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을파소의 곳간 — 194년, 권력이 굶주림 앞에 선 두 가지 방식
고구려 을파소의 진대법과 같은 해 조조의 서주 대학살
2026.08.02 · 한국사 시리즈 · 역사·철학
우는 자를 만난 왕
사냥을 나온 왕이 길가에 앉아 우는 사람을 보았다. 이유를 물으니 그는 품팔이로 늙은 어머니를 봉양해왔으나, 그해 흉년이 들어 일할 곳조차 없어졌다고 답했다.
왕은 그 자리에서 옷과 곡식을 내렸다. 그리고 스스로를 탓했다. “덕이 부족하고 재주가 모자라 백성을 제대로 구제하지 못하였다”고.
이 장면은 194년 10월, 고구려 고국천왕과 을파소가 만들어낸 순간이다. 그런데 같은 해, 황해 건너 대륙에서는 전혀 다른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한 장수가 아버지의 원한을 갚겠다며 성문을 열어젖히고 있었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사람이 아니라 침묵이었다.
같은 해, 같은 위기(흉년과 혼란) 앞에서 권력은 두 갈래로 찢겼다. 하나는 곳간을 열었고, 하나는 성을 불태웠다.
191년의 인사, 194년의 곳간
이 갈림이 시작된 지점을 찾으려면 3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고국천왕이 좌가려·어비류의 반란(190~191년)을 진압하고 왕권을 정비해가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고국천왕 즉위 — 중앙집권의 완성) 그 정비의 다음 단계가 바로 을파소였다.
191년, 귀족들의 천거 끝에 서압록곡 좌물촌에서 농사짓던 을파소가 국상에 임명되었다. 출신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조정 신하들이 그를 배척하자, 왕은 국상을 따르지 않는 자를 멸족시키겠다는 교서까지 내렸다. 인사 하나에 왕이 자신의 권위 전부를 걸었던 셈이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4년 7월, 서리가 내려 곡식이 크게 상했다. 나라는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같은 해 10월, 왕은 질양(質陽)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앞서 언급한 그 백성을 만났다.
이 만남 이후 국가는 임시 구휼을 넘어 하나의 제도를 구축했다. 봄에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 추수 후 갚게 하는 진대법이었다. 흉년기를 넘기지 못한 백성이 귀족에게 땅을 바치고 예속되는 상황을 막는 장치이기도 했다.
같은 해, 다른 대륙의 곳간
역사를 하나의 원리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다만 같은 시대, 같은 조건 속에서 권력이 전혀 다른 선택을 내릴 때, 그 차이가 어디서 비롯되는지 묻는 일은 의미가 있다.
194년은 후한의 연호로 흥평(興平) 원년이다. 이해에 조조는 서주목 도겸을 상대로 두 번째 정벌에 나섰다. 명분은 아버지 조숭의 죽음에 대한 복수였다.
조조의 군대는 낭야와 동해의 여러 현을 함락시키며 지나는 곳마다 살육을 일삼았다는 기록이 사서에 공통으로 남아 있다. 『후한서』 도겸전은 이날의 참상을 이렇게 적었다.
泗水爲之不流 (사수위지불류) — “사수가 시신으로 막혀 흐르지 못했다.”
진수의 『삼국지』조차 이를 ‘잔륙(殘戮)’이라 적었다. 같은 해, 후한 조정은 이미 헌제를 둘러싼 권신들의 다툼 속에 실질적 통치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왕이 백성 한 사람의 눈물을 국가 제도로 바꾸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장수가 자신의 복수를 위해 강 하나를 시체로 메우고 있었다. 이 둘을 나란히 놓고 보면, 권력이라는 도구 자체보다 그것을 쥔 자가 어디로 방향을 잡는지가 통치의 갈림길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곳간을 연 나라와 불탄 나라
두 선택의 결과는 그 뒤로도 오랫동안 이어졌다. 고구려는 이후로도 500년 가까이 존속하며 삼국 경쟁의 한 축으로 남았다. 후한은 194년의 혼란을 수습하지 못한 채 결국 위·촉·오로 갈라졌고, 헌제는 2년 뒤 조조의 보호 아래 들어가는 처지가 되었다.
물론 한 해의 선택이 국가의 수명을 전부 결정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백성을 구제의 대상으로 보았는가, 통제와 정복의 대상으로만 보았는가 하는 갈림길이 두 권력의 정당성이 축적되는 향방을 갈랐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힘들다.
을파소가 남긴 것은 결국 하나의 질문이었을지 모른다. 국가는 왜 가난한 자를 먹여야 하는가. 그 답은 단순한 시혜가 아니라, 백성이 국가를 자신의 기반으로 체감하게 만드는 가장 오래된 지혜였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가 아직 곳간 앞에서 묻는 것
지금 한국의 현실은 이와 얼마나 다른가.
위정자들의 에너지가 정작 국민의 생계보다 자신과 진영의 사법 리스크를 방어하는 일, 혹은 상대 진영을 무력화하는 정쟁에 더 기울어져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묻게 된다. 78년 만에 검찰청을 폐지하고 공소청·중수청을 신설하는 법안이 통과되어 시행을 앞두고 있지만, 그 방식을 둘러싼 여야의 다툼만 뉴스의 첫머리를 차지하곤 한다. 그 사이 고위험 금융상품과 불안정한 부동산 시장 사이에서 흔들리는 서민의 가계는 정작 국회에서도, 언론에서도 제대로 된 자리를 얻지 못하는 모양새다. 국가가 내밀어야 할 진대(賑貸)의 손길은, 과연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
* 참고할 말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 잠언 19:17
¹ 191년 을파소 국상 임명, 좌가려·어비류의 난 —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 고국천왕조
² 194년 7월 서리 피해, 10월 진대법 실시 — 『삼국사기』 권13 고국천왕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진대법’
³ 194년(흥평 원년) 조조의 서주 2차 정벌, “泗水爲之不流” — 『후한서』 권73 도겸전; 『삼국지』 위서 권1 무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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