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을 먼저 정한 나라
지증왕, 503년의 호명(呼名)과 신라의 살림
2026년 11월 4일 · 역사 – 한국사 · 5부 재편기(A.D. 475~660) “살아남는 자의 전략” · 5-신라-① · 500~514년
지증왕 업적은 전투가 아니라 장부였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660년 사비가 무너지는 장면을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시계를 160년 전으로 돌려, 지증왕이 즉위한 신라로 돌아간다. 끝에서 시작을 보면, 시작이 달리 보인다.
500년, 신라의 소지 마립간이 왕위를 이을 후계자 없이 죽었다. 왕위는 재종동생에게 넘어갔고, 그의 나이는 예순넷이었다.¹
『삼국사기』는 이 사람을 한 줄로 묘사한다. 체격이 매우 컸고, 담력이 남보다 셌다. 이름은 지대로, 혹은 지도로, 혹은 지철로.
한 사람의 이름이 세 가지로 적힌 것은 신라말의 고유한 소리를 한자로 옮겨 적던 사정을 떠올리게 한다. 국호와 왕호의 정비 역시 이러한 언어적 배경과 함께 살펴볼 만하다.
지증왕(智證王)은 500년에 즉위해 514년, 재위 15년에 죽었다.² 교과서가 요약하는 지증왕 업적은 국호 신라, 왕호 왕, 우경, 순장 금지, 우산국 복속으로 이어진다. 이 글은 그 목록을 순서로 다시 읽는다.
후대의 정복 군주들에 비하면, 지증왕의 기록에는 전투보다 제도를 정비한 일이 두드러진다. 삼국사기의 해당 권을 펼치면 문장이 건조하다. 겨울에 얼음을 저장했다, 시장을 열었다, 함정을 설치해 맹수의 피해를 없앴다, 서리가 내려 콩이 죽었다. 연대기라기보다 장부에 가깝다.
나는 이 건조한 기록에서 신라가 나라의 기틀을 다져 간 방식을 읽는다. 그리고 읽는 순서가 중요하다. 신라는 대규모 팽창에 앞서 이름과 단위부터 정비했다. 이 글은 그 순서에 대한 이야기다.
여기서 ‘먼저’는 모든 개혁에 앞섰다는 뜻이 아니라, 후대의 팽창에 앞섰다는 뜻이다. 이 점은 아래의 연표에서 확인한다.
강한 이웃 사이의 신라, 권위의 언어를 바꾸던 세계
5부의 출발점은 475년이다. 고구려가 한성을 함락하고 백제 개로왕이 죽은 해. 이후 백제는 웅진으로 내려갔고, 한반도의 무게중심은 북쪽의 고구려로 크게 기울었다.
지증왕이 즉위한 500년 무렵 고구려는 문자명왕의 시대였고, 백제는 이듬해 무령왕이 즉위하며 웅진 체제를 추스르는 중이었다.
신라는 어디에 있었는가. 삼국 가운데 고대국가의 외형을 가장 늦게 갖춘 쪽으로 평가되는 나라다. 5세기 초 고구려의 군대가 신라 영토 안에서 움직인 적이 있고, 이후 신라는 백제와 손을 잡는 나제동맹(433)으로 버텼다. 소지왕 때인 493년에는 백제와 혼인으로 관계를 다졌다. 강한 이웃 사이에서 살아남는 법을 몸으로 익힌 나라였다.
이 나라에는 이미 사라·사로·신라 같은 이름이 있었다. 부족했던 것은 이름 그 자체가 아니라 이름의 통일이었다. 군사력을 키우는 데에는 오랜 시간과 자원이 필요하다. 국호와 왕호의 정비는 다른 방식으로 국가의 위상을 드러내는 일이었을 것이다.
지증왕의 15년을 한반도 안에서만 보면 작은 개혁으로 보인다. 시야를 넓히면 비교해 볼 만한 변화들이 보인다. 같은 시기 다른 지역에서도 지배자의 권위를 새로운 언어와 형식으로 드러내려는 변화가 나타났다.
북위의 효문제는 494년 수도를 평성에서 낙양으로 옮겼고, 490년대 내내 선비족의 언어와 복식을 금지하고 성씨를 중국식으로 고치는 정책을 밀어붙였다. 황실의 성이 탁발에서 원(元)으로 바뀐 것이 이때다.
