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갈라지는 신용, 무너지는 순서
건설업 도산에서 회사채 냉각까지, 실물경제가 보내는 신호
2026.09.07 · 정치·외교 · 경제·국방
공사 소리가 멎은 자리
새벽 여섯 시, 원래대로라면 레미콘 트럭이 골목을 채워야 할 시간이다. 그런데 올여름 지방의 여러 현장은 크레인만 세워둔 채 조용하다.
국토교통부 건설산업지식정보시스템 집계로, 올해 상반기 폐업을 신고한 건설사는 2,092곳에 달했다 — 통계 집계 이래 최대치이자 2014년 상반기 이후 12년 만의 최고 수준이다.1 이 속도라면 올해 연간 폐업 건설사는 사상 처음으로 4천 곳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1
숫자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순서다. 원청 역할을 하는 종합건설사의 폐업이 전년 대비 16% 늘었고, 5년 전과 비교하면 150% 넘게 폭증했다.1 원청이 먼저 흔들리자 그 밑에 있던 전문건설사, 자재상, 일용 노동자의 일감이 차례로 끊겼다. 건설업은 하나의 업종이 아니라 바닥 고용과 바닥 소비를 떠받치는 뿌리였다는 사실이, 뿌리가 마르고 나서야 드러나고 있다.
같은 시기 자금 시장에서는 다른 종류의 신호가 나왔다. 올해 상반기 회사채 발행액은 만기 도래액에 못 미쳐 9조 5,992억 원의 순상환을 기록했다.2 이는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채무를 상환하며 재무 건전성을 높였다기보다는, 신규로 차입할 수 있는 자원보다 상환 기일에 도달한 빚이 더 많아 유동성 창구가 고사되어가는 신호로 풀이할 수 있다. 그리고 법원에는 회생을 신청하는 기업보다 파산을 신청하는 기업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 다시 일어서기를 시도하기보다, 문을 닫는 쪽을 택하는 기업들이다.3
세 가지 장면은 서로 다른 부처, 다른 통계에서 나왔다. 그런데도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된다. 지금 바닥 경제에 필요한 것은 “얼마나 더 성장할 것인가”가 아니라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1990년 3월, 도쿄가 문을 닫아걸던 날
1990년 3월, 일본 대장성은 부동산 관련 대출 증가율을 총대출 증가율 이하로 묶는 이른바 ‘부동산 융자 총량규제’를 은행권에 지시했다. 명분은 과열된 땅값을 잡겠다는 것이었지만, 실제 효과는 훨씬 급격했다. 은행들은 부동산·건설 관련 여신을 한꺼번에 조이기 시작했고, 그 순간까지 끝없이 오를 것처럼 보였던 도쿄의 땅값은 1991년을 지나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문제는 땅값 하락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이후 은행이 보인 태도였다. 부실을 이미 짊어진 대출은 만기를 연장해 표면적으로 살려두면서도, 새로운 자금은 신용도가 검증된 우량 기업에만 흘러갔다. 일본에서는 이 현상에 ‘카시시부리(貸し渋り)’ — 대출을 조인다 — 라는 이름이 붙었다. 자금이 완전히 마른 것이 아니라, 자금이 갈 곳을 골라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지방 중소 건설사와 부동산 관련 대출을 전문으로 하던 ‘주센(住専)’들은 결국 1990년대 중반 잇달아 파산 처리 수순을 밟았다.
한국의 PF 시장에서도 이와 유사한 구조적 취약성이 지적되곤 한다. 부실 사업장의 위험이 즉각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은 채, 만기 연장과 재조정을 거치며 뒤로 미뤄지는 경향이 금융권 안팎에서 포착되기 때문이다.7 이러한 흐름이 1990년대 일본의 초기 대응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고 단정하기는 아직 이를 수 있다. 다만, 부실 인식을 유예하려는 선택 자체가 위기 상황에서 반복되기 쉬운 유혹이라는 점만큼은 두 시장의 공통된 궤적으로 볼 여지가 있다.
