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황이 가린 것들: 한국경제, 제방을 쌓을 시간
명목 GDP가 26% 뛴 분기에도 잠재성장률은 내려간다
2026년 10월 5일 · 경제·국방 · Watchman
가장 좋은 숫자 곁의 가장 나쁜 숫자
2026년 2분기, 한국의 명목 GDP는 1년 전보다 26.4% 늘었다. 1979년 3분기 이후 47년 만의 최고 증가율이다. 같은 시기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81%대로 내려온 것으로 추산된다. 2021년 3분기 99.1%였던 수치가 2016년 이후 가장 낮은 수준에 가까워진 것이다. 반도체 수출 호조가 만든 숫자들이다.¹
이 숫자만 보면 ‘위기’라는 단어는 어색하게 들린다. 그런데 같은 해의 다른 숫자는 방향이 반대다. 한국은행은 2024년 12월 보고서에서 잠재성장률이 2000년대 초 5% 안팎에서 2024~2026년 2% 수준으로 내려왔다고 추정했다. 현재 추세가 이어지면 2040년대 후반에는 0.6% 안팎까지 낮아질 수 있다는 전망도 함께 제시했다.² KDI는 올해 추정치를 1.6%로 제시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가장 좋은 숫자와 가장 나쁜 숫자가 한 해 안에 나란히 놓여 있다. 호황은 위기를 부정하지 않는다. 호황은 위기의 가장 좋은 은신처다. 이 모순을 읽는 열쇠는 제방이라는 오래된 이미지에 있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영화 투자와 모태펀드를 둘러싼 70년의 흐름을 살펴보았다.
은이 넘치던 항구, 파산하던 제국
1545년, 지금의 볼리비아 포토시에서 거대한 은광이 발견되었다. 이후 오랫동안 아메리카의 은이 세비야 항구로 흘러들었고, 합스부르크 스페인은 유럽에서 가장 강한 나라로 불렸다. 은은 곧 군대였고, 군대는 곧 패권이었다.
그러나 1557년, 펠리페 2세는 국가의 지불정지를 선언해야 했다. 이후 17세기 중반까지 스페인 왕실은 같은 선언을 여러 차례 되풀이했다. 은이 모자라서가 아니었다. 은이 들어오는 동안 국내 생산 기반은 약해졌고, 필요한 물자는 수입에 기대게 되었으며, 전쟁 비용은 미래의 수입을 담보로 한 차입으로 메워졌다.
1600년 무렵 곤살레스 데 셀로리고를 비롯한 개혁 논객들(이들은 ‘아르비트리스타’라 불렸다)이 이 구조를 경고했다.³ 그러나 경고가 정책으로 바뀌는 속도는 은이 빠져나가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은이 넘치는 동안 제국은, 은으로 풀 수 없는 문제를 키웠다.
한국에도 비슷한 장면이 있었다. 1995년의 반도체 호황이 끝나고 1996년 D램 가격이 급락하자 수출 증가세가 꺾이고 경상수지 적자가 커졌다. 1997년 11월, 한국 정부는 IMF에 구제금융을 공식 요청했다.
반도체 가격 하나가 곧바로 외환위기를 불러왔다고 보기는 어렵다. 높은 차입에 기대 몸집을 키운 기업 구조와 단기 외채에 기대 돌아가던 금융 구조 같은 취약점이 호황의 소음 속에 가려져 있다가, 호황이 멈추는 순간 한꺼번에 드러났다고 읽을 수 있다. 호황은 취약점을 없애지 않고 덮어 둔다는 점에서, 포토시의 은과 닮아 있었다.
항산(恒産)과 제방 사이에서
맹자는 양혜왕에게 정치의 순서를 이렇게 말했다.
無恒産而有恒心者,惟士為能。若民,則無恒産,因無恒心。
(무항산이유항심자,유사위능。약민,칙무항산,인무항심。)“일정한 생업이 없으면서도 변치 않는 마음을 지닐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선비뿐이다. 보통 사람은 일정한 생업이 없으면 변치 않는 마음도 잃는다.”⁴
맹자는 도덕을 말하기 전에 생업의 안정을 먼저 물었다. 오늘의 언어로 옮기면 가계의 소득과 일자리와 부채가 곧 한 나라의 기초 체력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한비자도 같은 맥락에서 “나라에는 영원한 강함도 영원한 약함도 없다”(國無常強,無常弱)고 썼다.⁵ 호황이 주는 강함은 자원이 준 선물이고, 그 선물은 거두어 갈 수 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 25장에서 운명을 범람하는 강에 견주었다. 강이 맑은 날에 제방과 둑을 마련해 두지 않은 이는, 홍수가 닥친 뒤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⁶ 제방은 홍수가 난 뒤에는 쌓을 수 없다. 쌓을 수 있는 시간은 물이 맑을 때뿐이다.
세 겹의 구조, 하나의 착시
오늘 한국경제의 구조 문제는 세 겹으로 겹쳐 있다. 그리고 세 겹 모두 지금의 호황 때문에 평소보다 덜 보인다.
