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보다 어려운 것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보다 어려운 것 — 고구려 태조왕의 조나 정벌, 서기 72년

2월의 군사 행동, 그 계산된 폭력 뒤에 남은 질문

2026년 6월 4일 · 역사 — 한국사 · Watchman


앞선 글에서 우리는 서기 68년 갈사국왕의 손자 도두가 나라를 들어 항복했을 때, 태조왕이 그에게 우태(于台)라는 관등을 내린 사건을 살폈다. 포용이 팽창의 동력이 된다는 패턴이었다. ☞ 투항한 군주를 신하로 삼는다는 것 — 고구려 태조왕의 포용 정치학

나라를 들어 바치는 것과 칼 앞에 무릎 꿇는 것

갈사국의 도두는 나라를 들어 항복했다. 태조왕은 그에게 우태를 내렸다. 그 이야기를 우리는 지난 글에서 살폈다. 포용이 팽창의 동력이 된다는 패턴이었다.

그런데 역사는 늘 그런 식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항복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끝까지 버티는 자도 있다. 회유되는 집단이 있는가 하면, 정벌되어야 하는 집단도 있다. 국가가 성장한다는 것은 포용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느 지점에서는 반드시 강제력이 작동한다. 그리고 그 강제력이 언제, 어떻게, 어떤 계절에 행사되느냐 — 거기에도 원리가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대왕 20년 기록은 짧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대왕 20년 (서기 72년)

“봄 2월에 조나(藻那)를 정벌하여 그 왕을 사로잡았다.”1

원문: 春二月,伐藻那,虜其王.

여덟 글자. 사건의 결과만 있다. 과정도, 이유도, 정복된 자들의 운명도 적혀 있지 않다.

바라보는 자의 기록이 관심을 두는 것은 그 여백이다. 여덟 글자의 안쪽에, 고구려가 어떻게 국가를 만들어 갔는지에 관한 구조적 논리가 숨어 있다.

2월의 칼 — 농번기 직전, 계산된 선택

음력 2월이다.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서 음력 2월은 초춘(初春)이다. 아직 땅이 다 녹지 않았고, 씨를 뿌리기 직전이다. 농민들은 들로 나가기 바로 전 상태다.

이 시점을 선택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전근대 국가에서 군사 동원은 곧 농업 노동력의 차출이었다. 농번기에 군대를 내보내면 그해 수확이 줄어들고, 그것은 곧 다음 해 국가 재정과 민심에 직격탄이 된다. 2월은 그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마지막 시간대였다. 정벌이 2월에 끝나면 병사들은 3월 이전에 돌아와 밭으로 나갈 수 있다.

태조왕의 군사 행동에는 이 계절 감각이 반복적으로 보인다. 그것은 단순한 기후 적응이 아니라, 국가 자원을 장기적으로 관리하는 방식에 대한 감각이었다. 전쟁을 선택할 때도 나라 살림을 생각했다는 뜻이다.

미시사의 렌즈로 이 장면을 확대하면, 또 다른 인물이 보인다. 이름도 전해지지 않는 조나의 왕이다.

기록은 그를 “사로잡혔다”고만 말한다. 그 이후의 운명은 적혀 있지 않다. 고구려 초기의 정복 패턴으로 미루어볼 때 처형보다는 편입의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러나 도두와 달리 그는 스스로 항복한 것이 아니었다. 저항을 선택했다가 패배한 군주와, 현실을 읽고 먼저 고개를 숙인 군주 — 고구려가 두 경우를 어떻게 달리 처우했는지, 사료는 침묵한다. 역사는 이 지점에서 질문을 던진다.

소국의 소멸 — 부체제의 재편과 왕권 집중

조나 정벌은 고구려 초기 팽창 과정에서 독립적인 사건이 아니다. 태조왕 재위 기간 전체를 놓고 보면 하나의 패턴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서기 56년, 동옥저 복속. 서기 68년, 갈사국 병합. 서기 72년, 조나 정벌. 서기 74년에는 주나(朱那)를 정벌한다.2

각각의 사건은 분리된 군사 행동처럼 보인다. 그러나 거시적으로 읽으면 이것은 고구려의 부체제(部體制)가 왕 중심으로 재편되어 가는 과정의 연속적 단계다.

