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개의 화폐, 하나의 세계 — 달러와 위안의 패권 전쟁
화폐 패권 2000년, 그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이야기
세계사 · 2026.08.30
카드 대신 현금을 챙기라는 초대장
2024년 러시아 카잔에서 열린 브릭스 정상회의 웹사이트에는 이색적인 안내문이 걸려 있었다. 해외에서 발급된 비자·마스터카드는 이 나라 안에서 쓸 수 없으니 현금을 챙겨오라는 안내였다.
서방 제재를 정면으로 돌파하겠다고 큰소리치던 나라가, 손님을 맞는 첫머리에서 스스로 달러 결제망 밖에 서 있다는 사실을 자인한 셈일지 모른다.1
그로부터 2년, 무대는 인도로 넘어갔다. 2026년 브릭스 정상회의를 앞두고 인도 중앙은행은 자국의 디지털 루피와 중국의 디지털 위안을 비롯한 회원국 CBDC를 하나로 연동하자는 안건을 의제로 올렸다.2
카드를 챙기라던 서방 제재의 구멍에서, 결제망의 배관 자체를 새로 깔려는 시도로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아날로그적 회피에서 디지털 대체망 구축으로, 2년 사이 대응의 층위가 바뀌었다.
파운드가 내려오던 서른 해
패권 통화의 교체가 늘 하루아침에 일어난 것은 아니다. 1914년 7월 말,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하며 전쟁이 초읽기에 들어가자 런던 은행들은 대출을 서둘러 회수하고 금을 그러모으기 시작했다. 투자자들이 달러를 금으로 바꿔 유럽으로 실어 나르는 물량이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고, 그 여파로 뉴욕 증시는 넉 달, 런던 증시는 다섯 달 동안 문을 닫았다.7
8월에 접어들며 영국을 비롯한 주요 참전국들은 자국 통화를 금으로 바꿔주는 태환을 사실상 정지했다. 전쟁 자금을 대기 위해 해외에 깔아두었던 투자 자산 약 30억 달러어치를 급히 팔아치워야 했던 나라가, 오히려 미국에서 자금을 빌려야 하는 처지로 돌아선 것이다. 미국은 참전국 가운데 유일하게 전쟁 내내 금태환을 유지한 나라였고, 이 한 가지 차이가 런던에서 뉴욕으로 금융의 무게중심이 넘어가는 첫 계기가 되었다.
같은 시기 대서양 건너에서는 미국이 세계 최대 공업국이자 채권국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었다. 힘의 축은 총성보다 공장과 장부 위에서 먼저 이동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 균열은 곧바로 봉합되지 않았다. 1944년 7월 브레튼우즈 회의에서 달러가 공식적으로 기축통화 자리에 오르기까지, 영국은 무려 서른 해에 걸쳐 서서히 자리를 내주었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이 체제가 1971년 닉슨쇼크로 어떻게 다시 흔들렸는지를 살펴보았다. (세계사-통화-③ 「금과 이별하던 날」)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도 비슷한 속도로 움직인다. IMF 집계에 따르면 세계 외환보유액에서 달러가 차지하는 비중은 2001년 72%에서 지난해 말 56.77%까지 내려앉았다. 스물다섯 해 동안 대형 전쟁 없이도 15퍼센트포인트가 조용히 감소한 셈이다.3
권력의 세 번째 손잡이
사마천은 『사기·화식열전』에서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이렇게 정리했다.
天下熙熙,皆爲利來;天下攘攘,皆爲利往。
(천하희희,개위리래;천하양양,개위리왕。)
“천하가 왁자지껄한 것은 모두 이익을 위해 오기 때문이요, 천하가 어지러운 것은 모두 이익을 위해 가기 때문이다.”
국가 간 결제망 경쟁 역시 이념의 충돌로 포장되어 있지만, 그 밑바닥에는 누구의 장부 위에서 거래가 기록되느냐는 현실적 이익 계산이 깔려 있는 것으로 읽힐 수 있다.
투키디데스가 2,400년 전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원인을 설명하며 남긴 통찰도 이 계산과 무관하지 않다. 아테네의 부상이 스파르타에게 안겨준 것은 경쟁심이 아니라 공포였다.
위안화의 국제 무역금융 비중이 5년 사이 세 배로 뛰어 유로화를 제치고 달러 다음 자리에 올라선 숫자 앞에서, 워싱턴이 느끼는 감정도 경쟁이라기보다 공포에 가까울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4
헤겔은 인간의 역사를 인정받기 위한 투쟁으로 읽었다. 주인과 노예는 서로에게 인정받아야만 비로소 주인과 노예로 성립한다. 기축통화도 다르지 않다.