1990년의 도쿄가 신용의 문을 등급별로 나눠 걸어 잠갔을 때와, 2026년의 한국에서 AA등급 이상 우량채는 소화되는 반면 A~BBB등급 회사채가 잇달아 미달되거나 발행 자체를 접는 지금 사이에는4 30여 년의 시차만큼의 거리가 있을 뿐, 신용이 등급을 따라 갈라지는 순서는 다르지 않다. 시장은 위기 앞에서 모두를 함께 구하지 않는다 — 먼저 살아남을 만한 쪽부터 골라낸다.
다만 이번 국면에서 한국이 보이는 반응은 1990년대 일본과 정확히 같은 방향으로 흐르지는 않는다는 점도 짚어둘 필요가 있다. 일본은 부실 기업을 서둘러 정리하는 대신 대출 만기를 계속 연장해 ‘좀비 기업’을 양산했고, 그 결과가 훗날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는 장기 정체였다. 반면 지금 한국의 법인들은 회생 절차를 통해 시간을 버는 쪽보다 파산을 신청해 아예 문을 닫는 쪽을 더 많이 택하고 있다.3 이것이 일본식 좀비화를 피해가는 더 건강한 신호로 읽힐 수 있는지, 아니면 회복에 대한 기대 자체가 완전히 소진되었다는 신호로 읽어야 하는지는, 지금 시점에서 하나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이익을 좇는 발걸음과 자기보존의 권리
司馬遷, 『史記』 貨殖列傳 (사마천, 『사기』 화식열전)
天下熙熙,皆爲利來;天下攘攘,皆爲利往。(천하희희, 개위리래; 천하양양, 개위리왕。)
“천하가 왁자지껄 몰려드는 것은 모두 이익을 위해 오는 것이요, 천하가 시끌벅적 오가는 것은 모두 이익을 위해 가는 것이다.”5
사마천은 이 문장을 도덕적 비난으로 쓰지 않았다. 사람과 자본이 이익을 따라 움직이는 것은 부끄러워할 현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 관찰해야 할 자연스러운 흐름이라는 뜻에 가까웠다.
Thomas Hobbes, 『Leviathan』 Ch.13 (토머스 홉스, 『리바이어던』 13장)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 그 근저에 자리한 자기보존을 향한 권리6
토머스 홉스는 다른 결의 언어로 비슷한 지점을 짚었다. 그는 공통의 권력이 없는 자연 상태에 놓인 인간이 결국 서로 다투게 되는 근저에는, 무엇보다 자기보존을 향한 권리가 있다고 보았다.6 국가나 시장이라는 공통의 안전판이 흔들리는 순간, 개별 기업이 가장 먼저 지키려 하는 것은 성장이 아니라 생존 그 자체라는 진단이다.
철학은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사마천이 관찰한 ‘이익의 물길’은 자본이 우량 등급으로만 쏠리는 냉혹한 생리를 보여준다. 반면 홉스가 짚은 ‘자기보존의 권리’는, 그 물길에서 밀려난 기업이 성장을 포기하고 파산을 선택해서라도 스스로를 지키려는 본능에 가깝다. 하나는 돈의 논리이고, 다른 하나는 기업이라는 생명체의 논리다. 시장의 안전판이 흔들릴 때 자본은 안전지대로 몰려들고, 벼랑 끝에 몰린 기업은 회생 대신 청산을 택하며 스스로 문을 닫는다. 회생 절차를 거치더라도 신규 자금 조달이 사실상 가로막힌 데다, 존속가치보다 청산가치가 더 높게 평가받는 현실이 이 같은 선택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해석된다.8 이익을 좇는 자본의 움직임과 살기 위해 문을 닫는 기업의 계산법은, 지금 한국의 자금 시장과 건설 현장에서 공교롭게 겹쳐지고 있다.
같은 순서로 무너지는 이유
1990년 도쿄의 은행과 2026년 한국의 채권 시장은 같은 순서를 따른다. 위기가 오면 먼저 담보와 신용이 약한 쪽의 문이 닫히고, 그다음 그 문 아래 있던 하청·자재·노동이 함께 흔들리며, 마지막에 가서야 통계로 잡힌다. 건설업 폐업 통계가 12년 만의 최대치를 기록했다.1 회사채 시장의 순상환이 뉴스가 됐다.2 법인 파산 신청이 역대 기록을 다시 썼다.3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위기”라는 이름이 붙는다. 위기는 항상 바닥에서 먼저 시작되지만, 신호는 언제나 통계로 확인된 뒤에야 도착한다.