서쪽에서는 서로마가 476년에 사라진 뒤, 이탈리아에 동고트의 테오도리크가 493년에 자리를 잡았다. 갈리아에서는 프랑크의 클로비스가 가톨릭으로 개종했다(연대는 496년께로 보는 견해와 그 이후로 보는 견해가 갈린다). 508년 무렵 클로비스는 동로마 황제 아나스타시우스로부터 집정관 칭호를 받았다.
남조에서는 502년, 소연이 양(梁)을 세웠다. 무제의 시대다. 훗날 법흥왕 때인 521년, 신라는 백제 사신을 따라 양에 사신을 보낸다. 지증왕 이후의 일이다.
선을 분명히 긋는다. 지증왕이 북위나 프랑크의 일을 알고 따라 했다는 증거는 없고, 이 글은 영향 관계를 주장하지 않는다. 세 곳의 배경과 성격도 전혀 다르다. 그래도 나란히 놓고 읽으면 한 가지 패턴이 보인다.
힘이 자라는 정치 세력은 기존 권위의 언어를 받아들여 자신의 지위를 새로 쓴다.
북위는 의관과 성씨를 고쳤고, 프랑크는 집정관 칭호를 받았고, 신라는 ‘마립간’이라는 토박이 칭호 대신 ‘왕’이라는 한자어 칭호를 택했다. 호칭은 안으로는 질서를, 밖으로는 자격을 선언하는 도구다. 그리고 그 선언이 공허하지 않으려면 뒷받침이 따라야 한다.
철학은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503년의 호명, 그리고 이름 앞뒤로 붙은 살림
지증왕 4년(503) 겨울 10월, 신하들이 아뢰었다. 『삼국사기』가 전하는 상주문의 요지는 이렇다.¹
첫째, 나라 이름이 정해지지 않았다. 사라, 사로, 신라 등이 섞여 불리고 있다. 신하들은 ‘신(新)’을 덕업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으로, ‘라(羅)’를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으로 풀어 ‘신라’로 확정하자고 했다.
둘째, 건국 이래 오랫동안 임금의 칭호를 방언으로만 불러 왔다. 이제 ‘신라국왕’이라는 칭호를 올린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지증왕 즉위 기사 끝에 붙은 사론이 있다. 이 사론은 신라 왕의 호칭을 거서간 하나, 차차웅 하나, 이사금 열여섯, 마립간 넷으로 헤아린다(이 집계는 『삼국유사』 남해왕조에도 인용된다. 집계 방식이 오늘의 왕계 구분과 정확히 맞아떨어지지는 않을 수 있다).
호칭의 변화는 왕권의 성격과 지배 질서가 달라지는 과정과 관련지어 살펴볼 수 있다. 김부식은 이 다양한 호칭을 지우지 않고 남기는 쪽이 옳다고 논평했다. 고유한 호칭을 보존하려는 사관의 태도도 이 대목에서 엿보인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기록의 형식이다. 기록은 이 결정을 신하들이 건의하고 왕이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전한다. 기록된 형식과 실제 의사 결정 과정은 구별해서 읽어야 한다. 다만 큰 결정을 이런 형식으로 서술했다는 점은 왕과 신하의 관계를 보여 주는 단서가 된다.
다른 하나는 호칭의 병존이다. 503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는 포항 냉수리 신라비에는 지증이 ‘지도로 갈문왕’으로 나온다.³ 삼국사기가 국호와 왕호의 정비를 적은 바로 그 해의 금석문에 다른 호칭이 보이는 것이다. 524년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서 법흥왕이 ‘매금왕’으로 표기된다는 점도 함께 놓아야 한다.
문헌의 정비 기사와 금석문의 다양한 호칭을 함께 보면, 당시의 변화를 단 한 차례의 명칭 교체로 설명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학계의 해석도 갈리며, 여기서는 두 기록의 병존을 짚어 두는 데서 멈춘다. 그 병존이 가리키는 패턴은 분명하다.
이름은 선포의 날에 끝나지 않는다. 새 이름은 청구서처럼 그에 걸맞은 제도를 요구하고, 제도가 채워지는 만큼 굳는다.
