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적함대는 왜 침몰했는가: 패권은 두 번 오지 않는다
[전환] 스페인·포르투갈의 몰락과 네덜란드의 부상 (1588년~1602년)
바다 · 대항해시대 시리즈 · 6편
무적함대는 무적이 아니었다
패권은 영원하지 않다는 말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그 말이 실제로 무너지는 순간을 눈앞에서 목격하는 사람은 드물다. 오늘날에도 세계는 비슷한 질문 앞에 서 있다. 반도체를 쥔 나라, 기축통화를 쥔 나라, 인공지능 생태계를 쥔 나라 — 지금의 1위가 다음 세기에도 1위일 것이라 단정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데도 우리는 매번 지금의 강자를 영원한 강자처럼 대하곤 한다.
16세기 말, 유럽인들도 그렇게 믿었을지 모른다. 스페인은 신대륙의 금과 은을 실어 나르는 배를 세계에서 가장 많이 가진 제국이었다. 그 보물선단을 지키는 함대에는 ‘무적함대(Armada Invencible)’라는 명칭이 붙었다. 이름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완벽한 결론처럼 작용했던 셈이다. 그러나 거창한 이름이 제국의 운명까지 지켜주지는 못했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코르테스가 아스텍을 무너뜨리고 신대륙의 부를 스페인으로 실어 나르기 시작한 수탈의 구조를 살펴보았다. (아스텍 멸망과 수탈의 구조) 그 부가 스페인 왕실의 창고에 쌓이는 동안, 이베리아반도의 두 제국은 이미 내부로부터 깊은 균열을 안고 있었을지 모른다.
세계를 반으로 나눈 두 제국, 함께 기울다
1494년 6월¹,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로마 교황의 중재 아래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맺었다. 지구에 가상의 선을 그어 서쪽은 스페인, 동쪽은 포르투갈이 나눠 갖기로 한 것이다. 세계를 절반씩 나눠 가진다는 발상 자체가, 두 나라가 스스로를 지상의 유일한 주인으로 여겼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그 자신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1580년²,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포르투갈의 왕위 계승 분쟁에 개입하여 포르투갈 왕관까지 손에 넣었다(이베리아 연합). 얼핏 보면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해상 제국의 완성처럼 보였다. 하지만 두 개의 방대한 해상 제국을 하나로 묶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이는 곧 두 배의 국경과 두 배의 함대, 나아가 두 배의 반란 위험을 동시에 떠안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토의 확장이 곧 힘의 질적 확장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스페인은 수탈한 금은으로 부를 누렸지만, 정작 제국을 지탱할 자체 제조업과 금융 시스템을 다지는 데는 소홀했다.
결정적 균열은 1588년 8월³에 찾아왔다. 스페인은 잉글랜드를 응징하기 위해 130여 척의 무적함대를 북해로 보냈다. 8월 7일 밤,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가 이끄는 잉글랜드 함대는 칼레 앞바다에 정박한 무적함대를 향해 불붙은 화선(火船) 여덟 척을 풀어놓았다. 놀란 스페인 함대는 애써 유지해 온 초승달 대형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인 8월 8일, 그라블린 앞바다에서 벌어진 교전에서는 사거리가 긴 잉글랜드 함포가 근접전에 의존하던 스페인 함대를 압도했다. 여기에 회항길에 몰아친 북해의 폭풍과 좌초까지 겹치며, 무적함대는 절반 이상의 배를 잃었다. 세계에서 가장 강하다던 함대가, 자신들이 지배한다고 믿었던 바로 그 바다 아래로 가라앉은 것이다.
같은 시기, 스페인의 지배에 맞서 독립 전쟁(1568년~)을 벌이던 네덜란드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아직 국가의 틀조차 온전하지 않던 이 작은 영지는, 스페인이 무적함대의 환상에 빠져 있는 사이 능률적인 조선술과 해상 무역망을 조용히 다져나갔다. 그리고 1602년 3월⁴,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이자 제국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한 동인도회사(VOC)를 설립했다. 거대하고 무거운 영토 제국이 저무는 자리에, 자본과 시스템이라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힘이 들어서고 있었던 셈이다.
가득 채운 자는 반드시 흔들린다
노자는 『도덕경』 9장에서 이렇게 경고했다⁵.
