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숫자가 사라진 나라 — 짐바브웨와 베네수엘라의 초인플레이션
2000~2020, 권력이 화폐를 삼킨 두 나라의 기록
세계사 · 2026.08.28 · 화폐 패권 2000년 시리즈 5편
빵 한 봉지, 지폐 한 다발
2008년 짐바브웨 하라레의 슈퍼마켓에서는 빵 한 봉지의 가격이 계산대에 줄을 선 사이에 두 배로 뛰는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사람들은 월급을 받으면 그날 안에 써야 했다. 하루만 지나도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절반으로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10년 뒤, 이번에는 대서양 건너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비슷한 장면이 반복됐다. 슈퍼마켓 계산원은 지폐를 세는 대신 무게를 다는 편이 더 빠르다고 농담 아닌 농담을 했고,1 국경을 넘어 콜롬비아로, 브라질로 걸어서 떠나는 사람들의 행렬이 뉴스 화면을 채웠다.
두 나라는 대륙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통치 이념의 겉모습도 달랐다. 그러나 화폐가 무너져 내린 과정만 놓고 보면, 이 두 사례는 마치 하나의 설계도로 지은 건물처럼 닮아 있다. 화폐가 먼저 무너진 것이 아니었다. 권력이 먼저 스스로를 견제할 장치를 걷어냈고, 화폐는 그 다음에 무너졌다.
권력이 통화를 삼킨 두 나라
짐바브웨의 이야기는 2000년에서 시작된다. 로버트 무가베 정권은 그해 신속토지개혁 프로그램을 발표하며 백인 소유 대농장을 강제 수용해 재분배하기 시작했다.2 개혁 자체의 명분과는 별개로, 실행 과정에서 숙련된 농업 경영 인력이 대거 이탈했고, 짐바브웨의 핵심 수출 산업이던 담배와 옥수수 생산량이 이후 수년간 급감한 것으로 평가된다.3 여기에 콩고민주공화국 내전 파병 비용까지 겹치며 재정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짐바브웨중앙은행은 이 적자를 메우기 위해 국채를 시장에서 소화시키는 대신 사실상 화폐를 찍어 정부에 직접 공급하는 방식을 택했다.4
그 결과는 통상적인 인플레이션의 범주를 넘어섰다. 짐바브웨 통계당국이 공식 집계를 포기할 정도로 물가 상승이 가팔라졌고, 국제 경제학자들은 2008년 11월 월간 물가상승률을 수천억 퍼센트대로 추정했다.5 2009년 1월 16일, 짐바브웨는 액면가 100조 짐바브웨 달러 지폐를 발행했다. 발행 당일 실질가치는 약 미화 30달러였지만, 보름 뒤인 2월 1일에는 40센트로 떨어져 버스 요금조차 낼 수 없는 수준이 됐다.6 결국 2009년 4월, 정부는 자국 통화 발행을 사실상 중단하고 미국 달러 등 외화를 법정통화로 병행 사용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7
베네수엘라의 경로는 조금 더 길게 걸렸지만 구조는 크게 다르지 않다. 우고 차베스는 1999년 취임 이후 국영 석유회사 PDVSA의 수익을 사회복지 지출의 재원으로 삼는 통치 모델을 구축했다.8 국제 유가가 높은 시기에는 이 모델이 지속 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2013년 3월 차베스 사망 이후 정권을 이어받은 니콜라스 마두로 체제에서, 2014년 중반부터 시작된 국제 유가 급락이 이 구조의 취약성을 그대로 드러냈다.9 수입은 줄었지만 지출 구조는 그대로였고, 베네수엘라 중앙은행은 재정 적자를 메우기 위해 화폐 발행량을 지속적으로 늘렸다. 여기에 오랜 가격통제 정책까지 겹치며 생산자들이 정상 가격에 재화를 공급할 유인 자체를 잃었다.10
국제통화기금은 2018년 10월, 그해 연간 물가상승률을 137만 퍼센트로 최종 추산해 발표했다. 이는 1946년 헝가리와 함께 역사상 손꼽히는 초인플레이션 사례로 거론된다.11 2018년 8월 20일, 정부는 기존 볼리바르화에서 0을 다섯 개 지우는 화폐개혁을 단행해 ‘볼리바르 소베라노’를 출범시켰다. 그러나 화폐 단위를 바꾸는 것만으로 신뢰가 돌아오지는 않았다. 국제이주기구 등의 집계에 따르면 2020년대 초까지 700만 명이 넘는 베네수엘라인이 국경을 넘어 이웃 나라로 떠난 것으로 추산된다.12
법 없는 권세, 옹호자에서 참주로
한비자는 권력의 정당성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이렇게 짚었다.
