독점을 포기한 문서가 아니라 독점의 틀 안에서 폭력을 위탁하는 문서였다. 이런 구조에서 위탁받은 쪽의 행위가 허가의 범위 안에 있는지를 판정하는 권한은 위탁한 쪽에 남는다. 1698년 12월 포고문에 키드의 이름이 오른 순간은, 이 글의 해석으로는 그 판정이 키드에게 불리한 쪽으로 기운 시점이다.

폭력을 빌려주고 거두는 일을 군주의 통치술로 정리한 글은 동아시아에도 일찍부터 있었다.

明主之所導制其臣者,二柄而已矣。二柄者,刑德也。
(명주지소도제기신자,이병이이의。이병자,형덕야。)
“밝은 군주가 신하를 이끌고 제어하는 수단은 두 자루의 칼자루뿐이다. 두 자루란 형(刑)과 덕(德)이다.”
— 『한비자』「이병(二柄)」⁹

한비자의 이병론에 비추어 보면, 허가와 수익의 약속은 포상의 수단으로, 처형은 처벌의 수단으로 대응시킬 수 있다. 한비자의 계산에서 두 칼자루는 한 사람의 손에 있어야 하는데, 키드에게 허가장을 준 손과 그를 교수대에 세운 손은 같은 국가였다. 다만 한비자가 말한 것은 군주와 신하의 관계이고, 키드 사건과의 대응은 비교를 위한 것이다.

蜚鳥盡,良弓藏;狡兔死,走狗烹。
(비조진,양궁장;교토사,주구팽。)
“날던 새가 다하면 좋은 활은 거두어지고, 약삭빠른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는 삶긴다.”
— 사마천, 『사기』「월왕구천세가」¹⁰

범려의 경고는 키드 사건의 원인을 설명하기보다, 권력에 기여한 사람이 그 권력의 보호까지 보장받는 것은 아니라는 질문을 던진다. 오래전에 비슷한 위험을 경고한 글이 있었다는 정도로 받아들이는 편이 정확하다.

철학은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이익을 나눈 사람들, 책임을 진 사람들

이 사건에서 위임의 정당성이 흔들렸을 때, 책임은 현장의 선장에게 먼저 도착했다. 정치학자 재니스 톰슨이 『용병, 해적, 주권자』에서 정리했듯, 폭력의 민간 위탁이 국가의 독점으로 흡수되는 과정은 근대 초 바다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¹¹ 키드는 국가 권력과 민간의 무력이 복잡하게 얽혀 있던 시대의 인물이었다.

두 번째 패턴은 서류다. 해적과 사략선장의 경계에는 허가장의 존재뿐 아니라 나포 대상, 행위의 범위, 적법한 심판 절차가 함께 놓여 있었다. 그 경계를 다툴 핵심 문서가 법정에 없을 때, 선장은 허가장의 보호를 입증할 길을 잃는다. 키드 사건은 그 장면을 보여 준다. 멀린스의 사례에서는 허가장이 책임을 묻는 근거로 쓰였을 뿐, 책임을 덜어 주는 근거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세 번째는 책임의 배분이다. 후원자의 결정과 현장 지휘관의 책임은 재판에서 다르게 다루어졌다. 후원자 가운데 소머스는 1701년 별도의 사유로 하원의 탄핵 소추를 받았으나 상원이 무죄로 판단했고,¹² 후원자 중 누구도 키드와 같은 형사책임을 지지는 않았다. 이 사정들을 하나의 의도로 묶어 설명하기는 어렵다. 다만 이익을 나눈 사람과 책임을 진 사람이 일치하지 않았다는 점은 기록이 보여 준다.

키드의 해적 행위를 어떻게 평가할지와 그가 공정한 재판을 받았는지는 구분해서 물어야 한다. 범죄의 책임이 있다고 해서 부당한 재판이 정당화되는 것도, 재판이 불공정했다고 해서 모든 행위가 정당해지는 것도 아니다. 두 질문이 하나로 뭉쳐 온 것이 300년 가까운 논쟁의 한 이유로 보인다.

오늘날의 민간 군사·안보 위탁을 이 사건과 곧바로 동일시하기는 어렵다. 다만 권한의 범위, 현장 감독, 위법 행위에 대한 발주자의 책임은 함께 검토할 수 있는 질문이다.

처형 이후의 이야기도 이 구조와 무관하지 않다. 닫으려던 사건에는 닫히지 않은 구멍이 남았다. 끊어진 밧줄, 법정에 오르지 못한 서류, 이름을 감춘 후원자들, 그가 숨겼다고 전해지는 보물이다. 이 구멍들이 훗날 ‘억울한 자유인’과 ‘묻힌 보물’의 이야기가 된다. 로망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이 시리즈의 마지막 편이 다룰 주제다.

분노를 부른 정치의 청구서는 어디로 가는가

키드의 시신은 쇠사슬에 매달린 채 틸버리 곶에 내걸렸고, 강을 오가는 선원들에게 경고가 되었다. 그러나 그 형벌만으로 모든 책임이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현장에서 폭력을 행사한 사람의 책임과 그에게 권한을 주고 수익을 나누기로 한 사람들의 책임은 함께 물어야 할 질문으로 남는다.

