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다를 경작한 섬, 낸터킷
포경 시리즈 ③ — 작은 섬은 어떻게 세계의 에너지 시장을 쥐었는가
Watchman · 2026년 10월 13일 · 바다
빛의 단위가 고래의 머리에서 나왔다
“백 촉짜리 전구”라는 말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와트라는 단위가 일상어가 되기 전, 우리의 어른들이 전구의 밝기를 말할 때 쓰던 단위다. 촉(燭)은 글자 그대로 촛불이다. 촛불 하나의 밝기를 자로 삼아 세상의 밝기를 쟀다는 뜻이다.
그런데 19세기 영국이 법으로 정한 ‘표준 촛불’은 아무 초가 아니었다. 1860년 영국의 도시가스법(Metropolis Gas Act)은 가스등의 밝기를 촛불에 견주어 재도록 하면서 이 단위를 처음 법의 언어로 옮겼고, 규격은 곧 굳어졌다. 한 파운드에서 여섯 자루가 나오는 경뇌유 초가 한 시간에 120그레인(약 7.8g)씩 탈 때의 밝기다.¹ 빛을 재는 잣대의 재료가 향유고래의 머리에서 나온 기름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밝기의 국제 단위인 칸델라(candela)라는 이름에도 그 촛불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한 시대가 무엇을 기준으로 삼는지는 그 시대가 무엇에 기대어 살았는지를 드러낸다. 그 기름을 세계에 대던 곳은 대서양 한가운데의 모래섬이었다. 낸터킷이다.
모래뿐인 섬이 선택한 유일한 밭
낸터킷은 미국 매사추세츠 케이프코드에서 남쪽으로 약 50km 떨어진 대서양 위의 섬이다. 1659년 영국계 이주민이 들어왔을 때, 이 섬이 내어줄 것은 많지 않았다. 토양은 척박했고 곡식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양을 길러 양모를 팔았지만 섬 하나가 먹여 살릴 수 있는 규모에는 한계가 분명했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독점 회사가 연 북극 바다를 살펴보았다. 스피츠베르겐의 포경은 특허장을 쥔 회사가 해안에 기지를 세우고 가마를 걸어 움직인 사업이었다. 낸터킷의 출발은 그와 달랐다. 특허장도 독점 회사도 없이, 해안으로 밀려오거나 해안 가까이 지나가는 고래를 작은 배로 쫓는 것으로 시작했다. 1690년 케이프코드의 이카보드 패덕이 섬 사람들에게 고래 잡는 법을 가르쳤다는 전승이 있다.²
전환점은 향유고래였다. 전승에 따르면 1712년 크리스토퍼 허시의 배가 폭풍에 밀려 먼바다로 나갔다가 향유고래를 잡아 돌아왔다.² 이 일화의 세부는 확정하기 어렵지만, 그 뒤의 방향은 분명하다. 섬 사람들은 해안의 고래를 기다리지 않고 먼바다의 고래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향유고래는 값이 달랐다. 머리의 경뇌유로 만든 초는 연기와 냄새가 적고 밝았으며, 일반 동물 기름 초보다 훨씬 귀한 물건이었다. 몸에서 얻는 기름도 등불과 기계 윤활에 쓰였다. 이 값어치가 먼 항해의 비용을 정당화했고, 배는 점점 더 멀리 나갔다.
여기에 결정적인 기술이 더해졌다. 앞 편의 원양 포경이 지방을 통에 담아 본국 항구로 가져가 끓이는 방식이었다면, 낸터킷은 기름을 끓이는 가마를 배의 갑판 위에 올렸다. 배는 육지로 돌아올 필요 없이 바다 위에서 기름을 만들어 통에 담았다. 항해는 수개월에서 몇 년으로 길어졌고, 바다 전체가 작업장이 되었다. 배는 운송 수단을 넘어 바다 위를 떠다니는 공장이 되었다.
사람과 제도도 이 방향으로 짜였다. 선원은 고정 임금이 아니라 몫(lay)으로 보수를 받았다. 잡지 못하면 받지 못하고, 많이 잡으면 많이 받는 구조였다. 섬 주민의 다수를 차지한 퀘이커 공동체의 상호 신뢰와 검약은 선주와 선원이 얽힌 이 장기 투자 구조를 지탱했다.
이 구조에는 그늘도 있었다. 18세기 초 영국계 낸터킷 사람들은 채무로 노동을 묶는 제도를 들여왔고, 왐파노아그 원주민은 포경 초기의 노잡이로 일했다. 한 척의 노잡이 대부분이 왐파노아그였고 키를 잡는 것은 영국계 한 사람이었다는 설명이 있다.³ 낸터킷의 퀘이커들은 이미 18세기 초부터 종신 노예 소유에 반대하는 흐름을 보였지만, 빚으로 묶인 노동은 그 바깥에 남았다.⁴ 상호 신뢰와 검약은 공동체 안쪽의 규범이었고, 바깥쪽의 노동은 다른 규범으로 움직였다.