지증왕 대의 나머지 기록은 이 요구가 어떻게 구체화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자료로 읽을 수 있다. 연도 순으로 놓으면 이렇다.
| 연도 | 기록 | 읽는 법 |
|---|---|---|
| 502 | 순장을 금지함. 이전에는 왕이 죽으면 남녀 각 5명을 함께 묻었다 | 왕의 죽음에 다른 사람을 순장하지 않도록 한 조치 |
| 502 | 주·군에 농사를 권하고 처음으로 소를 이용한 밭갈이(우경)를 시행 | 농업 생산 기반의 정비 |
| 503 | 국호 ‘신라’, 왕호 ‘왕’ 확정 | 이름 |
| 504 | 상복법을 제정해 반포 | 의례의 규격화 |
| 505 | 주·군·현을 정하고 실직주(삼척)를 두어 이사부를 군주로 삼음 | 지방 통치 단위의 정비 |
| 505 | 얼음을 저장하는 제도, 선박 이용 제도 | 저장과 운송 |
| 509 | 수도에 동시(東市)를 둠 | 유통 |
| 512 | 이사부가 우산국을 복속 | 외곽 영역의 편입 |
| 514 | 아시촌에 소경을 두고 6부와 남쪽 지역 사람들을 이주시킴. 왕이 죽고 ‘지증’의 시호를 받음. 신라 시호법의 시작 | 지방 통치 거점의 마련, 그리고 죽음의 이름 |
동시의 연대에는 기록 간 차이가 있다. 신라본기는 509년으로, 직관지는 시장을 감독하는 동시전을 508년으로 적는다.⁴
이 표에서 순서를 보자. 가장 앞에 있는 것은 순장 금지와 우경이다. 502년, 이름을 정하기 한 해 전이다. 그래서 “이름부터 정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름의 정비는 살림의 정비와 앞뒤로 맞물려 진행되었다.
순장 금지의 직접적인 동기는 기록만으로 확정하기 어렵다. 불교의 영향을 보는 설명도 있고, 농업 노동력의 확보와 연결해 보는 설명도 있다. 다만 왕의 장례를 위해 다른 사람의 생명을 희생시키던 관행을 금지했다는 의미는 살펴볼 만하다. 이 조치는 적어도 기록상으로는 왕의 죽음에 뒤따르던 인명 희생을 금지한 변화였다.
그 뒤로 항목들이 이어진다. 농업, 저장, 운송, 시장, 지방 행정. 이 정비들은 국가 운영의 여러 기반을 함께 다져 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이름과 살림은 따로 가지 않았다.
512년 6월, 이사부가 우산국, 지금의 울릉도를 복속시킨다. 『삼국사기』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하슬라주(지금의 강릉 일대)의 군주 이사부는 우산국 사람들을 거칠어서 굴복시키기 어려운 상대로 판단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나무로 사자 모양을 여럿 만들어 전선에 나누어 싣고 우산국 해안에 닿았다. 그리고 선언했다.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들을 풀어 밟아 죽이겠다. 우산국 사람들은 두려워 항복했고, 이후 해마다 토산물을 바쳤다.
이 장면에서 군사적 사실을 얼마나 읽어낼 수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설화적 윤색이 섞였을 가능성은 충분하고, 사자라는 동물이 한반도에 서식하지 않는다는 점도 이 이야기를 읽을 때 한 번은 걸린다. 이 이야기는 무력 충돌보다 위세를 드러내 상대를 굴복시킨 지략을 강조한다. 신라가 자기 성공을 어떻게 기억하고 싶어 했는지를 알려 주는 대목이다.
국호의 정비와 나무 사자를 같은 전략으로 볼 수는 없다. 하나는 국가 제도의 일이고 다른 하나는 군사적 위협이다. 그러나 두 사례는 권위를 드러내는 형식이 실제 행동과 결합한다는 점에서 한 줄에 놓고 비교해 볼 만하다.
힘을 쓰기 전에 위세를 먼저 세우는 방식은 힘을 아끼는 방식이기도 하다. 다만 위세가 오래 가려면, 그것을 뒷받침할 제도와 역량이 따라와야 한다. 신라는 이 방식을 이후 여러 차례, 더 큰 판에서 반복한다. 그 이야기는 앞으로의 편에서 하게 될 것이다.
이어달리기가 보여 주는 살아남는 자의 순서
지증왕은 514년에 죽었다. 나이로는 일흔여덟쯤이다. 그가 정한 이름과 만든 단위는 그의 시대에 완성되지 않았다.
이어서 즉위한 아들 법흥왕은 517년에 병부를 두고, 520년에 율령을 반포하고 관리의 공복과 위계를 정했다. 520년대 후반에는 불교를 공인하고, 532년에는 금관가야를 병합하고, 536년에는 독자 연호 ‘건원’을 쓴다. 법흥왕 대에는 군제와 법제, 종교 정책이 정비되며 지증왕 대의 변화가 다른 영역으로 이어졌다.