抱法處勢則治,背法去勢則亂。
(포법처세즉치, 배법거세즉란)
“법을 끌어안고 권세에 자리하면 다스려지고, 법을 등지고 권세를 제멋대로 휘두르면 어지러워진다.”13
한비자에게 권세(勢)는 칼과 같아서 그 자체로 선도 악도 아니었다. 문제는 그 칼이 ‘법(法)’이라는 객관적 칼집 안에 머무는가, 아니면 통치자의 사사로운 자의(恣意)로 휘둘러지는가에 있었다. 중앙은행의 발권력도 본질적으로는 이 칼과 다르지 않다. 화폐 발행이 법과 규칙, 즉 재정 준칙과 통화정책의 독립성이라는 칼집 안에 머무는 동안에는 다스림의 도구가 되지만, 그 칼집이 통치자의 정치적 생존 논리로 대체되는 순간 어지러움의 도구로 바뀐다.
플라톤은 『국가』 8권에서 정반대 방향의 경로를 그렸다. 그는 민주정이 무너지는 방식이 외부의 침략이 아니라 내부의 한 인물에게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부유층(과두파)의 압제로부터 인민을 구원하겠다고 자처한 이 인물은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고 호위대를 요구하곤 한다. 초기에는 이 요구가 정당한 보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러나 반대파를 제거하고 견제 장치를 무력화하는 과정에서 호위대는 점차 제어 불가능한 사병(私兵)으로 변질되며, 지도자는 마침내 참주의 자리에 이르게 되는 것으로 해석된다.14 플라톤이 그린 이 인물은 처음부터 참주가 되려 하지 않았을 수 있다는 점에서 더 섬뜩하게 다가온다. 그는 자신을 여전히 인민의 보호자라 믿으며 권력을 확장해 나갔다.
무가베와 차베스·마두로 체제 모두, 처음의 명분은 토지 없는 농민과 가난한 도시 빈민을 위한 정치였다. 이 정치적 기획 자체의 옳고 그름을 이 글이 판단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기획이 실행되는 과정에서 중앙은행의 독립성, 사법부의 견제, 언론의 감시 같은 ‘법’의 장치들이 차례로 무력화되었다는 사실은 두 사례에서 공통으로 확인된다.
철학은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화폐가 무너지는 진짜 이유
앞선 글에서 우리는 담보 없는 나라가 외부 자본의 신뢰 이탈 앞에서 얼마나 빠르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짐바브웨와 베네수엘라의 붕괴는 그 신뢰가 밖에서 무너진 사건이 아니다. 이번에는 국가 스스로 자신이 발행한 화폐의 가치를 안에서부터 무너뜨렸다는 점에서, 이 시리즈의 첫 편이었던 로마 은화 순도 조작과 훨씬 더 가까운 변주로 읽힌다. 다만 로마의 황제들은 은화의 순도를 몰래 깎았던 반면, 짐바브웨와 베네수엘라의 통치자들은 그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숨길 필요가 없었다는 점이 오히려 이 두 사례의 본질을 보여준다. 권세를 견제할 법과 제도가 이미 사라진 뒤였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하나의 패턴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 화폐가 먼저 무너지는 나라는 없다. 화폐를 지킬 책임이 있는 권력이 먼저 그 책임에서 자유로워질 때, 화폐는 그 다음에 무너진다. 이것은 추정이 아니라, 로마에서 바이마르를 거쳐 짐바브웨와 베네수엘라에 이르기까지 반복적으로 확인되는 구조다. 통치자가 선한 의도로 시작했는지 악한 의도로 시작했는지는, 화폐가 무너지는 속도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점 또한 이 두 사례가 함께 증언한다.
다음 청구서는 어디서 날아오는가
한국은 짐바브웨도 베네수엘라도 아니다. 한국은행은 법적으로 독립된 통화정책 기구이며, 재정 준칙과 국회의 견제, 자유로운 언론이 여전히 작동하는 나라다. 그러나 이 시리즈가 지금까지 짚어온 모든 사례의 공통점은, 그 붕괴가 하루아침에 시작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로마도, 바이마르 독일도, 짐바브웨도, 베네수엘라도 처음에는 자신이 그 목록에 오르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화폐의 가치를 지키는 마지막 방벽은 결국 권력이 스스로 만든 법 앞에서 멈춰 서는가에 달려 있다. 재정 적자가 커질 때 그 적자를 세금과 국채, 즉 국민의 동의를 거친 절차로 메우려 하는가, 아니면 발권력이라는 가장 손쉬운 지름길로 메우려 하는가. 이 질문은 특정 정파나 특정 정권을 겨냥한 것이 아니다. 권력을 쥔 모든 이들에게 시대와 진영을 가리지 않고 던져지는 질문이다.