1760년대 전염병으로 섬의 원주민 인구가 크게 줄자 선주들은 본토와 인근 마을에서 선원을 구했다. 마서스비니어드 게이헤드의 왐파노아그 사람들과 흑인 작살잡이들이 그 빈자리를 메웠던 것으로 전해진다.⁵
1775년 3월, 영국 의회에서 에드먼드 버크는 식민지와의 화해를 호소하며 뉴잉글랜드 고래잡이꾼들을 칭송했다. 극지의 얼음 바다까지 파고든 이 사람들을 무력으로 누를 수 있겠느냐는 논법이었다.⁶ 당시 낸터킷 선단은 150척 안팎으로 전해진다.⁶
그러나 이 섬의 성공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독립전쟁은 중립을 지키려던 퀘이커 섬을 봉쇄와 나포로 몰아붙였고, 전쟁이 끝나자 일부 선주는 영국령과 프랑스로 근거지를 옮겨 보려 했다. 1791년 낸터킷의 배 비버호가 케이프 혼을 돌아 태평양으로 향한 것은 이 섬의 활로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19세기에 들어 포경의 중심은 같은 매사추세츠의 뉴베드퍼드로 넘어갔다. 낸터킷 항 입구의 모래톱은 선박이 커질수록 족쇄가 되었다. 1842년에는 배를 띄워 모래톱을 넘기는 ‘낙타(camel)’라는 부선까지 동원했지만 근본 해결은 아니었다. 1846년 7월 대화재가 시가지를 태웠고, 낸터킷의 마지막 포경선은 1869년에 떠났다.⁷
지리적 약점이 섬을 바다로 내몰았고, 바다가 섬을 세계의 중심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같은 지리가 섬을 밀어냈다. 이 구조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모래땅에서 건진 세 개의 문장
낸터킷을 읽는 첫 렌즈는 『모비 딕』이다. 허먼 멜빌은 14장에서 낸터킷 사람을 두고, 바다 위에 살며 바다를 자기만의 농장처럼 갈아 나가는 사람이라고 썼다.⁸ 바다를 ‘경작’한다는 이 은유는 정확하다. 낸터킷 사람들에게 바다는 모험의 무대가 아니라 일터이자 밭이었다. 그러나 같은 장에서 멜빌은 정반대의 은유도 꺼낸다. 낸터킷 사람들이 알렉산드로스 같은 정복자들처럼 바다 세계를 정복했고, 지구의 3분의 2가 낸터킷 사람의 것이라고 했다.⁸
경작과 정복은 한 장 안에 나란히 있지만 같은 말이 아니다. 경작은 다음 해의 수확을 전제하고, 정복은 그렇지 않다. 갑판 위에 가마를 올린 배는 밭이면서 공장이었고, 이 밭의 작물은 한번 거두면 같은 자리에서 다시 나지 않았다.
두 번째 렌즈는 애덤 스미스다. 『국부론』(1776)은 분업의 정도가 시장의 크기에 의해 제한된다고 말한다.⁹ 낸터킷은 이 문장의 역설적인 증명이다. 땅이 좁고 박했던 섬이 세계 시장을 상대하는 순간, 한 가지 일에 극단적으로 전문화할 수 있었다. 좁은 국내 시장이었다면 불가능했을 전문화다. 약점이 전문화를 낳고, 전문화가 시장을 낳았다.
그 반대편에서 읽을 문장이 장자에게 있다.
山木自寇也,膏火自煎也。
(산목자구야,고화자전야。)
“산의 나무는 쓸모 있어서 스스로를 베이게 하고, 등불의 기름은 스스로를 졸여 불을 밝힌다.”¹⁰
쓸모가 있다는 것은 값이 있다는 뜻이고, 값이 있다는 것은 거둬 가는 손이 온다는 뜻이다. 장자가 말한 膏火(고화)는 이 글에서 말하는 바로 그 등불의 기름이다. 장자는 같은 대목을 사람들이 쓸모 있음의 쓸모만 알고 쓸모없음의 쓸모는 알지 못한다는 말로 맺는다.¹⁰ 향유고래의 머리는 쓸모를 알아본 순간부터 값이 매겨졌고, 값이 매겨진 순간부터 바다 어디에서도 안전하지 않게 되었다. 세상을 밝히는 것이 자기 몸을 태운다는 문장은 2천 년 남짓 지난 뒤 대서양의 한 섬에서 문자 그대로의 사실이 되었다.
한계는 사라지지 않고 멀어질 뿐이다
낸터킷의 사례에서 반복되는 패턴을 정리하면 이렇다.
조건의 결핍은 전문화를 낳는다. 땅이 박하고 항구가 좁았기 때문에 이 섬은 바다 하나에 모든 것을 걸었다. 이 섬에는 대체로 특허장도 독점 회사도 없었다. 선주 가문들과 몫으로 얽힌 선원들, 서로의 신용을 아는 작은 공동체가 그 일을 했다. 결핍이 길을 정해 주자 제도(몫제), 기술(갑판 위의 가마), 공동체(퀘이커의 신뢰)가 한 방향으로 맞물렸다.