고구려 초기 정치 구조를 두고 학계에서는 오래된 논쟁이 있다. 이 구조가 대등한 집단들의 수평적 합의였는지, 아니면 왕 중심의 위계적 구조였는지는 지금도 정설이 없다.3 다만 분명한 것은, 태조왕 시기를 지나면서 왕이 직접 통제하는 영역이 점차 넓어졌고, 기존 부체제 내 독립적 세력들의 자율성이 축소되었다는 점이다. 주변 소국을 하나씩 흡수할 때마다, 왕의 권위는 연맹 내부를 향해서도 동시에 강화되었다.

조나 정벌 이후 조나의 부족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기록은 없다. 그러나 고구려의 일반적 패턴으로 보면 이들은 공납 의무를 지는 예속 집단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곡물, 모피, 군사력 — 피정복 집단이 제공하는 이 자원들은 고구려가 다음 팽창을 준비하는 데 쓰였다.

이 구조는 현대 기업의 인수합병과 구조적으로 닮아 있다. 피인수 기업의 자원과 역량을 흡수하여 다음 단계의 성장을 위한 발판으로 삼는 논리. 물론 기업 M&A에는 법적 동의와 주주에 대한 대가 지급이 수반되지만, 흡수한 자원으로 다음 팽창을 준비한다는 구조적 논리는 시대를 가로질러 반복된다.

강함과 유연함이 동시에 필요할 때

조나 정벌을 두 개의 다른 눈으로 보자.

첫 번째 눈은 한비자(韓非子)적 사유다. 한비자의 〈난세(難勢)〉편은 이렇게 말한다.

《한비자(韓非子)》 〈난세(難勢)〉

“현명함에 기대는 자는 요(堯)·순(舜)이 오기를 기다려야 하니, 천 세대에 한 번이다. 위세에 기대는 자는 평범한 군주도 다스릴 수 있으니, 이것이 세(勢)의 힘이다.”4

핵심은 이것이다. 국가의 안정은 탁월한 군주 개인의 덕성에 기댈 수 없다. 위세라는 구조가 작동해야 한다. 그리고 위세는 반드시 한 번은 실제로 작동해 보여야 한다 — 왕의 명령이 관철된다는 것을. 도두처럼 항복하면 관등을 받는다. 조나처럼 저항하면 정벌을 당한다. 이 두 결과의 대비 자체가 이후의 질서를 만든다.

두 번째 눈은 노자(老子)다. 노자는 물의 철학자였다. 그는 《도덕경》 78장에서 말했다.

《도덕경(道德經)》 78장 — 노자(老子)

天下莫柔弱於水,而攻堅強者莫之能勝,其無以易之。弱之勝強,柔之勝剛,天下莫不知,莫能行。

천하막유약어수,이공견강자막지능승,기무이역지。약지승강,유지승강,천하막부지,막능행。

“세상에 물보다 부드럽고 약한 것은 없다. 그러나 굳고 강한 것을 이기는 데 물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이것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없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굳은 것을 이긴다는 것을 세상 모든 사람이 알건만, 능히 행하는 자가 없다.”5

이 마지막 구절이 이 글에서 가장 무거운 말이다. 모르는 자가 없건만 능히 행하는 자가 없다. 갈사국에는 유연하게, 조나에는 단호하게 — 이 두 가지를 상황에 따라 교차하는 것. 알기는 쉽고 행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노자는 2,600년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물론 이 한비자·노자의 대비는 사후적 해석 틀이다. 고구려 초기에 이러한 사상적 언어가 실제로 의사결정을 이끌었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이 틀의 가치를 지우지는 않는다. 철학의 역할은 당시 군주의 독서 목록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구조를 반복해 선택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은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서기 70년대, 세계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한비자의 위세론과 노자의 유연함 — 이 두 논리가 고구려만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은, 같은 시기 지구 위에서 벌어진 사건들이 보여준다.

로마 제국은 브리타니아 북부를 정벌하고 있었다. 서기 71년부터 78년 사이, 케리알리스와 프론티누스는 브리가테스(Brigantes) 부족과 실루레스(Silures) 부족을 차례로 진압하고 로마의 지배권 아래 편입시켰다.6 저항하는 자에게는 군단의 물리력을, 복속한 자에게는 로마 시민권으로 가는 길을 열어두는 방식이었다.

후한(後漢)에서는 반초(班超)가 서역 원정을 시작하고 있었다. 서기 73년경, 명제(明帝)의 명을 받은 반초는 소규모 병력을 이끌고 서역으로 향했다.7 반초의 방식은 외교와 군사의 조합이었다. 항복을 유도하고, 저항하는 자만 쳤다.