첫째 겹은 인구다. 2025년 합계출산율은 0.80명으로 4년 만에 0.8명대를 회복했다.⁷ 2026년에도 월간 잠정치는 0.85명에서 0.99명 사이를 오갔다. 반가운 신호다. 다만 이 신호가 생산인구로 자라 노동시장에 들어서려면 20년 안팎이 걸린다. 한국의 인구는 2019년 11월부터 자연감소 중이며, 올해 5월 기준 79개월째다.
한국은행의 추정에 따르면 출산율이 OECD 평균까지 회복되더라도 2040년대 후반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리는 폭은 0.1~0.2%p에 그친다. 총요소생산성이 개선되면 0.7%p가 더해진다.² 인구는 이미 정해진 미래이고, 생산성은 아직 정해지지 않은 미래다.
그렇다면 생산성을 결정하는 제방은 무엇인가. 한국은행이 직접 꼽은 것은 수도권 집중 완화, 일과 가정의 양립과 여성 경력단절 해소를 위한 노동시장 개혁, 양육 부담을 덜어 줄 사회서비스 확충, 정년 이후의 노동시장 여건 개선이다.² 하나같이 비용이 먼저 들고 성과는 늦게 오는 일이다. 호황의 한가운데서 우선순위에서 밀리기 쉬운 이유다.
둘째 겹은 부채다. 가계부채 비율 81%대는 분명 개선이다. 그러나 비율이 내려간 것이지, 빚이 내려간 것이 아니다. 2분기 가계신용은 오히려 1.3% 늘었고, 분모인 명목 GDP가 훨씬 빠르게 커졌다. 금융권 일각에서는 한국은행의 긴축 기조 속에서 가계의 원리금 상환 부담이 오히려 커지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¹ 한국은행도 이 비율이 내려가더라도 주요 선진국과 비교하면 여전히 높은 수준이라고 평가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분모를 키운 힘이 흔들리면 비율은 되돌아갈 수 있다. 맹자의 항산은 비율표가 아니라 매달 갚는 원리금 위에 서 있다.
셋째 겹은 쏠림이다. 성장률과 수출, 그리고 부채 비율의 개선까지 상당 부분이 반도체 한 업종의 호조에 기대고 있다. 한국은행이 AI 투자 둔화 같은 시나리오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문했다는 보도도 이 맥락에서 읽힌다. 신산업 육성과 규제 설계를 둘러싼 논쟁은 흔히 진영의 구호로 흐른다. 그러나 이 문제의 본질은 어느 편이냐가 아니라 속도에 가깝다. 새 엔진이 돌기 전에 낡은 엔진이 멈추면, 그 사이의 간격이 위기가 된다.
세 겹을 묶는 패턴은 하나다. 호황이 지표를 개선하는 속도가 구조를 고치는 속도보다 빠를 때, 사회는 개선된 지표를 개혁의 대체물로 오독한다. 포토시의 은이 그랬고, 1996년의 반도체 호황이 그랬다. 지금의 호황이 같은 길을 가리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게 만드는 조건이 지금 한자리에 모여 있다.
맑은 날의 질문
위기는 대개 위기의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가장 좋은 숫자의 모습으로 와서, 제방을 쌓을 이유를 지운다. 은이 넘치는 시기의 위험은 은 자체가 아니라, 은이 제방을 쌓을 이유를 지워 버린다는 데 있다.
생산성을 높이는 일, 노동과 정주의 구조를 손보는 일, 한 업종 밖에서 두 번째 엔진을 키우는 일은 모두 비용이 들고 당장 박수받기 어렵다. 그래도 이 질문은 이념과 분배의 논쟁 없이 성립한다. 누가 옳으냐가 아니라 언제 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글은 처방 대신 질문 하나를 돌려드린다. 지금 우리는 “강이 맑다”고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강이 맑은 동안 무엇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가. 호황의 한가운데서는 보이지 않는 것이 한 걸음 물러서면 보인다. 바라보는 자의 기록은 그 한 걸음의 거리에서 쓴다.
* 참고할 말씀: ‘이 먹을 것은 애굽 땅에 임할 칠 년 흉년을 위하여 그 땅을 위하여 저장한 것이라 그리하면 땅이 이 흉년으로 말미암아 망하지 아니하리이다’ — 창세기 41:36
¹ 한국은행·국제결제은행(BIS) 통계 종합 추정(2026년 2분기 말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 약 81.3%), 2026.9.16~17 보도 종합.
² 한국은행, 「우리 경제의 잠재성장률과 향후 전망」 BOK 이슈노트, 2024.12.19.
³ 곤살레스 데 셀로리고, 1600년경 건의서(아르비트리스타 문헌).
⁴ 『孟子』 「梁惠王上」.
⁵ 『韓非子』 「有度」.
⁶ 마키아벨리, 『군주론』 25장.
⁷ 국가데이터처, 「2025년 출생통계」(2026.8.26) 및 월간 인구동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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