일본은 이 순서 앞에서 부실을 정리하는 대신 시간을 벌었고, 그 대가로 성장이 멈춘 채로 버티는 기업들과 함께 10년, 20년을 보냈다. 한국이 지금 걷고 있는 길이 그와 같은 유예의 길인지, 아니면 더 빠르게 정리하고 더 빠르게 다시 일어서는 길인지는 아직 판가름 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 지금 이 순간 바닥 경제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성장의 둔화가 아니라 생존의 재분배다. 살아남을 자격을 신용등급이, 담보가, 버틸 체력이 대신 심사하고 있는 셈이다.
사마천이 관찰한 이익의 흐름과 홉스가 짚은 자기보존의 논리는, 30여 년의 시차를 두고 도쿄와 서울에서 같은 얼굴로 반복되고 있다. 그 얼굴을 정치적 책임 공방으로 소비할 것인가, 아니면 구조적 신호로 읽어낼 것인가는 지금부터의 선택에 달려 있다.
생존이 성장이 되는 날은 오는가
일본 대장성도, 그 어떤 정부도 시장이 이익을 따라 흐르는 물길 자체를 막지는 못했다. 다만 그 물길이 지나치게 급격히 갈라질 때, 밀려난 쪽을 어떻게 다시 물길 안으로 데려올 것인지는 매번 다른 답을 내놓았다. 1990년대 일본은 그 답을 미루다 잃어버린 시간을 얻었다.
이 여름 흔들린 것은 자금 시장만이 아니었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권한이 옮겨가는 자리마다 책임질 얼굴이 조용히 옅어지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건설 현장과 채권 시장에서 지금 벌어지는 일도 다르지 않다 — 자리를 지켜야 할 곳에서, 이번엔 빚을 갚을 얼굴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에서.
바라보는 자의 기록은 오늘, 공사 소리가 멎은 현장과 등급으로 갈라진 채권 시장, 그리고 회생 대신 파산을 택하는 기업들의 계산법을 나란히 기록해두었다. 이 계산법이 언젠가 다시 “생존”이 아니라 “성장”을 말할 수 있는 지점으로 돌아올 것인가, 아니면 우리는 이 갈라짐을 새로운 정상 상태로 받아들이는 데 이미 익숙해지고 있는 것인가. 아직은 누구도 답하지 않았다.
* 참고할 말씀: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 마태복음 7:27
각주
1. 상반기 건설사 폐업 2,092곳, 12년 만 최다 및 종합건설사 폐업 증가율 — 국토교통부 건설산업지식정보시스템(KISCON), 2026년 7월 보도 종합
2. 2026년 상반기 기업 직접금융 조달실적, 회사채 순상환 9조 5,992억 원 — 금융감독원, 2026.08.04 발표
3. 법인 파산 신청 건수 증가 추이(2021~2026) 및 회생 대비 파산 비율 — 법원통계월보 종합
4. 상반기 회사채 발행 신용등급 구성(A등급 21.0%, BBB등급 이하 2.2%) 및 비우량채 시장 위축 — 금융감독원(2026.08.04), 이데일리 마켓in(2026.06~08) 보도 종합
5. 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 화식열전(貨殖列傳)
6.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 『리바이어던(Leviathan)』 제13장
7. 부동산 PF 부실 위험의 연쇄 지연 구조(만기 연장 및 조건 재조정)에 관한 금융권 보고서 및 2026년 관련 보도 종합
8. 법인 회생 인가 이후의 신규 자금 조달 경색 및 존속가치 대비 청산가치 역전 현상 — 도산 실무 및 2026년 관련 보도 종합
9. 일본 부동산 융자 총량규제(1990.3) 및 버블 붕괴, 주센(住専) 파산 관련 역사적 사실 — 공개 역사 자료 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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