그러나 질문이 통시대적이라고 해서, 지금 이 순간의 답까지 유예되는 것은 아니다. 2026년 한국의 국가채무는 처음으로 GDP의 절반을 넘어섰다.15 지출은 1년 새 8.1% 늘었지만 세입은 그 절반에도 못 미치는 3.5% 늘었을 뿐이며, 정부 스스로도 이 격차가 앞으로 몇 년간 좁혀지지 않으리라 전망하고 있다.16 이 부채가 국채라는 정당한 절차를 거쳤다는 사실이, 그 규모와 속도에 대한 질문 자체를 면제해주지는 않는다. 한국이 지금까지 이 질문 앞에서 옳은 답을 선택해 왔다는 사실이, 앞으로도 그러하리라는 보장이 되지는 않는다.
짐바브웨의 100조 달러 지폐와 베네수엘라의 국경을 넘는 행렬은, 법이 권세를 떠나는 순간이 언제나 극적인 쿠데타나 전쟁으로 시작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때로는 좋은 뜻으로 시작된 재정 지출 하나가 그 첫걸음이 된다. 역사를 바라보는 이의 기록은 바로 이 지점에 멈춰 서서 질문을 던진다 — 우리가 외면한 법치의 균열 끝에, 다음 청구서는 과연 어디서 날아올 것인가.
* 참고할 말씀: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하려니와 의인은 푸른 잎사귀 같아서 번성하리라’ — 잠언 11:28
- 베네수엘라 소매 거래에서 지폐를 무게로 세는 관행은 다수 해외 언론(로이터 등)에서 반복적으로 보도된 사례로 본다.
- 2000년 짐바브웨 신속토지개혁 프로그램 발표 및 대농장 강제 수용 개시는 다수 국제 보도·연구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사실이다.
- 토지개혁 이후 짐바브웨 농업 생산량 급감은 다수 경제 분석에서 공통적으로 지적되는 결과로 평가된다.
- 짐바브웨중앙은행의 적자 국채 인수(사실상 화폐 발행을 통한 재정 조달) 방식은 다수 국제 경제 문헌에서 공통적으로 지적되는 원인으로 평가된다.
- 2008년 11월 짐바브웨 월간 물가상승률 추정치(수천억 퍼센트대)는 케이토연구소 등 외부 추정에 근거한 것으로, 짐바브웨 정부는 당시 공식 통계 발표를 중단한 상태였다.
- 2009년 1월 16일 100조 짐바브웨달러 지폐 발행 및 발행 당일 실질가치(약 미화 30달러), 2월 1일 기준 실질가치(미화 40센트) 하락은 BBC·위키백과 및 관련 화폐 기록 자료에 근거한 것으로 본다.
- 2009년 4월 짐바브웨의 자국 통화 발행 사실상 중단(다중통화 체제 전환)은 다수 문헌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사실이다.
- 1999년 차베스 집권 및 PDVSA 수익 기반 사회지출 모델 구축은 다수 자료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사실로 본다.
- 2013년 3월 차베스 사망, 마두로 체제 출범 및 2014년 중반 이후 국제 유가 급락은 사실로 확인된다.
- 가격통제 정책이 생산 유인을 약화시켰다는 평가는 다수 경제 분석에서 공통적으로 지적되는 해석으로 본다.
- IMF가 2018년 10월 발표한 베네수엘라 2018년 물가상승률 최종 추산치(137만 퍼센트)는 IMF 세계경제전망(WEO) 보고서 및 이를 인용한 로이터·블룸버그 보도에 근거한 것으로 본다. 단, 베네수엘라 중앙은행 자체 발표치(약 13만 퍼센트)는 이보다 낮았다.
- 국제이주기구(IOM) 등 국제기구 집계 기준 2020년대 초 베네수엘라 이주민 700만 명 이상 추산은 해당 기구 발표 자료에 근거한 것으로 본다.
- 한비자의 “抱法處勢則治,背法去勢則亂” 구절은 『한비자』 難勢편에 근거한 것으로 평가된다. 다만 ‘去勢’의 해석(권세를 스스로 버림 / 권세를 법 없이 제멋대로 휘두름)은 학술적으로 이견이 있어, 두 해석과 크게 충돌하지 않는 방향으로 번역했다.
- 플라톤의 민주정에서 참주정으로의 이행 논지(호위대 요청 포함)는 『국가』 8권(약 565~569항)의 논지를 요약한 것으로, 원문 직접 인용은 아닌 것으로 본다.
- 2026년도 예산 기준 국가채무 1,413.8조 원,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 51.6%(2025년 49.1%에서 상승, 사상 최초 50% 돌파)는 국회예산정책처 ‘2026년 대한민국 재정’ 자료에 근거한 것으로 본다.
- 2026년 총지출 727.9조 원(전년 대비 8.1% 증가)과 총수입 675.2조 원(전년 대비 3.5% 증가), 그리고 2029년까지 국가채무가 GDP 대비 58.0%까지 늘어날 것이라는 정부 중기 전망은 기획재정부 ‘2026년도 예산안’ 및 ‘2025~29년 국가재정운용계획’ 자료에 근거한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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