持而盈之,不如其已。(지이영지, 불여기이)
“가득 채워 유지하려는 것은, 적당한 때에 그만두느니만 못하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저지른 실책이 정확히 이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두 개의 대양, 두 개의 대륙, 두 개의 왕관을 동시에 그러쥐려 했다. 부와 영토를 채우는 것 자체는 성장의 과정일 수 있다. 문제는 가득 찬 뒤에도 완벽함에 도취되어 계속 쥐고 있으려는 마음이다.
서양의 통찰 또한 이와 궤를 같이한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운명(포르투나)이 인간사의 절반을 지배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인간의 대비(비르투)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무적함대를 침몰시킨 직접적 계기는 북해의 폭풍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변화하는 해전 방식에 대비하지 못하고, 두 개의 거대한 제국을 동시에 운용할 정교한 체계를 갖추지 못한 것은 순전히 인간의 책임에 가까웠다.
노자가 경고한 ‘채움의 욕망’은 마키아벨리가 언급한 ‘대비의 부재’와 깊이 맞물린다고 볼 수 있다. 가득 채운 자는 스스로 완벽하다고 믿는 경향이 있어, 운명의 변화에 대비하는 능력을 점차 잃어버리곤 하기 때문이다.
철학은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을 뿐이다.
최초의 패권이 오래가지 않는 이유
역사를 넓게 보면 하나의 패턴이 반복되는 듯 보인다. 최초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자는, 그 개척에 엄청난 에너지와 자본을 소모하느라 정작 그 영역을 지킬 유연성을 남겨두지 못하곤 한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신대륙과 인도양 항로를 가장 먼저 열었다. 그러나 가장 먼저 문을 연 자가 가장 오래 그 자리의 주인으로 남는다는 법은 없다. 뒤이어 등장한 네덜란드와 잉글랜드는 개척의 막대한 초기 비용을 치르지 않은 채, 이미 열린 항로 위에서 주식회사라는 훨씬 가벼운 조직으로 판을 뒤흔들었다.
이 패턴은 로마 공화정의 붕괴에서도, 오늘날의 기술 패권 경쟁에서도 비슷하게 되풀이된다고 읽힐 여지가 있다. 가장 먼저 시장을 연 나라나 기업이 끝까지 그 시장을 지배하리라고 단정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투키디데스가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충돌에서 읽어낸 것 역시 이것이었다. 먼저 도달한 자의 지키려는 불안과, 뒤따르는 자의 결핍 없는 확장이 충돌하는 자리에서 질서는 재편되곤 한다.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에 선 한국 역시 이 질문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먼저 도착했다는 사실은 중요한 자산이지만, 그 자산을 유지할 체계가 없다면 오래가지 못할 가능성 또한 배제하기 힘들다.
우리는 아직 다음 패권을 묻지 않았다
무적함대가 가라앉은 지 채 20년도 지나지 않아, 세계 무역과 금융의 중심은 스페인의 세비야에서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그 이동은 하루아침에 일어난 도약이 아니었을 것이다. 두 제국이 세계를 반으로 나눠 가졌다고 믿던 바로 그 순간부터,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는 다음 시대를 준비하는 손길이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한국이 선 자리도 이 패턴에서 완전히 비켜나 있지는 않을 것이다. 외교의 균형을 어디에 두는가, 국방의 자강을 어떻게 쌓는가, 동맹과 안보의 구조를 어떻게 가져가는가, 산업의 경쟁력을 어디서 지키는가, 노사의 관계를 어떤 방식으로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가 — 이 모든 물음이 지금 이 순간에도 각기 다른 자리에서 조용히 답을 구하고 있다. 그 답들 가운데 어느 것이 다음 시대를 준비하는 손길이 될지는, 이 글이 판단할 몫이 아니다.
바라보는 자의 기록이 매번 묻는 질문은 결국 이것이다. 지금 세계를 나눠 가졌다고 믿는 이름들 뒤에서, 누가 조용히 다음을 준비하고 있는가. 우리는 아직 그 질문에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 참고할 말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 잠언 16:18
¹ 토르데시야스 조약(1494.6) — 세계사 사전
² 이베리아 연합(1580) — 스페인 왕실 계승사 자료
³ 칼레 화선 기습(1588.8.7) 및 그라블린 해전(1588.8.8) — 영국 국립해양박물관, 스페인 해군사 자료
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 설립(1602.3) — 네덜란드 국립문서보관소
⁵ 노자 『도덕경』 9장, 마키아벨리 『군주론』
© Watchman, 바라보는 자의 기록 (bara.watchmaninsight.com). 무단 전재 및 2차 창작 시 사전 동의 필요.
📢 새 글 알림 받기
💬 카카오톡 채널 추가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