그다음이 진흥왕이다. 진흥왕은 545년 『국사』 편찬을 건의받아 신라의 기억을 기록으로 세우고, 551년 한강 상류, 553년 한강 하류를 차지한다. 이 사이를 잇는 인물이 이사부다. 505년 실직주 군주로 처음 이름이 나오는 그는 진흥왕 대에도 활동한다.
세 임금과 한 장군의 이어달리기를 놓고 보면, 신라의 속도는 한 사람의 속도가 아니었다. 그의 시대에 마련된 제도 가운데 상당수는 다음 세대의 국가 운영 기반이 되었다.
5부의 부제는 “살아남는 자의 전략”이다. 지증왕 대는 이 전략의 원형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보여 준다. 정리하면 세 문장이다.
첫째, 신라는 팽창에 앞서 이름과 경계와 살림을 정비한 나라다. 호칭, 지방 단위, 농업·저장·유통이 먼저 갖춰지고 대규모 팽창은 그 뒤에 온다. 법흥에서 한 번(율령, 불교 공인, 가야 병합), 진흥에서 한 번(국사 편찬, 한강 확보) 같은 순서가 반복된다. 반복되는 순서는 우연이 아니라 방식이다.
둘째, 약한 쪽은 위세를 앞세워 힘을 아낀다. 칭호, 상주문의 형식, 나무 사자. 모두 실제의 힘에 앞서 힘의 모양을 먼저 세운다. 이 방식은 효율적이고 위험하다. 모양을 세운 쪽은 모양에 걸맞은 실체를 따라 만들어야 하고, 그러지 못하면 이름만 남기 때문이다. 신라는 따라 만들었다.
셋째, 나이 든 왕이 도구를 놓고, 다음 세대가 그 도구로 일한다. 예순넷에 즉위한 왕에게 15년 남짓은 길지 않았다. 그러나 이름과 단위는 한 세대가 쓰고 끝나는 물건이 아니라, 몇 세대가 쓰는 물건이다.
660년의 결과를 지증왕 대의 개혁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장면이 화려했던 쪽과 순서를 쌓아 간 쪽 가운데, 660년에 남은 것은 후자였다.
이름을 붙인 자의 책임
예산에 ‘민생’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일과 국민의 살림을 나아지게 하는 일 사이에는 검증의 시간이 놓여 있다. 지출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정부도, 재정의 위험을 경고하는 야당도 그 시간을 말로 건너뛸 수는 없다.⁵
정부는 누구의 삶이 얼마나 나아질지 설명해야 하고, 야당은 무엇을 줄이고 무엇을 지킬지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 좋은 이름이 지출의 타당성을 보증하지 않듯, 날카로운 비판만으로 대안의 책임까지 다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지증왕 대의 기록에서 오늘의 정치가 돌아볼 대목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국호와 왕호를 정한 기사 곁에는 농사와 시장, 운송과 지방 행정을 정비한 기록이 놓여 있다. 이름이 어떤 의미를 얻었는지 살피려면, 그 이름 아래 이루어진 일들을 함께 읽어야 한다.
민생을 내걸었다면 민생의 결과로 평가받아야 한다. 이름을 붙일 권한에는 그 이름이 약속한 바를 입증할 책임이 따른다. 오늘의 정치는 국민에게 어떤 이름을 기억시킬 것인가보다, 어떤 살림을 남길 것인가에 답해야 할 것이다.
멀리서 보아야 보이는 순서가 있다. 바라보는 자의 기록은 그 순서를 적는다.
다음 편: 5-신라-② 법흥왕(514~540) — 이름이 법이 될 때
* 참고할 말씀: ‘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하게 되며’ — 잠언 24:3
¹ 김부식,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지증마립간조(즉위 기사와 논찬, 3년·4년·6년·13년·15년 기사).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수록 원문·번역 대조.
²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지증왕」, 한국학중앙연구원 (encykorea.aks.ac.kr/Article/E0054400).
³ 포항 냉수리 신라비(503년께 건립으로 봄), 울진 봉평리 신라비(524). 판독문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의 고대 금석문 항목에서 대조할 수 있다.
⁴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마립간 10년(509) 정월 기사, 같은 책 직관지의 동시전 기사.
⁵ 뉴스핌, 「이 대통령 시정연설 마치자 퇴장하는 국민의힘」, 2026년 11월 2일 (newspim.com/news/view/2026110200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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