전문화는 시장이 클수록 깊어진다. 이 섬이 쥔 것은 고래가 아니라 세계의 밤이었다. 런던의 가로등과 등대, 공장 기계의 윤활이 이 섬의 선단에 기대었다. 시장이 커질수록 전문화는 더 깊어졌고, 깊어질수록 방향을 바꾸기가 어려워졌다.
자원의 한계는 사라지지 않고 멀어진다. 해안에서 고래가 줄면 배는 먼바다로 나갔고, 대서양에서 줄면 태평양으로 나갔다. 항해가 수개월에서 수년으로 길어진 것은 기술의 승리이기도 했지만, 한계가 눈앞에서 지평선 너머로 밀려났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한계는 없는 한계로 취급된다. 이것이 자원 위에 세워진 산업이 가장 자주 저지르는 착각이다.
성공의 조건이 곧 몰락의 조건이 된다. 모래섬이라는 지리가 이 섬을 바다로 내몰았고, 같은 지리, 곧 항구의 모래톱이 이 섬을 시대에서 밀어냈다. 약점이 강점이 되는 순간이 있고, 그 강점이 다시 약점으로 돌아오는 순간이 있다. 이 둘은 같은 조건에서 나온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 사회가 한 가지 자원에 모든 것을 맡길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그리고 그 기록은 이 시리즈가 앞으로 따라갈 질문, 바다의 생명을 연료로 바꾼 문명은 왜 스스로 멈추었는가로 이어진다.
우리가 아직 밝히지 않은 것
낸터킷이 항구의 모래톱과 1846년의 화재로 먼저 물러난 뒤에도 고래기름 장사는 끝나지 않았다. 같은 매사추세츠의 항구 도시 뉴베드퍼드가 포경의 중심이 되어 그 시장을 이어 갔다.
그 시장의 불을 끈 가장 큰 힘으로 흔히 꼽히는 것은 땅속에서 나온 기름, 곧 석유다. 1859년 8월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석유 시추가 성공했다. 이 일은 처음부터 램프에 쓸 고래기름을 대신할 기름을 찾으려는 시도였다고 전해진다.¹¹ 한 가지 짚어 둘 것이 있다. 램프용 기름인 등유는 그때 이미 석탄을 가공해서 만들고 있었다. 석유가 새로 가져온 것은 등유라는 물건이 아니라, 등유를 더 싸게 만들 수 있는 원료였다.
고래가 줄어든 것도 포경을 흔든 원인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고래기름에서 등을 돌린 데에는 값싼 대체재가 생겼다는 사실이 크게 작용했다고 흔히 설명된다. 고래가 구해진 것이 아니라 필요 없어진 것이다. 이 사실은 이 시리즈의 가장 불편한 대목이 될 것이다. 필요가 사라지는 것과 안전해지는 것은 같은 말일까. 이 이야기는 다음 편들에서 이어진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촉’의 자로 삼고 있을까. 우리가 밝기를 재는 그 기름은 지금 어느 바다에서 얼마나 먼 곳까지 나가 길어 오고 있을까.
멀리서 보아야 보이는 것들은 대개 가까이 있을 때 가장 밝게 타고 있던 것들이다. 바라보는 자의 기록은 그 불빛이 어디서 길어 온 것인지를 묻는다.
* 참고할 말씀: ‘배들을 바다에 띄우며 큰 물에서 일을 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들과 그의 기이한 일들을 깊은 바다에서 보나니’ — 시편 107:23–24
1. Metropolis Gas Act 1860(촛불 밝기 정의); Gasworks Clauses Act 1871, Schedule A(경뇌 초 파운드당 6자루, 시간당 120그레인).
2. 낸터킷 포경의 기원 전승(패덕 1690, 허시 1712).
3. Philbrick, N., In the Heart of the Sea(2000); Smithsonian Magazine, “How Nantucket Came to Be the Whaling Capital of the World”.
4. Nantucket Historical Association, “Was there ever slavery on Nantucket?”
5. 1763~64년 전염병과 인구 변화; Shoemaker, N., Native American Whalemen and the World(UNC Press, 2015).
6. 에드먼드 버크, 식민지 화해에 관한 의회 연설(1775.3.22); 1775년 전후 낸터킷 선단 규모.
7. 독립전쟁 피해, 비버호(1791), 모래톱과 낙타(1842), 대화재(1846.7), 마지막 출항(1869).
8. Melville, H., Moby-Dick(1851), ch. 14 “Nantucket”.
9. Smith, A., The Wealth of Nations(1776), Book I, ch. 3.
10. 『莊子』 「人間世」.
11. Drake Well Museum; American Oil & Gas Historical Society, “American Oil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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