발행량이 아무리 많아도 세계가 그 화폐로 결제하고 저축하기를 선택하지 않으면 패권은 성립하지 않는다. 결국 화폐 패권이란 발행국의 일방적인 힘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체계를 기꺼이 수용하려는 각국의 신뢰가 빚어낸 결과다.
철학은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위기 없는 붕괴, 소리 없는 잠식
로마의 데나리우스는 은 함량이 조금씩 깎이며 화폐 자체의 가치가 무너졌다. 바이마르의 마르크화는 손수레에 실려 다니며 화폐 자체의 신뢰가 무너졌다. 두 사례 모두 화폐 그 자체의 죽음이었다.
지금 달러 앞에 놓인 상황은 다르다. 달러가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달러 옆에 또 하나의 길이 뚫리고 있다.
중국의 접근은 정면충돌이 아니라 우회로 건설이다. 2021년 시작된 mBridge는 각국 중앙은행이 미국 금융기관을 거치지 않고 서로 직접 결제하도록 설계된 플랫폼이다. 중국의 국경 간 위안화 결제망 CIPS 거래 규모는 최근 두 배로 불어났고, 러시아와 이란은 이 통로를 제재 회피 수단으로 쓰고 있다.5
디지털 위안은 2026년 초 기준 누적 거래액이 16조 7천억 위안, 우리 돈으로 약 3천조 원을 넘어서며 소매 결제 시범사업에서 국가 금융 인프라의 한 축으로 자리를 옮겼다.6
같은 시기 달러 쪽에서는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충격 이후 미국 국채·주식·달러가 동반 약세를 보이며, 각국 정부와 기업의 자금 조달처가 유로와 위안으로 조금씩 옮겨갔다.3
화폐 패권도 반드시 한순간의 폭발로만 무너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 시리즈는 다섯 편에 걸쳐 확인해왔다. 이번엔 인플레이션도 전쟁도 아닌, 결제망과 CBDC라는 배관 공사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을 뿐이다.
다음 화폐를 살아낼 이는 누구인가
로마는 순도가 깎인 은화를 손에 쥔 백성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무너졌고, 바이마르는 손수레에 지폐를 싣고 다니는 광경을 온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무너졌다. 지금 우리 눈앞의 전환은 그 둘 중 어느 쪽에 더 가까운가. 아니면 파운드가 그러했듯, 누구도 정확한 날짜를 짚어낼 수 없는 서른 해짜리 완만한 하강인가.
분명한 것은, 하나의 화폐가 세계를 독점하던 시대가 저물고 여러 개의 배관이 나란히 흐르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가도 개인도 단 하나의 장부에만 의존하기 어려운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IMF 총재는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세계 경제가 높은 부채 수준과 가라앉지 않는 물가, 무역 갈등이라는 세 겹의 역풍 앞에 서 있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모든 나라가 재정 적자를 지속 가능한 경로로 되돌릴 신뢰할 수 있는 계획을 지금 내놓아야 한다고 촉구했다.8 결제망의 패권을 다투는 두 나라의 싸움보다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어쩌면 이것이다 — 우리 자신의 장부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상태인가.
멀리서 보아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배관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배관이 완성되는 날 세계는 이미 다른 곳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세계사-통화 시리즈 전편
① 은화가 얇아지던 날
② 손수레 속의 지폐
③ 금과 이별하던 날
④ 나라가 저당잡히던 밤
⑤ 숫자가 의미를 잃을 때
각주
1. 2024 카잔 브릭스 정상회의 카드결제 제한 안내 (Bloomberg, 2024)
2. 인도중앙은행(RBI), 2026 브릭스 CBDC 연동 제안 (Reuters 인용 보도, 2026)
3. IMF COFER 세계 외환보유액 중 달러 비중 2001년 72% → 2025년 말 56.77% / BIS 국경간 은행신용 통계 (The Economy Korea, 2026.08)
4. SWIFT 위안화 무역금융 비중 5년간 3배 증가·2026년 4월 6%, 유로 추월 (2026.06)
5. mBridge·CIPS 현황 및 러시아·이란 제재 우회 활용 (2026.06 보도)
6. 디지털위안(e-CNY) 누적 거래 16.7조 위안 돌파 (Atlantic Council·BIS·PYMNTS 종합, 2026.01)
7. 1914년 금융위기 — 영국의 해외자산 매각·금태환 정지·뉴욕/런던 증시 폐장 경위 (Financial crisis of 1914, Wikipedia 교차확인)
8.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IMF 총재, 세계경제 고부채·인플레이션·무역긴장 경고 및 재정건전화 촉구 (Investing.com, 2026.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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