조나를 정복한 고구려, 브리타니아 부족들을 진압한 로마, 서역 소국들을 회유한 후한. 세 국가는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과제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세 국가 모두, 항복에는 유연하게 저항에는 단호하게라는 이중 논리를 어떤 방식으로든 작동시켰다.

세 사례를 우열로 판정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각 국가가 처한 지리·내부 구도·문화적 조건이 달랐고, 결과도 그 복합적 조건의 산물이었다. 다만 국가가 이질적 집단을 흡수하는 방식의 차이가 장기적으로 어떤 씨앗을 심는지를 묻는 것 — 그 질문을 가지고 바라볼 때 72년의 조나 정벌은 단순한 정복 기사가 아니라 구조를 드러내는 렌즈가 된다.

이 비교의 목적은 우열 판정이 아니다. 국가가 이질적 집단을 흡수하는 방식에는 저마다 다른 논리와 조건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방식의 차이가 장기적으로 어떤 결과의 씨앗을 심는지를 묻는 것이다. 그 질문을 가지고 역사를 바라볼 때, 72년의 조나 정벌은 단순한 정복 기사가 아니라 구조를 드러내는 렌즈가 된다.

여백의 무게

서기 72년, 조나의 왕은 사로잡혔다.

그의 이름은 기록에 없다. 그가 저항을 선택한 이유도 없다. 그가 사로잡힌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도 없다.

역사는 승자의 목소리로 쓰인다. 사로잡힌 자, 저항했다가 패배한 자, 이름도 남기지 못한 자들 — 그들의 이야기는 기록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없었다면 고구려도 없었다.

강함과 유연함을 동시에 갖춘 국가만이 오래간다. 그러나 그 강함의 비용은 언제나 이름 없는 자들이 먼저 지불한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멀리서 바라볼 때, 같은 질문이 떠오른다. 우리는 누구의 목소리로 지금의 질서를 기록하고 있는가.

기록되지 않는 자들의 몫을 묻는 것 — 그것이 이 시리즈가 멈추지 않는 이유다.

다음 글에서는 서기 74년, 태조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지 않고 환나부의 설유(薛儒)를 보내 주나(朱那)를 정벌하는 장면을 살핀다. 왕이 직접 가지 않는다는 것 — 그 선택이 말하는 권력의 구조를 읽는다.


* 참고할 말씀: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 마태복음 10:29


1 《삼국사기(三國史記)》 권15, 고구려본기 제3, 태조대왕 20년(서기 72년) 조. 원문: “春二月,伐藻那,虜其王.” 김부식(金富軾) 저, 1145년.

2 《삼국사기》 권15, 고구려본기 제3, 태조대왕 22년(서기 74년) 조. 주나(朱那) 정벌 기록.

3 고구려 초기 부체제(部體制) 논쟁: 노태돈, 《고구려사 연구》(사계절, 1999), 2장. 임기환, 《고구려 정치사 연구》(한나래, 2004), 1장. ※ ‘5부족 연맹’이라는 표현은 대중적으로 통용되나, 학계에서는 수평적 연합인지 왕 중심의 위계적 구조인지를 두고 논쟁이 지속 중이다. 본문에서는 ‘부체제’로 표기하였다.

4 한비자(韓非子), 《한비자》 〈난세(難勢)〉편. 원문 맥락: “恃賢則如堯舜,千世而一有也;恃勢則如桀紂,千世而一有也。抱法處勢則治,背法去勢則亂.” 진수(陳壽) 저(3세기) 아님 — 한비자(기원전 3세기 한나라 법가 사상가) 저.

5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78장. 원문: 天下莫柔弱於水,而攻堅強者莫之能勝,其無以易之。弱之勝強,柔之勝剛,天下莫不知,莫能行。

6 케리알리스의 브리가테스 정벌(서기 71~74년) 및 프론티누스의 실루레스 정벌(서기 74~78년): Tacitus, Agricola, 17; Tacitus, Histories, III. 참고: Sheppard Frere, Britannia: A History of Roman Britain (Routledge, 1987), pp.96~112.

7 반초의 서역 원정(서기 73년경): 범엽(范曄), 《후한서》 권47, 〈반초열전〉. ※ 원정 시작 시점은 사료에 따라 72년 말~73년 초로 엇갈리며, 학계에서는 ’73년경’으로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참고: Rafe de Crespigny, A Biographical Dictionary of Later Han to the Three Kingdoms (Brill, 2007), pp.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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