2026년 10월 17일, 프랑스 전역의 약 110곳에서 생활비와 공공서비스 문제를 내건 행진이 열렸고, 일부 도시에서는 경찰과의 충돌과 방화, 상점 약탈이 벌어졌다.¹³ 같은 날 이탈리아 밀라노와 볼로냐에서도 생활비 부담을 내건 시위가 충돌로 번졌다.¹⁴ 대체로 평화롭게 진행된 집회까지 폭력으로 묶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정당한 요구가 타인의 생계와 안전을 파괴할 권리까지 주는 것도 아니다. 깨진 상점 유리창 앞에서 생계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구호는 모순에 부딪힌다. 그 유리창 안쪽에도 생계를 지키던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 정치도 이 질문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상대 진영을 함께 살아갈 경쟁자보다 제거해야 할 위협으로 그리는 정치가 깊어질수록, 지지자들은 타협을 배신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정치적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다는 진단 앞에서 살펴야 할 것은 상대의 과격함만이 아니다. 자기편의 분노를 키우는 말로 무엇을 얻고 있는지도 물어야 한다.

오늘의 시위를 키드가 받은 국가의 위임장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정치인의 선동이나 묵인이 있었는지도 구체적인 증거로 판단해야 한다. 다만 분노가 표와 영향력으로 돌아올 때는 시민의 목소리라 치켜세우고, 폭력으로 번진 뒤에는 개인의 일탈이라며 물러서는 정치가 있다면 그 책임을 현장의 행위자에게만 남겨 두기는 어렵다. 국가 역시 질서 회복을 명분으로 정당한 집회의 자유를 침해했다면 그 권한 행사에 책임을 져야 한다.

민생을 내건 폭력이 타인의 민생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내건 정치가 자기편의 폭력 앞에서 말을 흐린다면, 먼저 따져 물어야 할 것은 그 명분의 정직함이다. 돌을 던진 손에는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 돌을 정의의 도구로 포장한 말이 있었다면, 그리고 분노가 커질수록 이익을 얻은 정치가 있었다면, 그 몫의 정치적 책임도 따로 물어야 한다. 법적 책임과 정치적 책임은 같지 않지만,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지워 주지는 않는다.

위임된 폭력의 청구서가 언제나 칼을 쥔 사람에게만 도착한다면, 칼을 쥐여 주는 권력은 배울 이유가 없다. 바라보는 자의 기록은 교수대 아래에서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누가 폭력을 행사했는가. 그리고 누가 그 폭력에서 이익을 얻고도 책임 밖에 서 있는가.


* 참고할 말씀: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어다’ — 시편 146:3


¹ “Execution of Captain Kidd”, History Today. 처형 장소(와핑의 Execution Dock), 저조 시각, 밧줄이 끊어진 사실, 키드가 군중에게 남긴 말.

² Robert C. Ritchie, Captain Kidd and the War against the Pirates (Harvard University Press, 1986). 리빙스턴·벨라몬트의 구상과 키드의 합류.

³ Cornelius N. Dalton, The Real Captain Kidd: A Vindication (William Heinemann, 1911): 총비용 6,000파운드 중 5분의 1을 키드와 리빙스턴이 부담, 왕실 몫 10분의 1, 투자금 부족분의 보전. 후원자들의 직책은 John Somers 항목(Encyclopaedia Britannica)과 “Edward Russell”, The History of Parliament 참조. 후원자 익명 처리는 Ritchie 위 책.

⁴ “A rough deal for Captain Kidd”, The National Archives (UK) 블로그. 퀘다 머천트호 나포, 프랑스 통행증.

⁵ “1698: Pardoning Piracy” (1698년 12월 8일 포고문), The Statutes Project.

⁶ Dalton, 위 책, 부록 C(프랑스 통행증). 달튼의 책은 키드의 명예 회복을 목적으로 한 저작이므로 본문에서는 부록에 수록된 문서만 사실 근거로 사용하고 저자의 논조는 근거로 삼지 않았다. 재판 전반은 “Captain Kidd, Hanged”, EBSCO Research Starters.

⁷ The Arraignment, Tryal, and Condemnation of Captain William Kidd, for Murther and Piracy (London, 1701) 및 18세기 재판 기록 모음. 멀린스의 변론과 재판부의 답변, 집행 결과는 “Execution of Captain Kidd”, History Today 참조.

⁸ Max Weber, “Politik als Beruf” (1919). 한국어 번역본마다 표현이 조금씩 다르다.

⁹ 『한비자(韓非子)』「이병(二柄)」.

¹⁰ 『사기(史記)』「월왕구천세가(越王句踐世家)」, 범려가 문종에게 보낸 글.

¹¹ Janice E. Thomson, Mercenaries, Pirates, and Sovereigns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4).

¹² “John Somers, Baron Somers”, Encyclopaedia Britannica.

¹³ “France student protest living costs”, The Boston Globe (2026.10.17). 약 110곳 행진, 생활비·공공서비스 요구, 파리·리모주 등에서의 방화와 상점 약탈, 전국 약 400명 체포(내무부 장관 발표 기준).

¹⁴ “Italian police clash with protesters in Milan and Bologna”, ThePrint (2026.10.17). 생활비 부담에 항의한 밀라노·볼로냐 시위와 경찰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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